|
죄악이 관영 하는 세상 속에 죄를 해결하려 오셨던 주님은 당연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미움과 조롱을 받으시면서 죄의 수치를 해결하신 주님의 같은 진리의 복음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또한 같은 세상이 좋아할 리가 없다.
세상은 자신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어울리는 대상을 미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죄인이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일꾼들을 미워하게 되어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이어 받을 제자들과 그 교훈을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께서 당하셨던 같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을 각오 시키고 계시다.
그러나 이 말씀에 3번씩이나 당부하시는 확신은 “두려워하지 말라!”(26, 28, 31)는 격려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당할 핍박과 거기에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을 복음을 들고 나갈 사도들과 지금도 같은 입장의 그리스도인에게 주고 계신 것이다.
Ⅰ.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라!(24~28)
실재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거나 교회를 대적하던 사람들은 다 그 말미가 비참했지만 지금도 주님의 복음은 세상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고 있으니 이 약속은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1.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자들은 그의 제자들을 역시 핍박할 것이다.(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당시의 흔한 교훈이라고 전한다. 일반적으로도 어떤 가문이나 학파의 우두머리들을 들먹여 그 제자나 집 사람을 일컫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일본의 한류 열풍으로 인해서 대한민국 백성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보도는 더러 있는 일이고 중국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 이유를 상거래에 신실치 못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 나라의 진실한 사람들까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일들이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좇아내시는 주님을 가리켜 “…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12:24)고 악평을 했고 주님께 이런 태도를 취했던 그들이 제자들에게도 결코 좋은 대우를 할 리 없으므로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씀이다.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을 귀신의 왕이라고 대적했던 실상 마귀의 도구가 된 세상 사람들은 천국의 일꾼인 제자들에게 더한 핍박을 가할 것이므로 각오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역시 직접 인용하고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18~20) 하였고 이미 산상보훈에서는 이러한 핍박이 복이라고 가르치신바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사악한 시대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방해하던 역사는 흔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인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기억하고 위로를 얻고 주님과 같은 고난을 당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천국의 일꾼과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26~27)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주님을 위해서 당한 수고나 불이익은 물론이고 고난은 결코 감춰지지 않고 훗날에 반드시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2:2)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 낙심하는 심령이 있다면 이 사실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5:24~25)
죄악도 감추어지지 않고 반드시 선악간에 드러나 심판을 받겠지만 주님을 위한 핍박이나 수고나 불이익을 당한 것 사람은 몰라주고 목회자가 몰라주고 아내가 몰라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반드시 상급을 챙기실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6~7)
3.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에는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대상이 분명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어떤 선택에 있어 늘 갈등 하게 되는데 그것은 ‘순간이냐, 영원이냐!’의 갈림길에 설 때가 많다.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연결한다면 일생에 핍박과 고난을 각오하면 영원을 보장 받지만 이 세상에서 좋은 소리만 듣고 호의호식 하려면 영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하기를 ‘한번 뿐인 인생인데!’ 라고 육신을 선택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 한번 뿐인 인생이 영원을 선택하는 귀중한 기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순간을 잘 먹고 영원한 멸망으로 가느냐, 짧은 인생을 희생하고 영원한 영광을 선택하느냐 하는 간격은 바로 돼지와 사람의 간격 같은 것이다.
또 이러한 간격에서 두려워할 대상도 차이가 나게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공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권력, 돈, 자연, 꿈 등등) 가치의 차이도 여기에서 나타난다. 육신적인 목숨을 최고로 치느냐 영원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느냐 하는 간격이다.
어두움의 세력의 힘은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의 육신의 목숨을 끊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영원의 권한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두면 육신의 목숨을 잃어도 잃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우리가 하늘의 백성이요 일꾼이라면 세상의 어떤 것도 죽음까지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직 이 우주의 모든 영육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 …
Ⅱ.살고 죽는 것은 주님께 달려 있다.(29~31)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절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계획과 주관 밖에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울의 고백을 비리자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여기 ‘한 앗사리온’은 금전의 최소 단위이고 참새는 가장 흔하면서 작은 새를 의미하는 [헬, 스트루디아(stroudia)] 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가장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그런 것 조차 주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하고 사라지고도 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가끔 가다 죽어 있는 짐승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것 조차도 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씀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빠지고 나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머리카락 까지도 세고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만 한다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6:30~31) 말씀하셨던 주님은 우리의 소소한 부분까지도 다 알고 책임지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1)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가치 없어 보이는 미물의 짐승을 버려두시지 않으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물며 하물며 그를 아버지로 섬기는 백성들의 생명과 삶을 책임지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목숨은 주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에 목숨에 대해 연연하는 것은 불신의 자세와 같다.
살고 죽는 문제를 주님께서 쥐고 계시므로 오직 그분의 명령을 최고로 여기는 삶이 되시기를 …
Ⅲ.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영원을 결정한다.(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것이야 말로 영원한 운명이 걸린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신앙 고백의 중요성을 다시 배우게 된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백에 목숨을 걸었고 사실 이 고백이 세상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육신의 유익을 앞세우게 될 때는 이 고백이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이 것은 적어도 예배 중에서나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할 때 요구되는 내용이 아니라 목숨이 담보되고 고백을 요구하는 예는 박해가 심할 때 일수록 흔한 일이었다.
미래의 영원한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고백이다. 천국을 밝히 보는 스데반은 돌이 날아 오는 가운데서도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었다. 목숨이 아깝고 권력이 무서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영원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죽어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구별되어 지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고백 되어지는 신앙은 앞에 사람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영원의 아버지께서 함께 듣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이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 세상의 위협을 이기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유혹을 이긴 자들이 마지막 때에 천군천사와 온 의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나의 왕이라고 고백 된 주님은 마지막에 “내가 그를 안다!”고 칭찬하실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까지도 복되신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데 까지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격려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4~1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