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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0:34~42 2005-01-30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세상을 향해 나갈 제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결론적인 부분에 이르고 있다. 당시와 현재와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갖을 각오와 희생을 확인시키신다. 우리가 천국을 향해 들어선 길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無事安逸하지 않다. 적어도 이 말씀이 증거 되었던 1세기의 박해의 때는 물론 하나님의 빛을 거부하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빛의 사자들과 자녀들에 대한 박해는 주님께서 오실 마지막 때까지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미리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런 일이 닥칠 때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고 준비되고 훈련한 군사들이 전쟁을 감당하듯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내 보내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당부와 험난한 그들의 사역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다.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 홀연히 임하는 어려움은 감당하기 어렵고 실지로 그런 역사는 수없이 세월의 구비구비에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7~29) 라는 성경 속에서의 비극의 역사, 물론 이 말씀은 인류의 종말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백성 되고 일꾼 된 자들에게 닥칠 박해와 환란도 다르지않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시설로 로마제국의 어떤 도시보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휴양 도시였던 폼페이는 AD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전체와 20,000여명의 주민이 함께 화산재에 파묻히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항상 긴장하고 준비된 자세는 핍박과 박해는 물론이고 주님께서 다시 오심에 대한 경계에도 필요한 교훈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2~3)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메시지는 위기나 어려움을 준비시키기 보다는 평안에 대한 약속에 치중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과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에게 홀연히 주님께서 오신다면 얼마나 영광의 약속에 들어 갈 수 있을지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둠의 역사와 싸움은 숙명적이라는 데서 늘 군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말씀도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경계의 교훈이다.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인생에서 고난이나 어려움은 피해 갈 수 없고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준비된 그리스도인, 연달한 주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것을 넉넉히 감당하는 입장에서 세상의 백성들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일지라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경계를 주고 있다.



Ⅰ.복음은 성격상 나눔의 역사를 어찌할 수 없다.(34~36)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사실 복음은 화해의 복음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4~15)라고 선언한 바울은 다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당부는 역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라고 앞의 산상보훈에서도 말씀하신바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은 오해를 일으키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화평은 죄와 타협하는 화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화평은 죄를 거부하고 빛으로 돌아서는 빛과의 화해이다. 이런 입장에서 비로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신 주님의 말씀은 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화해의 복음이지만 그것은 죄와 타협할 수 없는 반드시 진리 편에 속하는 복음이다. 죄를 잘라내고 썩어가는 것을 도려내는 칼질이 필요한 것이고 때로는 자신의 무사안일 하려는 유혹과 게으름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말씀의 칼질이 반드시 필요한 단절의 역사도 감수해야 하는, 마귀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동시에 때로는 넘어지게 하려는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단절해야 하는 아픔이 진리와 화해의 길이며, 칼날같이 날카롭게 어두움을 단절하는 것도 복음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결과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의 관계조차도 나누는 역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실재적으로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불신자들로부터 대단한 항의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곧 나눔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 순서는 가까울 수 있는 관계에서부터 진행되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①사람이 그 아비와, ②딸이 어미와, ③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복음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전쟁을 예언한다. 이보다 가까운 것은 먼저 자신과의 싸움이고 그 다음에는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본다. 바울 사도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하였지만 사실은 진리를 함께 나눌 수 없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나눠짐의 역사는 일어나게 된다.

반드시 가족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결별해야만 할 것들이 많다. 뒤에서 연이어 말하고 있지만 부모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세상의 명예일 수도 있고 사업일 수도 있다.(믿음의 사람들의 담배포 운영) 과거에는 자신에게 가치를 주는 것들이 원수가 되어야 할 때가 분명히 있다. 아플지라도 죄와는 철저하게 갈라서야 진리와 비로소 화해를 이루게 된다.

[521:1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Ⅱ.다른 어떤 것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제자로서 합당치 않다.(37~39)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역시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에 반항하는 가르침이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굉장히 독선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 사람의 사랑하고 하지 않고는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병행되는 성경들에서는 좀더 강하게 표현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막10:2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에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에 대한 사랑과 주님께서 자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차이가 있다.[필로스-아가페] 요한복음21:15~ 17에서 부활하신 후 가릴리 바닷가에 조반을 먹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때로 절대적인 주님을 사랑하기[헬,아가페(agape)] 위하여 육적인 사랑을[헬, 필로스(philos)]포기할 때 모두가 지켜질 수 있지만 육적이고 혈연적인 사랑을 위하여 하나님 사랑을 포기하면 모두를 다 잃게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순서도 먼 곳에서부터 자신으로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①“아비나 어미”는 가장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무의 최상이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도 변경해서 이행하지 않으므로 책망 받았던 내용이다.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5~6)

②“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과계와 자연 관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것은 동물 세계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는 혈육의 가장 본연적인 사랑이다.

③그 다음에는 “자기자신” 이다. 어떤 막다른 골목에서도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최후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다. 가장 세상적인 사람일지라도 “목이 칼이 들어와도 못해요!” 했다가도 사실에서 위기에 닥치면 쉽게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라고 애걸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지경에 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목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시대 사람들의 이기심은 부모도 자식도 가족도 자기 살기 위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죽이고 팔아먹는 상황에서 이 말씀은 더욱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또 조금은 인간적인 사람들의 자식 사랑을 보면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그보다 사랑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어찌 보면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자세를 보면 오늘의 말씀이 더욱 두렵다. 자식을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에 아까운 것이 없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마치 사랑을 구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 아프기까지 하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38) ‘내 인생에 있어서 자기 십자가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자신의 인생에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이나 고난’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각자가 신앙 때문에 당할 수 있는 고난이나 불이익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일세기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시련과 불이익을 당했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았던 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본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신앙생활 하는 것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다시 오심도 별로 기다리는 것 같지 않다. 안타까운 현재의 신앙의 모습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천국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또 결혼에서도 취업에서도 믿음은 너무나 쉽게 포기 되는 모습들을 주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역설적인 선언을 하신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주님 때문에 이 땅에서는 이미 목숨을 잃은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이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자신의 죽음을 늘 확인하면서 우리를 향해서도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했는데도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이득 앞에 너무나 자주 되살아 나는 것을 경험한다.

주님께서 이미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선언 하시는 말씀은 이미 죽어있는 자들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 주님은 어떤 대상보다 자신이 우선 순위에서 뒤쳐지는 것을 용납치 않으신다. [366:3]“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주님은 당부하신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38)시는 주님의 말씀에 부끄럼이 없는 …



Ⅲ.주님의 제자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보장.(40~42)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현실적으로 접대하는 방법이다. 모든 이권과 안락을 주님 때문에 포기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대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그러나 오늘 이 귀한 약속이 사역자들에게만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0, 45) 고 말씀하셨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지만 주님 안에서 형제라는 귀한 믿음으로 접대하고 환영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3~35)

주님은 빛과 어둠의 선택에 대해서도 분명한 각오를 촉구하신다. 중간에 포기할 거라면 애당초부터 시작하지 말 것을 경계하신다. 이것을 전쟁과 건축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눅14:26~33) 적당한 타협으로 평화로 가려고 하는 세상의 화해와는 전혀 다른 빛 속에서의 화해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Conclusions: 복음은 구별의 역사 나눔의 역사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칼처럼 냉정하게 나눠질 수도 있고 죄로 유혹하는 그들이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기를 원하신다. 부모, 자식, 아내, 사업, 어떤 것이 그 첫째자리를 자지 하는 것을 용납치 않으시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주님보다 사랑하는 자를 용납치 않으신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라고 확신을 준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대하는 작은 사랑하나에도 상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냉수 한 그릇의 대접도 상을 잃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만큼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에게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보상 받게 해 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