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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1:16~24 2005-02-13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  
세례요한의 뜻밖의 의심과 함께 주님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 즉, 복음의 우월성에 대해 증거 하셨고 이 복음 시대의 성도들의 위치를 율법시대의 위대한 삶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도 무심한 당시의 세대들에 탄식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초청을 거절하고 왜곡하는 당시의 세대와 오늘의 세대를 한탄하시고 이제부터 23장까지 대적하고 배척하는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표면적으로 책망하시고 회개를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Ⅰ.불신의 세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서로 나누지 못한다.(16~17)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의 이스라엘이나 옛 어린 시절의 우리나라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결혼식 놀이나 장례식 놀이를 흉내내는 것이 때로는 철없는 아이들에게 오락 거리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함께 호응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으면 이내 흥은 깨어지고 만다. 이런 놀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각각이 다른 욕심을 부리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이다.

사랑과 관심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한 것에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와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주님을 거역한 세상 사람들은 서로의 이권이 게재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언제나 막다른 과정에 가서는 함께 할 수 없는 각자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린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연적인 형태이다.

우리는 4복음서에서 주님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마26:57-58; 막14:53-54, 66-72; 눅22:54~62; 요18:12-18, 25-27) 누가복음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본다.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57), 나는 아니로라(58),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0)” 하나님을 부정해 버린 관계에서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관계의 단절이 만들어져 버림을 대변하는 귀중한 인간관계의 공식이다.

그런 세대인 만큼 진정한 기쁨도 애절한 아픔도 서로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당사자만 감당하기 때문에 인생을 감당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단절된 관계의 비극을 해결하시려고 주님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저주의 고독과 슬픔과 아픔의 십자가를 대신 감당하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회복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나눔이 가능하게 되고 그러한 나눔의 장소가 세상과 구별된 교회 속에서 가능하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12:14~16)

특히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대는 다음 12장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시지만 주님을 거역하는 세대를 마음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39),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4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42),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5)”

범죄 한 아담 이후의 세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이런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 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65:2; 롬10:21) 라고 화해를 요청하고 계신다. 하나님께 범죄 한 인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진정한 가슴을 잃어버리고 무관심한 이 세대에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주님은 탄식하신다.



Ⅱ.불신의 세대는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18~19)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위의 16~17의 비유는 물론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 반응하는 당시의 이스라엘을 비유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러한 배척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을 거절해 버린 인생은 어떤 것도 결코 바로 보이지 않는다. 주님과 바울은 이러한 세대를 가리켜 “음란한 세대, 악한 세대, 패역한 세대, 죄 많은 세대, 거스리는 세대” 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세대이기 때문에 금욕하며 하나님의 회개의 요청을 외치던 세례요한에 대하여 ‘귀신이 들렸다’고 거역하고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이라고 거리끼는 창기나 세리나 병자를 막론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딩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별명을 붙여주기가 어려워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 라고 빈정됬던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10:25)고 제자들을 격려하신바 있지만 오늘 날도 세상은 어떤 모습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바른 평가를 해주지 않을 것을 미리 당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고 경계하신다.

믿음의 사람들 조차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어떤 진리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는가?’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경계해야 할 모습이다. 내가 못 행함에 탄식하고 오히려 금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존경할지언정 그러한 모습을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주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자세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내가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것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3)

세상은 신앙적 경건도 믿음의 자유도 좋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경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신앙 속에서도 역시 서로를 향하여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수만은 권능과 은혜를 맛보면서도 회개치 못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주님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안타까워 하신다.



Ⅲ.은혜를 많이 맛볼수록 회개치 못하면 더욱 비극이다.(20~22)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권능은 바로 복음서들에서 ‘표적’이라고 하고 ‘이적’을 비롯한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에 대한 증거로서의 일들을 여기서는 ‘권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언젠가 말씀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기 까지 모든 움직임이 다 신비한 기적으로 가득했고 그러한 일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사도 요한이 증거 한다. 그러나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게실 때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20:30)라든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는 사도 요한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분의 권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무대였던 갈릴지 지방에서 행해졌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늘의 권능을 가장 많이 보고 경험했던 갈릴리 근방의 고을들이 주님의 천국의 초청을 거부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을 듣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고을들 중에 ‘고라신’은 이곳에만 나타나는 도시이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벳새다’(막6:45, 8:22; 눅9:10)만 해도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요1:44, 12:21)으로 기록이 되고 이 부근에서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장정 남자만도 5천명 이상이 그 기적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이러한 안타까움을 주님은 탄식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니느웨 성은 비록 범죄 하여 하늘에서 소돔처럼 망하게 되었어도 요나의 증거를 듣고 회개하여 형벌이 취소된 놀라운 역사를 성경은 전하고 있고 같은 구약 시대의 이방의 대표적인 역사 깊은 고을이었던 두로와 시돈이 예수 당시의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과 비교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23장과 에스겔 26~28에서 이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심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그 도시들이 완성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께서 이적으로 복음을 전하셨더라면 벌써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의 율법의 경계를 듣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 율법의 가르침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의 권능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무서운 경계의 교훈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전도하신 복음을 거부해 버리면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마지막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도 최후통첩(最後通牒)은 거절하면 형벌을 면할 수가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최후 통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

복음시대에 태어 낫다고 하는 것이 믿음에 있어서는 대단한 행운이지만 거절하면 다시 기회가 없다는 입장에서 두려워 해야만 하고 긴장해야만 한다.



Ⅳ.많이 받은 자가 책임도 더 크다.(23~24)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사신 곳(마4:13)일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무려 16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주님의 주 활동 무대였다. 그럼에도 역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 같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시는 말씀이 이사야14:12~14의 바벨론 왕에 대한 경고와 비슷하게 기록이 되고 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23f) =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복음의 거절은 항상 교만이 그 원인이고 교만 자체가 주님 없이 왕 노릇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가버나움이 죄가 넘쳐서 유황불에 타서 망한 소돔과 견주어 지고 있다. 앞의 두로와 시돈도 소돔도 그리스도의 직접 전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벌이 덜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누가 복음을 통하여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12:48)는 두려운 말씀을 하신다. 결국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일수록 그 책임은 더 많고 진리를 깊이 이해한 사람들은 더 깊은 순종을 주님께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을 많이 누렸다고 하는 것은 더 큰 형벌을 부른다는 경계를 오늘 우리 각자가 깨달아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보다도 우리는 복음과 은혜에 대해서 더 많은 소스(source)를 누리고 있음에 더욱 경성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히 순종치 못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된다. 두렵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5~6)

많이 깨닫고도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책망하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에 산다고 하는 우리들이 주님의 얼굴을 세워드리기 위해서라도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할 석이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교회, 우리의 사회를 주님께서 보시면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탄식하시지 않도록 은혜 받은 대로 깨달은 대로 늘 회개하고 영광을 돌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