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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3:1~6; 눅6:6~11
이제 안식일 문제는 도로상의 문제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으로 옮겨지고 있다. 특히 유대인들의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는 신앙적 장소라고 하는데 깊은 의의를 갖는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장소지만 역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은 그 곳을 사람을 책잡고 죽이려는 의도로 드나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할 뿐이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공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소에 상관없이 죄를 짓고 그러한 죄가 종교적인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무서운 심판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무리 거창한 예식이나 그럴싸한 종교적 행사도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창기의 소굴과 다를 것 없다는 주님의 경고를 두려움으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21:12~13)
보이는 유형의 회당이나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드리고 순종하는 각 사람의 심전(心田) 즉, 마음 밭이다. 그래서 완성된 복음 속에서는 성전은 성령이 계시는 전이라고 했고 간음은 음욕을 품는 마음이라고 증거하고 계시는 것이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법 정신은 범죄 한 인간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지 사람을 책잡아서 죽이려는 정신이 아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사실 모든 성경이 이런 이유로 쓰여졌고 이스라엘이나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 남을 참소하고 궁지로 몰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이지 하나님의 속성은 아니다. 비록 율법에 “… 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경계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지 한 사람이라도 죽이기 위한 의도는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율법의 자구에 매이다 보니 완성된 구원의 법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 속에 살아도 이런 위험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경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Ⅰ.간악한 죄의 사람의 본성을 본다.(9~10)
(9)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밀밭 사이를 지나다 시장해서 밀 이삭을 비벼먹은(추수, 타작, 음식을 만듦) 일로 시작된 안식일 문제는 여기서도 계속 된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일이 자신이 구속의 역사를 완성함으로 결국 새 언약의 복음 안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이 주님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씀하셨지만 회당에 들어 오신 주님을 책잡기 위해 육체적인 불구를 가진 장애자까지 이용하는 이들의 간교함이 예수께서 보실 때에 얼마나 가증했겠는가? 지체부자유자를 불쌍히 보기 보다는 그 불편 조차도 자신들의 간악한 계획을 실현하려는 도구로 삼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9)“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했는데, 물론 병행된 기록인 누가복음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로 기록되고 있다. 주님께서나 바울 사도도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하여 규례를 따라 들어 다니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누가복음-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능히 아는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이용해서 주님을 송사 하고자 했다. 가련한 지체 부자유자 조차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본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고소할 구실을 찾고 있다. 자신들의 간악한 욕구를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포장한 인간의 간교함을 보는 것이다. 죄의 사람이면서도 의를 추구하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한다.
Ⅱ.안식일의 정신을 다시 일깨우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는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짐승과 비교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귀중성을 역설하신다.(11~12f)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꼭 같은 의미이지만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눅14:5)
영혼도 없는 짐승의 생명조차 안식일이라도 귀하게 여겨진다면 불편한 한 사람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안식일이라고 중단될 수 없다는 가르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누가복음13:10~17에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0~16)
사망을 향해 떠내려 가는 영혼들은 한시가 급하다.[옛날 시골에서의 홍수]
2.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신다.(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은 단순히 육신이 쉬는 것 만을 위한 것 보다는[사실 휴식 자체가 보다 생산적 노동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일한 자는 쉼이 필요하다.] 보다 건설적인 것들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 사이클이 육신의 건강에도 중요하다면 영적이 회복과 불편의 회복은 당연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입장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가르침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주셨는데[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것을 누려야 할 이스라엘은 오히려 자람을 죽이는 날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안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의 정신은 그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을 복되게 하시려고 주셨다.
Ⅲ.이런 불신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종은 은혜를 입는다.(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이 지체 장애자는 얼마나 서러웠을까? 자신의 불편도 억울한데 종교적으로 이용당하는 것 조차가 서러웠을 것이고 어쩌면 바리새인의 간계로 치료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고침을 받지 못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戰戰兢兢)했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 송사할 기회로 이용당할 가련한 영혼을 위해서도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손을 내밀라”신 주님의 말씀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밀었더니 회복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바른 자세를 다시 배우게 된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의 눈치나 환경을 의식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에 자신을 빌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송사하려는 바리새인들의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면 이 사람은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맛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어느 시대, 어떤 조건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비결이다.
Ⅳ.구속의 때가 차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본다.(14~21)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적이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어떤 일을 대치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통신교육원의 상담을 하다 보면 왜 복음서들에서 주님께서 질병을 고치시거나 기적과 신비한 경험을 한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8:4, 9:30, 16:20, 17:9) 하시는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구속의 사역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시행하셨던 주님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러 오셨지만 때가 차기 전에 있게 될 충돌을 피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에 자신의 삶을 맞추셨던 자세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기도나 하나님께 바라는 것들을 자신의 계획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보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것 하나도 아버지를 순종치 않으신 것이 없었다.
1.죄인들은 의인을 죽이려 혈안이 되었다.(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오늘에도 이런 현상들은 도처에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는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생을 갖지 못한 자들이 미워하고 살인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할머니를 흉내내다 당한 일] 미워 하는 것은 흉내도 내지 말아야 한다.
2.그러나 위기의 때에도 구원의 일을 쉬지 않으시는 주님을 본다.(15~16)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했지만 그들이 어리석다고 비웃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봤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주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능력의 주님은 못 고치는 질병이 없으셨고 아무리 쫓기고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주님을 찾는 자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셨다.
3.하나님은 이미 이런 모든 일련의 행동들은 예언으로 알게 하셨던 사실이었다.(17~21 - 사42:1~4)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8)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①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는 바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증거 하신다.(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순종하고 닮는다면 역시 기뻐 하심과 사랑을 동일하게 입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②주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앓으셨다.(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세상의 정치가들은 거리를 시끄럽게 자기 선전을 하기에 혈안이지만 우리 주님은 자신을 선전하지 않으셨고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대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f) 라는 성격과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의 불신하는 가족들조차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3~5) 라는 기록을 볼 수 있지만 주님은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요란하게 선전하지 않으셨다. 진리는 외치지 않아도 들리게 되어 있고, 소리 보다도 표현하는 삶이 더 호소력이 있다.
③주님은 연약한 자라고 버리지 않으신다.(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왕하18:21f) 특히 상한 마음으로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의미 한다. 아침저녁으로 흔들리는 연약한 우리임에도 주님은 잘라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꺼져가는 심지” 기름이 다 되어 힘없이 빛을 일어가는 호롱불을 보는 것 같다. 거기에는 다시 기름을 채우므로 다시 회복할 수 있다. 계속 성령을 소멸하여 꺼져가는 등불 같은 연약한 믿음을 끄지 않으시고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심으로 회복해 주시는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보다 많은 생산성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 인간 같으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④사랑을 입었어도 깨닫지 못하면 또 다른 사람이 사랑을 입을 수 밖에 없다.(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읽게 된다.
이스라엘의 거역과 불순종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왔다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 9~11장에서 자기 민족을 향하여 탄식하고 있다.
은혜를 주셔도, 주셔도 소멸해 버리는 우리 자신들,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간절히 바라고 사모해서 채워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성할 필요가 있다.
Conclusions : 간교한 인간의 죄성은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진리조차도 죽이는 도구로 악용하는 일들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게 된다. 중세의 교권을 수호하기 위한 재판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형을 집행했다. 안식일의 근본정신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주셨다.
불신의 사람들 틈일수록 순종은 빛나게 되어 있다. 한편 손 마른 사람처럼 비록 장애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순종은 반드시 은혜로 보답됨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어떤 연약한 자도 결코 버려짐을 허락치 않으신다. 다만 때를 하나님의 시기에 맞추기만 하면 언제나, 어떤 위기의 때에도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이미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약속을 기뻐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충만케 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선전하지 않으신 겸손도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덕목이다. 그러나 넘치는 사랑을 입었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러한 은혜를 사모 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길 수 있음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죽이는 도구로 잘 못 쓰지 않고 순종과 헌신으로 생명의 도구로 써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끼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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