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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에게 도전적이었다. 안식일문제로 붉어진 대적행위는 통렬한 비판을 받고 마는데 이제까지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만 잘 지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일상의 삶이 안식일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원인이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지난 주에 인용했던 Aiden Wilson Tozer(1897~1963)의 글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 “내 삶 속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주일에 참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월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주일예배는 결국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주일에 기쁨에 찬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한 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주일 예배는 의미가 없다.” [A. W. 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서울, 규장, 2004, p29~30] 이 이야기는 바울의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는 가르침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 속에서 일상을 지내며 구별된 삶으로 산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주일의 예배조차도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경고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 구약의 안식일 개념과 복음 속에서의 예배개념은 다르다는 얘기다.
주님께서는 지난 주에 주신 말씀 속에서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25)고 경고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속에서는 적극적인 순종과 참여가 되지 못하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집을 헤치고 무너뜨린다는 두려운 자세임을 경계하고 계심을 오늘 계속되는 말씀에서 읽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고 말씀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이 어둠의 역사 속에 행사되어 마귀 사탄이 쫓겨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는 영적인 원리도 말씀하셨는데 그런 입장에서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고 반항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나 확장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데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임을 오늘의 말씀에서는 지적하고 계신다.
Ⅰ.소극적인 태도는 반대자요, 헤치는 자이다.(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는 모임의 최소 단위도 말씀하셨지만 주님의 부음에 적극적인 순종의 참여가 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방해자로 역할 할 수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임에서도 우리는 ‘나 하나쯤 빠진다고 일이 안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자세가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반대하는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25:45)이라는 주님의 말세적 가르침은 역시 이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는 교훈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하신 말씀을 우리는 가볍게 지나치기 쉬운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 땅에 주님의 남은 고난을 함께 감당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바울사도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하는데,
왜 나는 때로 주님의 요청에 응하지 못할까?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의 과제에 있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어떤 일이 주님의 부르심 보다 우선되는가?]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거듭났다면 적어도 주님의 부르심에 후회가 없어야 하고[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어떤 일도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과 응답하는 것보다 더 우선 되는 것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못난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은혜주신 것에 후회가 없으시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부르심을 차후로 미룰 때가 더러 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절대로 우리 인생의 둘째 자리에 만족치 않으신다.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우리들)에게 “너의 가장 중요한 시간, 너의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를 내게 다오!” 라고 요구하신다. 또 그럴 자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앞에서 상고한바 있지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 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입장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라는 말씀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보다 가까이 다가오신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우리는 단순히 나 혼자 참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과 모으심에 함께 할 필요가 있다. 왜인가? “헤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쉽게 ‘나 하나쯤이야!’라고 자신을 달래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따로 떼어 놓는 생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그것은 “헤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과 함께하고 모이는데 적극적이므로 반대자나 헤치는 자로 남지 않기를 …
Ⅱ.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사죄가 불가능하다.(31~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참으로 두려운 음성이다. 사죄의 감격은 얼마나 크고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하였고 바울은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7~8) 그런데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영원히…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성령을 훼방하는 것, 말로 성령을 거역 하”는 것이란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이해는 조금 뒤로 미루고 은혜의 사실부터 나누어 보자!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사람을 죽인 죄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간음한 죄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강도질을 한 죄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죄를 짖는다면 그것은 경우가 다르다. 그래서 바울을 쐬기를 박는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거역하고 깨닫지 못하다가 복음을 듣고 회개한다면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 심지어 말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도 용서함을 받는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이것은 마치 주님의 재림의 날을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신 주님의 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사죄 될 수 없는 죄가 있다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그것만은 금해야 하겠는데 그것이 뭔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지적하신다. 우리는 늘 ‘이것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를 자주 논한다. 정말 구원 얻지 못할 죄가 바로 여기 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성경 학자들조차 조심스럽게 다루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을 훼방(blasphemy)하는 것,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 하는 것이 순서이다. [blasfhmiva, blasphemia; 중상(특히 하나님께 대항하여), 모독, 악담, 조롱, 비난]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계13:6)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바리새인들 조차도 참람 하다고 지적한바 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5:20~21)고 공격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으로 참람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는 행위 자체가 성령을 훼방하는 참람된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안다고 하는 저들이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대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귀신의 죄악 된 행위로 욕되게 모독하는 자세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요 말이었던 것이다.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성령께서 안에서 감동을 주심으로 복음은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의 심성을 말씀과 성령의 감화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데도 거역하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다.
여러분 모두는 성령의 감동과 은혜를 인하여 감격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과 독생자의 십자가의 희생에 합당한 순종과 믿음으로 영광을 돌리는 …
Ⅲ.사람들의 선하고 악함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33~35)
(33)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것은 꼭 신령한 눈이 있어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이미 앞의7:16~18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내용의 확인이시다.
사람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질 때가 있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진실을 가리게 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주님은 거기에 대한 진실한 반응을 바리새인들에게 촉구하고 계신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주님께서 행하시는 아름다운 일들이 좋은 나무이심을 증거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때로는 그들 중에서도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막10:17; 눅18:18)이라고 말하면서도 행하시는 선한 구원의 역사를 마귀의 왕을 힘입어 행한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다는 가르침이시다. ‘말이나 평가부터라도 바르게 하라!’시는 가르침이시다.
나무가 그 열매로 판명되는 것처럼, 행하시는 선한 행동들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모욕하고 훼방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일반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옳지 않음을 지적하시지만 완악한 저들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34f) 독을 가득 품은 독사가 사람을 물어서 그 독을 집어넣어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독설이 저들의 입에 계속 쏟아져 나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뱀의 자식들, 그것도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설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4b~35) 주님의 이 말씀은 대단히 두려운 말씀으로 들린다. 모든 사람의 언어 생활은 속에 가진 것의 표현이라는 말씀이고, 특히 마음에 가득 담고 있는 것들이 넘쳐 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씀은 언어생활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들어 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 일면에서 볼 때 이것은 진리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자신을 숨기려 해도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갔을 때는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월을 지내면서 무엇을 쌓아 왔는가’ 가 언어생활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가르침이다. 천국을 쌓아 온 자는 천상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나타낼 것이고 아무리 수년을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할지라도 악을 쌓아 온 자들이라면 바리새인들처럼 독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므로 어떤 극단적인 상황일수록 천국의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 …
Ⅳ.나의 한 말은 반드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36~37)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 말씀에서 생각하는 것은 더욱 긴장되게 하는 말씀이다. 현실의 언어생활이 심판 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부분에까지는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에 때로 말을 함부로 하고 형제에게 자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 없이 비수 같은 말을 내뱉기 쉬운데 대단히 두려운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다윗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언어생활에 있어서는 대단히 독선적인 경우가 많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만을 생각하고 공중 앞에서든지 은밀한 곳에서든지 말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것들은 신앙의 연륜에 관계없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은 그러한 자세에 무서운 경계를 주고 계시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나중에 내가 한 말을 하나님 앞에서 정리할 때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세상적인 악의를 가득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정죄를 받으리라는 두려운 음성을 듣는 것이다.
대개 우리가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면 언어 생활에 있어서 몇 가지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다. ①하나님께 유익한 것인가? ②교회에 유익한 것인가? ③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인가? ④상대에게 유익한 것인가? ⑤나에게 유익한 것인가? 이런 판단으로 언어생활을 한다면 심판 때에 정죄 받을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죄성의 자신을 의지하는 것 보다 희생의 십자가을 묵상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는 삶이라면 늘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과 말씀과 친밀한 살이 되어서 심판의 때에도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저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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