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12:38~45 2005-03-28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언제나 과거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데서 가치가 있다. 이스라엘의 과거를 계속 증거하든 바울 사도께서도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고 가르친 바 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나 이때나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 하고 보기를 원하면서도 진리는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도 읽게 된다.

또 기적이 구원과 진리의 기준이라면 이 시대는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도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 시대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을 본다. 이 시대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완성된 구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사실은 하나님 앞에 기적의 시대보다도 핑계치 못할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나타난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확증 되었다면[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지금은 기록된 진리로 변명치 못하고 바꾸지 못할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각자가 편하게 알아듣고 읽을 수 있는 성경과 또 원하기만 하면 말씀을 풀어 증거 하는 교훈들이 봇물처럼 넘쳐 나고 있는 복된 시대이다.

오히려 성령과 함께 기록된 진리를 통해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도록 진리의 기준을 각자가 가졌다고 하는 데서 우리는 더 큰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기적은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가족이 된 사실 보다 큰 것은 없다. 기적을 남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것 보다는 자신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삶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음의 자녀들에게 이왕에 허락하신 은혜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의 매일매일이 되시기를 …



Ⅰ.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보일 표적.(38~40)

(38)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몰아 내려고 온 갓 궁리를 다하면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간악한 종교 지도자들, 자신들이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가 자연스럽게 예수께로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간교하게 온 갓 구실을 다 붙이는 종교 지도자들 … 어쩌면 그들은 오늘 나(우리)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님께 충성은 못하면서 모든 일이 기적적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느 시대 사람들이나 기적을 좋아 한다. 로또 복권을 사서 한 순간에 팔자를 바꿔 보겠다는 것도 다 이 기적을 바라는 심리이다. 그런 형태의 유행이 요즘 인기있는 마술이라는 것과도 무관 하지 않다. 진짜로는 기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눈을 속여서라도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을 즐기는 것 때문에 지하철의 모니터에도 마술을 가르치고 인터넷 사이트에서나 Auction에서 조차 마술 소도구가 불티나듯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맞선을 보는 데까지도 상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마술 한 두개를 배워서 응용한다는 것도 그만큼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충족 시켜 주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심지어는 마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일들도 공공연하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해지는 것은 복음인데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으로 어떻겠는가!” 하겠지만 거짓을 도구로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일을 권장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자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19:19) 복음시대에 성경에서 패해진 일들이 되살아 나고 있는 감이 든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상대적인 세상적인 진리로는 결코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바울이 복음을 위해 사역할 때 이미 헬라의 철학들은 집대성되어 있었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하다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대단이 흥왕하던 시대가 바로 헬라의 철학이 꽃피던 당시였었다.

나중에 르네상스 운동이 바로 이 그리스 철학시대로 되돌아 가자는 운동이었던 것을 봐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식하다고 하는 베드로는 제외 하고 라도 당시의 일반적 논리인 헬라의 철학을 섭렵한 바울이나 누가가 그 많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한마디의 철학적 비유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오히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마음에 둔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라고 경계하는 것을 듣는다.

오늘의 신앙의 교훈도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면 성령과 듣는 각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기적의 요청에 주님은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39) 표적을 구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경계와 함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삼일간의 장례가 이 악한 세대에게 보여주실 표적이라고 선언하신다.

사실 이것이 표적인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 지냄과 부활, 이보다 더 분명하고 귀한 표적은 이 인류에 없었다. 이 죽음의 역사가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명망의 증거이고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빌1:28)

연이어서 주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0)고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기적은 일찍이 이스라엘이 알았던 기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3일간 무덤 속에 계셨던 사실은 분명한 기적이지만 복음을 듣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듣고 아는 사실이라는 데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 라는 경계처럼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일부러 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하고 있으면 찜찜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바울이 역시 자기 민족을 향하여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만 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3일만에 무덤을 박차고 나오셔서 영원히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주만 기념해야 할 행사가 아니라 매주, 매일 기뻐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 지냄, 그리고 3일만의 부활의 기적으로 우리가 오늘 구원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이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에 감격의 삶을 사시는 …



Ⅱ.요나와 솔로몬을 보내신 자.(41~42)

(41)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미 주님께서는 앞에서 회개치 않는 동내들을 향하여 안타깝게 한탄 하시기를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고 선언하신바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표현은 “심판 때에” 이다. 이 두 사람의 비유가 다 악하고 음란한 불신의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는 비유의 말씀이다. 요나는 사실 충성 된 하나님의 종은 못되었다.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물고기뱃속에서 죽음 같은 삼일간의 경험을 하고 하나님께 붙잡혀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3: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빈부귀천(貧富貴賤)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 그 소문이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지도 말고 마시지 말며,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굵은 베를 입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게 된다.”(욘3:5~8)

니느웨는 당시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고 요나의 외침은 바로 복음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완성되지 않은 복음에다 그것도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메시지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람들은 철저한 회개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세를 긍휼히 여기셔서 내리시려던 형벌을 취소하셨다. 그런데 그 요나를 보내셨던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는데도 당시의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가장 가까이 한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이나 보여 달라고 하는 모습이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안타깝기 그지 없으셨던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2) 이 말씀역시 열왕기상10장과 역대하 9장에 기록되고 있는 스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당시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여왕임에도 불구하고 먼 행로를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들으러 왔었다면 그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 되게 하시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지혜를 증거 하시러 오히려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저들의 마지막은 수치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두려워 해야 할 심판의 선언이시다. 이제는 그때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오늘의 시대에 복음을 외면 한다면 심판 때 더 큰 형벌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듣고 돌이켜 영혼의 유쾌하게 되는 복(행3:19)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



Ⅲ.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3~45)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아주 독특한 비유를 사용 하심으로써 자신을 대적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경고하신다.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부분임에 분명하지만 이것은 당연히 주님을 배척하고 있는 당시 표적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더러운 귀신의 특징은 복음서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은 귀신에 대한 논리보다는 ‘악한 세대’에 중심이 있다.

더러운 귀신은 언제나 죄로 만신창이가 된 인간의 마음을 자신의 집으로 삶고[여기서 더러운 귀신이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44m)는 표현을 읽는다.] 그러한 사람을 도구로 살아가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8:28~32에서 무덤사이에 거쳐 하면서 사납게 광야를 내리 달리고 소리지르며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본바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또 아직도 귀신의 수하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사실 주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언제나 어둠의 세력들 뿐이다. 또 사람은 원하든 원치 않든 두 가지 중 그것이 어두움의 영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이든지 간에 하나의 세력을 힘입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본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도록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세력에 팔린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연히 치러야 할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고 그것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 저주스럽고 음침한 어두움의 새력에서 자신의 피로 사주셨다.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다시 들어 갈 수 없어서 자신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와 다시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게 됨으로 나중의 형편이 더 비참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내용들은 번역한 단어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수리되다, kosmevw, kosmeo정확한 순서대로 놓다, 꾸미다, 치장하다, 장식하다] 라는 의미는 살펴보는 것처럼 꾸미고 치장한다는 의미가 더 강한 말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팽개치고 인간적인 계명으로 꾸미고 치장하여 하나님께 갈 영광을 사람끼리 나눠 갖는 저들의 삶이 결국 가장 악한 상태가 되어서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배척하게 된 것에 대한 주님의 비유적 책망이다.

결국 인간의 도덕이나 노력으로 마음을 깨끗이 유지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 한 언제나 더러운 귀신이 넘나들 수 있다는 경계를 갖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 하다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가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법이 밀려나고 또다시 인간의 계명으로 치장되고 꾸며진 바리새 주의는 4백년의 암흑기를 거쳐서 오신 메시아를 대적하는데 까지 갔으니 나중 형편이 더 못하게 된 것이 분명하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책망하고 계신다. 우리가 더러운 귀신의 처소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하며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것뿐이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더러운 귀신이 들락거리며 인생을 도둑질 당하는 저주 받은 운명이 되든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인 십자가의 은혜로 성령을 모시고 빛과 진리와 사귀며 영원히 영광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건국에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까지 표적의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표적을 요구하고 주님께 책망을 받는다. 온 인류에게 선포된 최고의 표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고 믿고 순종하는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매일매일 각자의 삶 속에서 늘 새롭게 변화된 상태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된 부활과 같은 놀라운 표적의 역사를 매일의 새로운 역사로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우리 인간의 마음은 비워둘 수 없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이 들락거리는 귀신의 처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세례를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신령한 성령의 교제를 경험하는 이 말씀을 듣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