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14:13~21 2005-05-22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 중 드물게 사복음서(四福音書)에 다 기록되고 있는 유명한 기적의 사건이다.[막6:30~44; 눅9:10~17; 요6:1~14] 예수 그리스도의 베푸신 기적들은 사실 그 기적 자체보다도 그 표적이 의미하는 영적인 의미가 더 깊은 것이 사실이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먹고 12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거둬졌다. 와!’ 하는 것 보다도 이 사건이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히 제한 될 수 없다. 사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40년 동안을 끝임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늘의 떡인 만나를 먹이셨고 이것을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고 일깨워 주고 계신다.

이 만나에서 끝나지 않고 구약의 마당에서도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같은 이적을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나타내 주셨는데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왕하4:42~44)는 엘리사 선지자의 이적을 볼 수 있지만 오늘 주님의 역사와는 비교 될 수 없는 것이었고 왕상17:8~16의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폭정 때문에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들었을 때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진 엘리야는 그 과부모자(寡婦母子)와 이 흉년이 끝날 때까지 기적의 가루와 기름으로 살았던 이야기를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눅4:26) 역시 빚에 자식을 종으로 빼앗길 뻔한 위기에 처한 죽은 선지자의 생도 아내에게 기름으로 베푸신 엘리사를 통한 이적(왕하4:1~7)도 이 놀라운 역사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그의 공생애(公生涯) 기간 중에 헤아릴 수 없는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부스러기 일 뿐이고 더 귀중한 핵심은 절망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대속을 위한 삶 자체이다.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친히 종의 몸을 입어 인간이 되시고 가장 인생의 귀중한 정점에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하나님의 고통을 바라 보면서 죄의 심각성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을 이해 못한다면 이 표적도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요한 사도의 권면을 들어야만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오늘도 주님께서 이 은혜와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의 허락하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

오늘은 사건의 진행보다는 이 이적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자세와 거기에 보조하는 제자들의 작은 믿음, 그리고 주님을 찾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을 이해하면서 구원의 역사를 나누기를 원한다.



Ⅰ.삶의 무게에 고민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이시다.(13~14)

(13)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오늘의 말씀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13) 라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죽음과 거기에 따르는 자신의 사역의 어려움을 아버지와 의논하시기 위해 오히려 군중을 피하여 광야를 찾으시는 주님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본다.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 그것도 순교의 사실을 전해 들으시면서 장차 정하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죽긴 하시겠지만 어떻게 아버지의 정하신 때에 맞추실까 의논하고 의뢰하려는 주님, 그러나 군중들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군중들이 여러 고을로부터 좇아와서 인간적으로 본다면 주님을 그냥 내버려 주지 않는 모습이다.

같은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6:34의 기록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자신의 마음이나 형편은 언제나 뒷전에 두시고 죄로 고민하고 고통 하는 인생을 더 불쌍히 보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 긍휼과 사랑에 꼼짝 못하고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처지와 입장으로 이 사람들을 대한다면 짜증내고 귀찮아 하실만도 한데 우리 주님은 그들을 더 앞서 생각하시는 모습을 여기서도 본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모습에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순종의 사람이 부르면 “그래 내가 여기 있다!”고 응답하실 하나님이라고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하신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58:9~10) 분명히 이 약속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바른 금식]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주님을 찾는 자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뵙는다. “…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4)

진리를 찾아 갈급 해 하는 자들을 그대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은 바로 그를 전심으로 찾는 자들의 것이다.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대하15:4) 외로울 때든, 아플 때에든지, 서글픈 때이든지, 억울할 때에든지, 가난할 때에든지 굶주릴 때에든지, 전심으로 주님을 찾으면 절대로 외면치 않는 주님이시다.



Ⅱ.어디서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본다.(15~16)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빈들이요 광야 이곳은 굶주림의 장소요 기진 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며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인간들의 고난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이러한 제자들의 보고는 사실 합리적이고 진실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자들의 판단에는 주님이 빠져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런 곳도 주님께서 계시면 부족함이 없는 감사와 기쁨의 낙원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수많은 시도를 해보지만 무엇인가 시도해 보려고 하면 이내 저물어 버리는 것을 느끼는 것이 인생들이다. 우리는 아버지 집을 나간 탕자에게서 이것을 본다.

그런 인생들임에도 주님은 이 빈들과 같은 인생을 포기 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같은 유의 이적을 또 보겠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이래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여기서 제자들의 생각과 주님의 뜻이 차이가 난다.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 것이 분명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님을 먹이는 문제에라도 신경 쓰시게 하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에서 사실 주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셨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러한 당부는 이미 주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분명히 줄 것이 없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 이것도 병행 구절인 요한복음6:9에 보면 사실 제자들의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이렇게 말씀 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6)고 주님의 심중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도 없는 나에게 무엇을 “주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아 차려야 한다. 그것은 나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것을 주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디에서나 주님은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이시다. 우리의 주인 이시라면 우리의 필요를 책임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 같은 고백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2, 4)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6) 할렐루야!



Ⅲ.어떤 부족한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여지면 풍성해지는 은혜를 경험 한다.(17~21)

(17)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제자들의 안타까운 보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라고 많은 무리와 음식의 양을 비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분이시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판단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바로 명령하신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주님께서 가져오라거나 달라시는 것은 언제나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께 기도를 하실 때도 마찬가지셨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2)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의 손에서 하잘 것 없는 식사를 받아 드시고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행동을 명하신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 (19f) 주님 자신에게나 겨우 식사가 될까말까 한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고서는 만찬 식탁을 대할 때처럼 무리를 앉히고 계시니 제자들도 의아해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먹을 식사가 충분히 준비가 안되었는데요?”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은 주님의 자세가 너무나 진지하고 확신에 찬 거룩함을 나타내셔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주님께서는 언제나 처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자 그 떡과 물고기는 바로 직전의 적은 양의 음식이 아니었다. 본문의 표현대로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그 중에 누구도 ‘조금만 더 먹었으면!’라는 아쉬운 사람이 없었다. 다 배불리 먹었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감격의 고백이 되는 사랑의 역사다.

그리고 그 다음 행동이 더 감동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요6:12) 얕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적의 떡을 만들면 그 사람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도 그냥 버려둘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신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사실 기적 못지 않게 감동되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그리고 이 은혜에 참여한 사람의 수를 기록하기를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21) 성경이 정확한 수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배를 채운 사람의 수는 액면 그대로 라도 하나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숫자이다.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도 떡을 만드실 수도 있고 산꼭대기에서도 생선을 마련하실 수 있는 분 이심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은혜의 역사에도 사람을 참여 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썩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실 때도 “돌을 옮겨 놓으라!”고 사람들의 동참을 기뻐 하셨던 것처럼 이 은혜의 역사에도 욕심 없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희생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 주님의 방법은 오늘도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빈손으로도 5천명을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오늘도 겸손한 사람, 순종의 사람, 헌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 구원을 이루신다. 그 이적의 역사에 오늘 나 자신이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시다.

나의 초라하지만 최대의 것이 주님의 요청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시는 명령에 순종한다면 엄청난 사람들이 기적을 맛볼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선 듯 주님께 드리기를 망설이는 모습들이 많다. 여러분의 어떤 것이 되었던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순종하여 오늘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



Ⅳ.주님은 모든 인류의 진정한 양식이시다.

이 어려움의 시대 역사의 황혼의 시대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늑대같이 할 수만 있으면 노숙자들까지도 수탈하려고 간교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절망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 일들이 너무나 흔한 광야 같은 세상의 역사의 저녁과 같은 시대이다.

주님은 범죄 하여 짐승이 된 인류에게 먹히기 위해서 짐승의 구유에 탄생하신 분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말씀하셨고,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8) 약속하셨다.

이사야를 통해서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사55:1~3) 고 초청하신다.

이 표적에 연이어 우리 범죄한 인류가 진정으로 먹어야 할 양식을 제시 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6:48~50) 하셨고 다시 연이어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6:53~57)

유월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주님의 명령을 좇아 잠잠히 유월절 양의 고기를 먹은 자들은 죽음이 지나 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먹어야 한다.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출12:9) 주님의 머리와 마음을 먹어야 한다. 주님의 정강이의 움직임 즉, 그리스도의 삶을 먹어야 한다. 주님의 내장을 먹어야 한다. 다른 아무것도 섞지 말고 먹어야 한다.

우리는 매주님의 날마다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이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제가 살아 나가는 힘은 세상의 식물이 아니라 주님을 먹고 삽니다!” 라고 한 주를 시작하면서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완전한 영광에 들어 갈 때까지 이것을 지속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