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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6:21~28 2005-07-17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  
아직도 육신의 기준에서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던 제자들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오신 진정한 목적을 말씀하신다. “이 때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일을 위해서 오셨고 다른 일들은 사실 부수적인 역사들이다. 수많은 질병의 치료와 기사와 이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 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적임자이심을 보여주신 것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은 이 때까지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으시고 자신들이 요직을 맡을 것이라는 조금은 세상적 영광의 기대였던 것이다. 다시 변화산의 영광의 사건 후에 다시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23)는 반응을 봐도 이것이 분명하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초보에 머문다면 이러한 제자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사실 우리 대한 민국의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 쉽지 않은 모습이고 그것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계속 유치한 상태에 머물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신앙을 안타까워 하여 이르기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신앙이 자라야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고 믿음으로 오는 고통 즉 ‘단단한 식물’을 소화하고 영원의 약속을 기약하면서 오늘의 손해조차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Ⅰ.예수께서는 이 땅에 죽으러 오신 분이다.(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사실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다 치루고 먼 시간을 되돌아 보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였음을 알지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죄에 신음하고 절망하며 계속 죽음에 바쳐지는 인류의 비극을 마무리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일을 계획하시고 예정된 시간에 따라 이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를 진행하셨고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은 여기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바로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기 전에 이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고백하시고 응답 받으신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12:27~28)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복권장사는 그만 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운 때에 복음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먹고 사는 문제가 옛날 만큼은 심각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과 만나게 해 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나의 영원한 저주와 슬픔을 감당하시려고 주께서 피 흘리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가 계시다가 죄와 상관 없이 두 번째 재림하시리라는 복음을 만나게 해 줘야 한다.

당장은 아무 반응이 없다고 할지라도 각 사람의 영혼 속에 뿌려지는 참된 복음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싹이 나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생명을 나눠줄 필요가 있다. 왜 인가? 주님은 이를 위해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질병이 치료된다”는 말로만 전한다면 그 사람들의 극단적인 절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는 이사야의 복음은 오늘 여전히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이다. 이 외에 진정한 복음은 없다.

이땅에서 복 받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없어지고 마는 福만을 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베드로도 바울도 그리고 오늘 우리도 미련하게 보이는 구속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만이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야 말로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온 인류가 구원 받을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1~24) 주님의 희생이 우리 자신들에게 유효하고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도록 사탕 발림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의 십자가의 복음을 감당하는 …



Ⅱ.그러므로 이일을 거역하고 방해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다.(22~2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믿음을 바르게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셨지만 거기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기대치 않은 것이었고, 물론 주님께서는 이 대답조차도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다.”[공동] 이것이 인류를 살리는 길인데도 자신들의 유익을 계산하는 얄팍한 생각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 유익인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인가를 계산해 보고 쉽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막고 나서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자주 발견하곤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해야 하겠다 하실 때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얼마나 자주 거역했는가! 바로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셨던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무서운 책망을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한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도 될 수 있고 사탄의 도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님을 여기서 배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역으로 이해하면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음을 본다.

①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사단의 생각이라는 것과 ②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또는 백성)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어렵지 않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을 더 생각하고 행하려고 할 때 우리도 주님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직접 마귀에게 했던 사실을 앞에서 공부한 바 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는 마귀의 유혹에 “…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우리는 천하 만국의 영광을 꿈꾸며 쉽게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그만두라는 사단의 달콤한 속삭임에 유혹될 때가 많다. 이제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주님처럼 담대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우리의 작은 유익보다는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고 행함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살 수 있기를 …



Ⅲ.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제시하신다.(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것은 앞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을 바로 이해하고 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삶의 자세이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①자기 자신이 부인되어야 한다. 즉 자신이 죽고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앞 자리에 서려고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②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제 몫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그것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자세다.

③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한다.

④자신을 죽이는 것에 성공하면 살고 나 자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를 꺾어 버리면 영원히 죽는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⑤세상 전체를 다 얻어도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진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다 잃은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6)



Ⅳ.이러한 약속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약속은 아직도 미래적이다.(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에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면서, 참 생명을 얻고 잃을 때를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이 약속은 분명히 현실 속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약속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을 힘입어 누리는 약속은 이 세상에서 편하다가 끝나버리는 그건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들이요, 영원을 기약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멀리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멀리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경계해주고 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1:9) 그런대도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나 급하다. 이 땅에서 영광을 다 누리고 북새통을 치고 끝내려 한다.

여기서 중요한 약속 하나가 눈에 들어 오는데 그것은 “…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27b)는 약속이다. 믿음대로가 아니라 그 가진 믿음대로 행한 자들의 상급을 약속하시고 계시다.

여기 마지막 절의 말씀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 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분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다음 장에 연이어 오는 변화 산의 영광을 입은 세 제자들의 경험을 말씀하시는데 이의가 없다. 마가복음에서도 같은 약속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9:1)

예수께서는 자신과 그의 사람들이 입게 될 미래의 영광을 그의 귀중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친히 보게 하셨고 베드로는 나중에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면서 자신의 서신 속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사역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다. 이 은혜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의 계획이요 작정이셨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우리가 전할 소식은 십자가에 나와 너를 위해 달리신 예수 부활의 예수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세상적인 것들보다는 영원을 위한 생명의 약속을 전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는 이 중차대한 일을 하려하시는 주님께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가로막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생각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도 같은 생각과 행동을 우리들이 하게 될 때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다른 삶의 자세가 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앞 자리에 서려고 하는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없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죽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나 자신이 없는 천국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사주신 영원한 생명을 잃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그날 세상의 임금들과 영광을 가진 자들은 땅을 치고 세상의 영광과 존귀는 빛을 잃겠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자들의 영원한 영광의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