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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상고하게 되는 말씀은 지난 주의 말씀의 약속에 따른 말씀으로 연결되어지고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그리고 오늘 연이어지는 말씀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1) 라고 기록되고 있고,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도 막9:1이나 눅9:27에 공히 같은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든지 하신 약속을 어기시거나 잊어버리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 내용이 비몽사몽 간에 있었던 것으로도, 환상으로도, 꿈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은 분명히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고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9:32) 라는 기록을 봐도 역시 사실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복음서 간의 날자에 대한 차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본문과 마가는 “엿새 후에” 라 했고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9:28) 했는데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항상 중요한 역사에 데리고 다니셨던 사실들을 복음서의 몇몇 군데서 볼 수가 있는데 야이로 회장장의 딸을 살릴 때에도 그랬고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러하셨다.
그러나 이 세 제자는 오늘 본문에서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영광을 보면서도 조금은 이기적이었고 죽음을 앞둔 기도 앞에서는 깨어 있어 기도해 달라는 주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잠자고 있었던 모습들을 볼 때는 그렇다.
오늘 내용에서는 주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셨던 산의 이름이 없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9:27~28) 라고 왜 산에 올라 가셨는가를 전해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산에 올라가 기도 하시는 일이 많았고 어떤 때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우리들은 친히 위엄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한 제자들의 자세 속에서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배우고, 주님과 더불어 임마누엘을 삶으로 매일 매일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이 역사의 말미에 그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에 참여 시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
Ⅰ.주님의 본연의 모습과 여기에 반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다.(2~4)
1.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주님의 영광.
주님의 왕권의 권능과 영광을 약속대로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인지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제자 요한은 끝까지 이 경험을 침묵하고 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2~3)
예수 그리스도의 본연의 모습이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는 우리 하늘의 백성들이 변화 받을 모습이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말씀을 순종하고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의 장래에 입을 영광의 모습이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뵙는 주님을 묘사하기를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4~16)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이 같은 사건의 내용을 공관복음의 기자들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면서 전체 내용을 더 밝히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확신하게 되는데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는 이 마태의 기록과 함께 마가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9:3) 했고 누가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고 묘사하고 있다.
주님의 입으신 영광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완벽하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어서 바울조차도 조심하는 것을 본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그러므로 신령한 것에 대한 체험은 그것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으로 경계 되어야 한다. 자랑하고 떠벌리는 자세는 벌써 주님의 영광을 경험한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이러한 위엄과 영광을 경험한 자들은 주님을 경외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마태는 3절의 내용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자들과의 만남을 누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눅9:30~31)
사실 율법 속의 그 수많은 제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을 부분적으로 보여 준 것이고 선지자들의 예언도 모두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실 것에 대한 예언이었다면 이 세 사람의 만남과 대화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다루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2.그러나 영광을 보면서도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본다.(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어쩌면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죄스럽다. 우리는 어디든지 좋으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누리기를 욕심 내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게 해달라고 베드로처럼 조를 수 있다. 이상한 나무 한그루 돌 하나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데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보다 많은 사람과 더불어 나누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영광을 보게 하신 주님의 거룩한 뜻일 것인데도, 우리는 베드로 처럼 욕심부려 이르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욕심 내는 나 자신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베드로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이 나의 구원과 사랑과 영광과 위엄을 보고 알기를 원한다!” 하시는데 나는 ‘아닙니다. 여기 우리들만 이 좋은 것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욕심을 부리게 되는 예를 많이 본다.
이사야의 위대성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사죄의 은혜를 받은 다음 자신이 이제 그 영광의 주님을 위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또 다른 죄성의 하나는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물론 마가와 누가는 ‘우리’로 쓰고 있지만) 한 것인데 좋게 봐 준다면 헌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영광을 머무르게 하는 일을 내가 했다라고 하는 영적 교만의 다른 면을 본다. “아 그 일을 내가 했지!” 하나님의 은혜나 동료들의 함께 하는 수고 보다도 나 자신의 공적을 나타내려고 하는 자세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성령의 사람의 위대성은, 또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자세는 모든 한 일들은 ‘내가 아니요 주님이시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내가 할 수 있다.’거나 ‘내가 했다.’는 자세를 버리고 주님께, 다른 형제에게 공로를 돌림으로 이 영광스러운 약속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
Ⅱ.영광보다도 중요한 하나님 아버지의 당부를 듣는다.(5~8)
1.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당부의 말씀을 주신다.(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오늘 제목으로 잡은 중요한 말씀인데 역시 본문의 중요성은 이 하나님의 음성에 있다. 세 제자들은 자신들이 받들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에 두려워 떨고 있는데 구름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신 내용에 또 한번 흠 짓 놀랬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결정적인 영광에 취해 있는 이 세 제자들에게 이러한 당부를 주실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적 도전이라고 확신한다. 그것도 구약의 중심 인물인 두 사람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신 명령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다.
①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상이요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한 독생자이다. 이 사실은 이미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도 하늘이 열리면서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 인간의 입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라는 고백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 입장에서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그를 증거 할 사도들에게 확신 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②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 구약성경 전체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다른 모든 계명이나 선지자를 통한 말씀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라! 왜 일까요 그 모든 예언의 책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므로 이제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③너희가 오늘 보고 놀라고 감격하고 두려워 하고 있는 이 환상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라! 환상은 시간이 가면서 가물 거릴 수도 있고 부풀려 질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기록된 성경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 하셨기 때문이다.
④세상의 어떤 유명하다는 성인군자나 속담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들어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⑤성경과 비슷한 예언들과 그 밖의 어떤 선지자의 말보다도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래야 구원이 확실히 보장 된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면이다. 믿습니까?
2.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자들의 경외감을 본다.(6~8)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모세가 시내산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봤던 형상이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의 위엄이지만, 이를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바로 구약의 대 선지자 이사야 일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주님의 영광을 바로 뵌 사람이면 두려워 떨 수 밖에 없고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본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막9:6) “…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9:33b) 그리고 그러한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야 말로 비로소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확신과 사명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敬畏-fobevw, phobeo - 경악하다’두려워하다’ 대단히 무서워하다)한다는 말은 바로 두려워 한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 진노가 바로 주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십자가 위에 쏟으신 공의의 분노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만났다면 절대로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영광을 확실히 대면함으로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두려워 할 대로 경외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사시기를 …
Ⅲ.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증거하신다.(9~13)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여기에 포함되고 있는 세례 요한에 관한 부분들은 앞에서 이미 다루었고 제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서로 이해가 되고 있는 부분이므로 약하도록 하겠지만, 왜 이 영광의 사실 뒤에도 주님은 또 다시 죽음을 말씀하실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그 희생이 없이는 아무에게도 이 세 제자들이 본 영광을 입혀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씀 드렸듯이 이 영광의 모습 속에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의논한 것조차도 바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과 부활을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왜 이러한 영광을 입으시는 주님께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죽음을 말씀하실까?’를 고민하면서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막9:10) 이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예수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고난을 거치지 않는다면 영광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그러므로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좁은 문이라는 의미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우리가 장차 입을 영광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라고 증거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그리고 장차 성도들이 입을 영광도 세상에서는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그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세 제자처럼 영광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 경험해 지는 영광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게서 말씀하시고 기록해 주신 성경을 들고 순종하는 것이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보장이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에 같은 영광을 가져온다는 확신을 갖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신앙으로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잘 감당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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