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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죄를 범한다고 해도 바로 버려짐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 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직접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마9:13; 눅5: 31~32)
그러므로 만약에 사람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존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하지 못한 이 세상 속에서 사람에게 온전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 연이어 용서에 관한 부분을 나누게 되겠지만 사랑의 사도인 요한을 통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범죄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을 주님은 말씀해 주고 계신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는 교훈은 분명히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아직도 이 지상 속에 있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범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하는 데 그것은 사실이다. 이웃에 대한 배려는 율법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형제의 관계에서 그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가르치시고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가 된다. 세상의 관계가 아니라 하늘의 관계 속에서 범죄를 다루는 것은 분명히 세상의 일반적인 법으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도 주님은 특별한 방법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Ⅰ.세상과는 전혀 다른 해결책이다.(15~17)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주님께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범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신다.
주님께서 인류의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보혈의 은혜아래 우리를 부르시고 사죄의 은총을 주셨는데도 역시 ‘땅에서’ 라는 한계를 여전히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거듭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범죄 할 수 있는가? 본문은 이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이 세상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본다. 죄가 관영 하는 세상 속에서는 작은 범죄를 가지고도 한 사람을 완전히 수렁 속으로 밀어넣어 버리려는 간교한 마귀 사탄의 간계(奸計)로 용서를 위한 토대가 아니라 지옥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늘 강하기 때문에 ‘사죄와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혜 자체가 이해되어지지 않고 적은 범죄에도 의와 인간 됨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해 버리거나 아니면 범죄에 익숙해져서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풍토가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는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게 ‘없다’ 라고 증거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되지 못할 죄를 상대적으로 구분하고 처벌하는 것이 일반적인 국가나 사회 규범의 법리(法理)이다. 특히 국가나 사회 질서를 세워가기 위해서 특정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을 사법부의 일원으로[사실 이런 논리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데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죄에 대한 판결을 하여 혹은 형(刑)을 살게 하거나 혹은 석방하고 심지어 사형을 시키기까지 하지만 온전치 못한 같은 죄를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있고 어떤 경우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는 일들이 있기도 하고 ‘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안타까운 속설이 나오기도 한다.
1.범죄 당사자와 상대하라.(15)
이것은 진실한 관계에 있을 때 죄에 대한 진실과 거짓을 가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구약에 다윗의 범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그러했다. 나단 선지자 한 사람이 찾아가서 범죄의 사실을 일깨워 주고, 또 다윗도 자신의 위치나 권위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한 인간으로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삼하12:13 f) 자복하자 하나님께서도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13b~14)한 것은 다윗의 지위만큼 하나님께도 손해가 될 것임을 일러 주신다.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라는 단서는 그 범죄 한 본인의 하나님을 의식함과 함께 진실을 잃지 않았을 때 돌아온 탕자와 같이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얼마나 기쁜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회복하지 못하고 형제를 잃는 것은 흔히 주님께서 일러주신 순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당사자가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증인을 채택하라.(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벌써 진실에서 조금은 빗나가 있는 모습이다. 한 사람이 찾아가서 일깨워 주는 것으로 회개한다면 이미 그 형제를 얻은 것이라 했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사람에게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주라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여기 “증참케 하라”[헬,히스테미(histemi) 고정하다, 멈추게 하다, 서다(눅 7:38)] 범죄의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 주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에서는 “확증하게 하라”
3.신앙의 형제로서의 관계를 정리하라.(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에서 두 번째로 교회란 말이 쓰이고 있다. 교회의 권위는 주께서 이미 앞에서 하늘을 여닫는 놀라운 권능을 주셨다.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경건성을 잃지 않은 것이 전제이겠지만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교회에서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절망적이다. 그러나 또 다시 강조하거니와 주님의 피의 흔적을 지키는 경건한 교회에게만 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형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는가를 자신 속에 신중히 물어야 한다. 바울은 여기에 더하여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3:14~15)고 조심스럽게 권한다.
조심할 것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을 이방인과 세리를 죄인 취급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은 마태복음21:31b에서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방인과 세리’에게 대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사실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는 표현이다.
Ⅱ.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신 놀라운 권위.(18~19)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약속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이 말씀을 아무나 함부로 적용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언제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나(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그러한 사람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의 사람들을 증거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함에도 나 자신의 이성(理性)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고 있다면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세상사람 그대로의 자연인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님의 법인 말씀이 절대적일 때 나는 세상을 초월한 자유인이요, 그러한 자라면 주님 외에는 더 이상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권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사람이 사죄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땅에서 사죄를 약속할 사람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사죄의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들조차 있다.(카톨릭 교황의 말이나 교회를 성격과 같은 위치에 두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교회의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땅에서 하늘을 여닫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직분에서 라기 보다는 경건성의 강도에 차이가 있다고 해야 오히려 옳을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분명히 이 지상에서 하늘을 여닫는 것을 베드로 에게도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라고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성별 된 ‘교회’ 라는 구별된 도구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시대에 두려운 것은 밤에 열차를 타고 여행하다 보면 붉은 십자가가 마을마다 보이는 것은 감사한데, 주님께서 내려다 보실 때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과연 마음의 인방과 문설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린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애굽의 마지막 장자의 심판 때에 사람들의 집 인방과 문설주에 비가 발린 사람들의 집은 저주가 넘어갔던 것처럼 마지막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는 우리 사람들 각자의 마음의 문설주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발려있는가를 주님은 보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인방에 그대로 저주가 유월하는 보혈이 발려있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날마다 경성해야 할 것이다.
또 이 시대에 예배 드리는 장소를 ‘성전’이라고 너무 신성시하다 보면 언제나 그 곳에서만 예배 드려야 하고 그곳에서만 기도해야 하고 그곳에서만 성결 해야 하고 그곳에서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삶이 되기도 한다.
성전은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성령께서 임재 해 계시는 믿는 사람(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이며 교회는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 속에서도 성전 된 모습을 지켜갈 수 있는 믿음의 삶이 지속 되어야만 할 것이다.
Ⅲ.교회의 최소 단위.(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노아와 같은 한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성별 된 도성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고 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그 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그리고 다음 순서는 같은 진리로 하나된 생각과 방향과 목표가 같은 두 사람의 힘만 합쳐도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자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왜 입니까? 그러한 자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사야의 때도 하나님은 그 적은 남은 자를 통해서 믿음의 계보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진리를 행하는 두 사람의 동역(同役)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신다고 약속하고 계시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이 두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의견을 같이 하는 그것도 진리를 향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하셨고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라고 지적하시고, 마지막의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때에 남자건 여자건 두 사람이 각각 나눠지게 되며 다른 곳으로 가게 됨을 한탄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0~41)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통체는 주님의 희생에 자신을 죽이고, 의지를 죽이고,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는 즉 약속을 따라 거듭나 새사람이 된 사람들이 더해지는 것이다. 한 장의 등록서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먼저 자기 자신을 주셨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기로 각오하는 자들,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고, 구원의 역사만으로 감격하는 그런 뜻으로 합한 사람, 하나님은 당연히 그런 충성 된 사람들, 고난 속에서나 평탄 속에서나 기도로 의논하는 것을 당연히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런 사람은 숫자에 상관 되지 않는다. 교회의 일은 세상의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데 이런 입장에서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물질로 일하려고 하면 불가능하지만 믿음으로 구하며 맡기고 사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물질을 주실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우리 방송선교비만 봐도 그렇다.)
이런 입장에서 주님은 야고보를 통해서 경계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가지고 모인 두 사람, 그 힘은 이 죄악의 역사를 뒤집는 무서운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 여기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참으로 하늘의 뜻을 품은 사람들은 옆의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고, 일할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기 전에 자신이 일에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아 놔도 제 각각의 욕심과 자기 실현을 위해서 모인 무리들이라면 그 무리는 영적으로는 [오합지졸(烏合之卒-까마귀 떼처럼 아무 규율도 통일도 없이 몰려 있는 무리)]일 뿐이다.
불완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도 아니시고 용납하시고 사죄의 방법을 주신다. 교회는 범죄자를 처리함에도 세상에서 구별해 낸 무리라면 분명 달라야 한다. 세상은 당사자가 의식하기도 전에 먼저 왜곡된 체로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본인의 귀에 돌아오고 그래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만다. 그러나 교회는 범죄의 사실을 알아챘다면 먼저 당사자와 일대 일의 관계에서 권면 하는 자나 듣는 자가 화해의 사죄를 이루어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도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만으로 사실을 확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불신자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움직이는 교회에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주셨으므로 그것을 남용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고 닫는 그리스도의 뜻을 실현해야만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3:7)
오늘도 꼭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같은 목표와 마음, 같은 각오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순종의 두세 사람에 의해 이 역사는 아직 망하지 않고 불순종의 사람을 그들을 통해서 부르시는 천년을 하루같이 부르고 계신 주님의 역사는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이제 그러한 두세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함께 하시고 쓰실 수 있는 귀한 천국의 도구들이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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