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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게 이 본문의 말씀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취급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폭발적인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하고 당시의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이 많이 간과된다. 오늘 본문 v40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복음은 언제나 절망과 포기의 어두움에서 빛을 발했다.
Ⅰ.그때와 지금은 너무나 같은 상황이다.
1.로마의 마지막은 죄악의 절정기였다.
폼페이 시의 유적들을 볼 때 확실히 그렇다. 하나님께서 폼페이를 왜 화산으로 덮으셨을까? 그것은 확실한 교훈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화산으로 뒤덮어서 화석을 만든 것은 완벽하게 사진을 찍으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탐욕에 대한 경고로 롯의 처를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남기셨다면 오늘의 문화와 도덕 속에서 피폐해 가는 인간의 가치의 몰락에 대한 경계로 폼페이 시의 유적을 사진 찍어 두신 것이다.
2.오늘의 시대와 그 시대는 너무나 닮은 점들이 많다.
로마의 공화정의 말기는 역시 당시 그리스가 신봉하던 철학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였다. 인간이성의 절대적 신뢰가 바로 그리스 철학이고 그 대표적인 산물이 바로 '폴리스'라는 소형 도시국가이다. 물론 폼페이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이 최고조에 이른 그 때에 로마는 그 철학을 군대와 정치로 장악하여 더욱 논리적인 국가이념을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오히려 도덕이나 윤리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오늘도 이간 이성 발달의 최고의 산물들인 과학의 첨단에 서서 온 갓 편리와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온 갓 신전이 난무했던 헬라와 로마의 시대처럼 아이러니 하게도 미신과 요행수가 판을 친다.
3.바로 그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완성되었고 선포되었다.
이러한 로마의 말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신다. 당시의 최고의 이성주의라고 하는 헬라 철학과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 권력인 시저(가이사)에게 위임된 정치 권력과 이스라엘 속에 계속적으로 계시해 오신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완성이 되어지는데 그것은 완벽하게 인간에게서 나온 당시에 만인이 신뢰하던 철학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신다. 당시의 십자가는 인간 이성과 절대정치에 대항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을 형벌 하는 극형의 도구였다. 이것 또한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절대 정치만이 살길이다" 라고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장 천시하고 저주하던 십자가 위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이 역사의 구원의 계시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당시 베드로의 외침은 이러한 인간이성의 보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요 그것에 신물을 느끼고 막연히 나마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어쩌면 당시의 사회 속에서 버려진 자들이었다.
인간의 이성은 내가 제일이기를 바라고 남을 나에게 굴복시키기를 기대하는 죄악 된 인간에게서 나온 최고의 처세술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는 제일 아래에 거하고 나 자신이 희생하는 당시의 시대의 흐름에 정 반대되는 이론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는 의미는 그 때나 지금 이성의 최고의 꽃이라고 하는 과학의 합리적인 시대에나 너무나 흡사한 입장에 있다.
Ⅱ.이 패역 한 세대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skoliov"(skolios)] 휘어진, 굽은, (상징적으로)심술 궂은, 구부러진, 완고한, 고집센 <빌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악하고 비뚤어진 세상-공동;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표준;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고한 사람들이 가득찬 이 어두운 세상-현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세상을 절대로 긍적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실제로 세상은 언제나 스스로 절망에 빠지고 죄악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을 외면한 체로 결국은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멸망을 부르고 마는 비극적 극단으로 간다.
1.절대자를 잃어버린 시대다. 근본이 부정되는 시대다.
흔히들 가치 혼란의 시대라고 말을 한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인 가치 기준에 매여 있다. 신앙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보다는 사회적 종교의 기준에 맞게 신앙하려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복음의 생명력은 이미 상실 한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세상과 사회의 안목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사회의 흐름에 민감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더 민감해야만 한다. 남들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자유인이어야 한다.
인생의 가치를 누가 정해 주는가?
2.구부러진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 때나 우리의 시대에 옳은 것을 옳다고 바르게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보는 눈이 많은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만큼이나 굴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사가 죄로 뒤틀린 사람들의 판단은 옳고 그름이 판단되지 않는다. 어떤 것을 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당시의 주님과 야고보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약5:12)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판단에 합당한 판단을 가진 영혼과 심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조차 세상의 판단에 익숙해져 버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 삐뚤어지지 않은 것이 있는가? 교육, 결혼, 경제, 정치, 문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심성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3.완악한 것을 이르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5; 사6:10)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심전은 사막화되고 황폐화되어서 완악 한 것만 남게 되어 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 진다면 살펴서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신 마음은 겸손으로 들어 나고 주님을 모시지 못한 마은과 생각은 교만하여져서 자신만이 최고로 여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
Ⅲ.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의 외침은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 아닌가?" 사실 그렇다. 그러나 이 복음이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순종으로 각자의 삶에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되고 기쁨이 된다. 그리고 또한 오늘의 시대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는 경고를 들어야 한고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복음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생명의 교훈이다.
1.그때나 이때나 십자가가 있다. 오순절의 역사는 비극을 종료하는 새로운 시작의 서막이다.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멸망의 세대와 손을 끊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고후6:17)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 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겔2:6)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늘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편하고 고난스러워도 두려워 할 대상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경외해야 할 분은 주님뿐이다.
3.결단이 있어야 한다.(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마찬가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순종과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4.새로 열리는 시대와 진정한 교제를 시작하고 지속해야 한다.(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적어도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고 세상의 어떠한 모임과도 구별되고 상반된 모임이다.
우리의 가슴에 찔림이 있어야만 한다.
(37)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오늘 우리는 이 패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서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
겔2:3~7 (3)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4)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6)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7)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자녀를 지킨다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생각해야 하고 로마시대의 말기와 이 복음의 선포의 시대처럼 죄악 된 시대에 다시 우리는 또 하나의 기대를 가지면서 복음을 가진 자들로서 이 마지막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가![이 사실이 믿어지는가?]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마라나타!"는 인사로 일세기를 살았던 그리스도인의 같은 기대로 오늘을 믿음으로 사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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