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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6:26~29 2001-08-06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참고: 66~69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우리는 이 여름에 많은 프로그램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한다고 땀을 흘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님의 의도하시고 원하시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들 스스로의 원하는 것들과 판단으로 인간의 목표를 관철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더러는 하나님의 일을 빌미로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 덤비고 날뜀으로 인간의 의욕과 열심의 과소비로 결과에 가서는 탈진해 버리고 마는, 그래서 은혜로 했다는 확신과 기쁨보다는 물질과 시간과 건강을 허비했다는 회한으로 낙심할 수도 있다.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없는 특권임에 분명하다. 성경의 시대에도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은 아니며 특히 세상의 일들이 바빠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성경에서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는 다는 사실에 자긍심과 감격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일들을 하고 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고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영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적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왜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Ⅰ.왜 일하는가?(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 바로 저 유명한 벳세다의 언덕에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연결되어지는 말씀이다. 기적으로 떡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임금을 삼으려 했고 주님은 이것을 거절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우리는 세상에 살고 육신을 입고 사는 입장에서 세상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인정하시고 계시며, 신8: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마4:4; 눅4:4) 식물을 위하여 일할 것도 명령하셨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3:12)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육신의 안일과 형통만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에 대한 경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세상의 다른 대부분 종교는 무엇을 얻기 위하여, 무엇에 형통을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썩어 없어질 것에만 집착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자신을 찾는 군중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상징적인 의미로 주님의 주되심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렵고 힘겹게 살기를 바라시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것은 순서가 잘 못되어 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게 약속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것은 구약 시대에도 그랬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17:13) 너의 일상의 삶을 위하여 일하되 먼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하고 나서 너를 위하여 하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미 책임지신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늘의 창고를 완전히 열어 놓으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돈 보따리를 던지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이상 우리의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다.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12:7)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자신의 수고한 대로 먹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이미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진 것을 구하는 유치한 모습을 꾸짖고 계시는 것이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을 향하여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이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6)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천국의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우리의 가치에 비교될 수 없는 연봉(年俸)이 아닌 생봉(生俸)을 넘어서 영봉(永俸)을 이미 지불하시고 우리를 일하도록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다른 뜻은 일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생명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다.



Ⅱ.어떻게 일할 것인가?(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되받아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을 해야 신을 위한 일이며 영원을 위한 일이 되는가에 관심이 많고 이것이 바로 대부분 종교 생활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8:18) 빌릴보의 간수도 자신의 일생 속에 처음 겪는 상황을 만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 고 묻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주님이 평상시 하신 일들, 주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 그것을 우리 각자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Ⅲ.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27, 29)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심을 먼저 말씀하신다. 우리는 적어도 영원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 각자의 영생을 위하여 일하고 또 다른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요 영생을 위한 일이다.



성경 속에서의 "믿음"은 우리말처럼 그냥 명사(名詞, noun)가 아니라 동사(動詞, verb)이다. 관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성한 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말에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영향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도 당연히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즉 오늘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이 첫째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나님과 교회와 더불어 일하는 것이 신령한 영적인 일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이 필요 없다.



우리는 일에 대해서도 어느 일이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가 천국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각자의 인생을 살면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일이 더 우선 순위에 있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는 적어도 인생의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의 중요 정부 관료의 권력 순위 3위에 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오랫동안 교도소를 복역하고 나온 존 얼리히맨(John Erlichman)은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나는 50년을 살았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이 덜 중요한지,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으며 어떤 것이 덜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이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해도 사실적으로는 죽어 있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고 말한바 있다.



그의 생애와 관계없이 이 말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말이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든 지를 막론하고 어느 일에 더 가치를 두고 사는가는 바로 그 사람의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와 됨됨이에 관련이 있는 말이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오늘 물으신다. "너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냐?, 지금 너에게 있어 귀중한 일이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의 대부분을 쓰고 있으며 온 정력을 다 쓰고 있느냐?"



이러한 질문은 마치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질문과 같이 들릴 수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나(우리 각자)는 이 시간 감히 "주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입술로 그렇게 고백했을 때 그것이 사실인가?



오늘 나는 어떠한가?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부끄럼이 없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