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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후 3:6~15 2001-09-09
우리가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이 말은 불신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하시는 삶의 규모를 거역한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에덴에서 추방을 당했다.



사람만이 규모라는 것을 갖고 산다. 동물에게는 규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라고 고백한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인간성을 회복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오늘 바울사도로부터 책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우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 소양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교회 속에 있다면 진정으로 거듭 낫다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책망을 듣고 있다.



범죄 하여 동물로 전락한 사람을 다시 본래의 복된 자리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거듭남으로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그 이상 무엇(神)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사람의 모델은 인자이신 그리스도시다.



그럼으로 거듭남은 단순하고 쉬운 것 같지만 神妙막측한 하나님의 계획과 고뇌의 결과인 것이다. 십자가에 자신이 피를 흘리는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통하여 짐승이 된 사람들을 살리려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거듭난 자들마다 새로운 규모를 가지고 살게 하신 것이다.



그 규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인 것이다.



[규모 없이, (헬 ataktos), '정돈되지 않은, 즉 (종교적으로)복종하지 않는, 제멋대로 하는’(살전5:14; 본문 6절) = (헬 a 부정)+(헬 tasso), 질서 있는 방법으로 ‘정돈하다, 즉, 임명하다, (어떤 지위나 운영으로)배열하다, 명하다, 결정하다, 정하다 (행22:10)] "규모"는 "법"이라는 말보다도 앞선 것이요, '본보기' 즉, '모범'이나 '규범'을 의미한다.



"법"은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이라면 "규모"는 모범을 의미함으로 부덕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우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규모'인 것이다. 인격적인 모독과 육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막다른 골목에서 조차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신 주님의 삶의 모습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보기라는 말이다. 바울사도께서도 오늘 본문 v7에서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영적인 규모가 없는 사람들 즉 회복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가 없다. 살벌하고 냉혹하며 무섭기까지 하다.(요즘은 다른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 이런 유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가져도 먹이 사슬 때문에 관계하는 동물적인 근성을 본다. 이득이 되야 거래를 하는 식의 만남과 교제가 그렇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순수한 사람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고 반드시 무엇인가가 계제 되어야 사귀고 나누고 주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특정 연예인이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외모, 목소리까지 cordy(꾸민)한 허상을 향해서 열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즉, 걸친 것과 꾸민 것을 사랑하는 허상의 사람을 좋아하는 세대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인기가 언덕을 넘어갈 때는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군중의 인기를 경계하셨던 사실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기에 열광하는 그 군중이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지를 것을 이미 보셨기 때문이다.



Ⅰ.본문에서 특히 규모는 일과 연관되고 있다.(8~10)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바울사도의 삶과는 다른 이러한 모습은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한 모양이다. 할 수만 있으면 수고 없이(일하지 않고) 一攫千金을 기대하는 세태, 그래서 복권이 많이 팔리고 인기가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이 아닐까? 남의 송에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쓰려고 하면서도 나의 것은 내어놓지 않으려는 엄청난 이기주의의 시대, 이런 세상 가운데 주님은 생명까지 주시려 오셨던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현상은 죄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하지만, 신앙의 사람들의 이러한 요행수는 참으로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수고는 안하고 모든 것을 기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건전치 못한 욕심을 오늘 바울사도를 통해서 개탄하고 계시는 것이다. '값없이, 일하지 않고, 수고 없이' 누를 끼치는 삶을 자신은 신앙의 지도자이지만 하지 않는다. 너희들 중에서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무서운 책망이다.



특히 이 데살로니가서의 성격이 재림을 주제로 다루는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힘이 있음에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영광에 들어가려는 자들이야말로 남의 것을 통째로 꿀꺽하려는 사람들 보다 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신앙으로 사는 규모의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구원으로 부르시기도 하셨지만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을 위하여 일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사실도 있지 말아야 한다.



규모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권리조차도 자제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랑이 된다. 바울사도는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전9:18)



Ⅱ.믿음의 사람들이 규모대로 살지 않으면 오히려 일을 만들게 된다.(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성경에서 이러한 당부는 늘 어린아이나 노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장성한 사람들을 향해서 주시는 경계다.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로 늘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사람들은 감격을 가지고 산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하시다니...!" 바울이 그런 고백을 자주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럼으로 신앙 안에 기쁨과 감격은 십자가로 통한 구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절정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기뻐하라"는 바울 사도의 당부는 다른 말로 바꾸면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보라!"는 권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기쁨은 '스스로가 찾아 누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감사도 기쁨도 없고 일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허물만 보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하려는 사람을 붙들고 흠잡기에만 혈안이 될 수 있다. 그런 결과는 당연히 일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작은 소모전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는 데로 모아져야 한다.



죄진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규모를 지키며 살 수 없다. 복음 안에서만 진정한 일치가 가능하다.



Ⅲ.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의 규모대로 살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지난주에 우리가 생각했던 말씀이다. 규모 없는 세상에 살면서 신앙의 규모를 따라 사는 것이 언제나 손해 보는 것 같이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이러한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규모를 따라 살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너무 고지식하다'고 핀잔을 준다. 육교 밑을 손쌀 같이 건너면서 육교 위를 건너오는 사람을 보고 어리석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요령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의로운 백성들이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의를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정직하게 사는 하늘 나라의 백성들이 세상만 바라보면 자신이 어리석은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이 낙심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사도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격려하신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오히려 하늘의 규모를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는데 까지 우리는 성숙해야만 한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이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저들도 십자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손해보는 것 같이 의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때 낙심치 않고 의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보고 계시지요..!"



Ⅳ.신앙의 규모를 버리는 사람들은 교제를 끊으라고 당부한다.(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바울사도는 한 걸음 나아가서 신앙 속에 있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규범(모범)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따돌림을 시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경계는 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15)



교회에서는 하늘의 규범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만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속화 된 교회는 세상과 꼭 같이 법을 다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 치는 곳이 된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기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인하여 감격하고 충성하며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곳이다.



세상이 어떻게 가든지 우리는 바울사도와 같이 "나(우리)는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고백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고백이다.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우리 모두 이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천국의 규모로 사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