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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0:9~17 2001-10-0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참으로 너무나 쉽고 간편해서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의 통로이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고 말씀하신 것처럼 허락하신 사랑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오늘도 십자가의 은혜는 거져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믿음을 키우는 것은 그야말로 은혜 위에 은혜요 거져 주시는 바 하나님의 선물이다. 빈부귀천, 민족과 종족, 피부와 언어에 장애는 없다. 그야말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은혜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확신케 한다. "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처음 믿음을 갖게 되는 동기도 '들음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믿음을 키우는 것도 '들음에서'다. 우리가 외국어를 공부할 때도 반복 청취를 하면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은 원리 그대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항상 '들으면'이 쉽다고 하는 것에 함정이 있다.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듣자!" 고 미뤄 버리는 것이다. 마치 외국어 테이프를 사서 공부하려는 타성이 믿음 생활에서도 그대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육신의 욕구와 사회성에 더 시간을 쓰다 보니 참으로 영원에 대한 귀한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밤을 새면서 아르바이트는 해도 교회 와서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뒷전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들의 영혼은 세상과 같은 애굽에 길들여지고 자신이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가슴아픈 모습으로 오늘의 학생 청년들은 전락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는 분명 자주 접하는 것들과 익숙해지게 되어 있는 것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접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늘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세상과만 교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한 결과는 당연히 어두움으로 다가가며 적어도 구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의 마지막이나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게 될 때 후회하게 될 것이지만 그 모든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의 신앙적 경고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라는 서로의 격려가 절실한 상황이다.



Ⅰ.시인할 수 있는 믿음(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께서 일찍기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로마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과 마지막까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로마시대에는 절대 권력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을 총칼로 생명을 위협하면서 막았고, 오늘은 세상적인 안락과 영광이 총칼이 아닌 명예와 쾌락을 담보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을 막는다. 한가지 다른 것은 로마시대 때는 총칼 앞에서도 주님을 시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도 버텼는데 요즘은 너무나 쉽게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것과 주님을 바꿔 버린다는 사실이다.



오늘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세상의 물질의 가치가 점점 찬양되어 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예수)이 나에게는 가장 귀하다"는 고백을 세상의 친구들에게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3:8~9ff)이라고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도 어떻게 변함없이 주님을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도 의외로 간단하다. 주님께 순종과 드림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주 자주 말씀을 듣는 자가 믿음이 자라고 용기를 얻고 어떤 타협 앞에서도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고 시인 할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Ⅱ.들음에서 나는 믿음(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세상에서의 어떤 것의 약속은 언제나 '이것(무엇)을 하면' 이다. 만약에 구원과 은혜에 대한 방법이 '한라(백두)산을 오르면' 이라면 얼마나 힘들까? 힘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온전히 오르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돈을 1억 정도 요구하셨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도 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듣는 것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데도 그것이 이렇듯이 어려운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믿음을 얻게 한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5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복과 은혜의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막4:9, 23; 눅8:8, 14:35) 하셨으며 때문에 듣는 것 자체를 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48:18)



반대로 세상과 마귀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온 갓 것들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들음은 그냥 아무 것이나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반드시 주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하마드의 말, 싯달다의 말, 철학자의 말, 여기 이종배의 말, 구원에 관해서 만은 다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익한 것이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만에 영생에 있어서 가치가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다.



Ⅲ.익숙지 못한 대상을 쉽게 부를 수 없다는 경계를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13~1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뒤따라오는 말씀은 역시 우리로 하여금 주춤거리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표준새번역]" 이 땅에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다시 오시고 바로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분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셨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얼마나 감사한 약속인지 모른다. 그것이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럴진대 이 역사의 종말에 무시무시한 절망 속에서 주님을 불러 구원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더 간절할까!



잠언 1:24~30에서는 하나님의 응답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솔로몬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24)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25)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27)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28)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29)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30)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우리는 요즘 우스개 소리 같은 말을 신앙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있을 때 잘해"



오늘 우리가 주님께 잘해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절대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잘 듣는 것이다. 어떤 경우나 사람들에게 어렵게 들릴 때도 있지만 잘 듣는 것은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지금 잘 들음으로 환난의 날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Ⅳ.들음으로 믿음을 키워가야 세상을 향해 전할 수 있게 된다.(14b~15)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어떻게 이 놀라운 구원이 세상에 아직도 구원과 멸망을 모르고 목표 없이 나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있는가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1:10) 상고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전파하는 이는 오늘도 이 복음을 듣고 감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은 주의 음성을 듣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의식이다. 이를 이사야의 고백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Ⅴ.결론.



말세의 비극적인 현상을 우리는 사랑의 고갈, 기도의 고갈 그리고 말씀의 고갈이라고 뜻 있는 신앙인들의 진단하는 것을 듣는다. 이 세상에서 편리와 물질의 부요는 어떤 후진국들을 제외하고는 점점 풍성해 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점점 희귀해 지는 것들이 바로 신앙적인 요소들인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8:11~12)



우리는 로마시대부터 오늘 나의 인생에서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오실 때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신인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믿음이 바로 들음을 통해서이며, 항상 주님을 가까이 섬김으로 이 세상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로 기쁘게 구원의 주님을 부를 수 있는 그때까지 나의 믿음을 키우며 십자가의 은혜를 전할 수 있는 모든 근거가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세상의 가치가 점점 더 귀하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멀리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역시 들어야 한다. 교회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는가? 이것은 은혜에서 멀어짐의 전조임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