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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고해요 인생은 나그네라 했던가...
세상에 어느 누구도 고통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고난과 연결되어 있고 이 땅에서 호흡을 하는 이상 고난이나 어려움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서 고난 당하는 욥을 위로하러 왔던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욥5:7)고 말하고 있다.
왜 아름다워야 할 인생에 이처럼 고난은 쉼 없이 오는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 모든 인류의 숙제다.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도 이 고난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벽두에서부터 고난이 범죄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 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17b~19f) 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 속에서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보다 근본적인 고난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하고 있다.
성경은 인생에 대해 낙관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낭만주의는 충분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낙관적인 대답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고난에 대해 정직한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정말 거칠게 쓰여졌지만 사실적인 진리이다. 인간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고,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긋 지긋하고 행복하지 않은 주제이지만 현실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고통과 불행을 함께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크신 사랑을 말씀과 더불어 확인했으면 한다.
Ⅰ.고난이 없을 것이라는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한다.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를 내걸고 인간의 평등과 안전을 담보하고 피를 부른 공산주의는 시간이 거짓임을 드러냈다. 죄가 들어 온 이 땅에 천국과 같은 이상은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5) 고 선언한 바 있다.
성경은 너무나 정직해서 범죄한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이거나 이상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죄가 해결된 사람에 대해서만 비록 절망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영광을 약속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비극이 숨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절망을 숨긴 체로 낙관적으로 듣기 좋은 말로 기분만 좋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지만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 죄인이다. 인간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낭만주의자들처럼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가리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상주의나 낭만주의는 사실 매우 잔인하다. 이상주의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기대한다. 결국에 가서 이상주의는 모든 사람을 절망의 시궁창인 지옥으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에 속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해결하려고 종교를 가진다. 그러나 종교는 오히려 더 강도 높은 고난을 주문한다. "고행을 해서 너를 괴롭게 하라, 그것이 고난을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나 모순된 주문인지 모른다. 중세에 잘못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고행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신앙이라고 오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골로새서 2:21~22에서 이러한 모든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증거 한다. 오늘 나에게 고난이 있는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Ⅱ.고통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며 절망적인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누구해도 구약성경의 욥일 것이다. 그 욥은 고난 속에서 고백하기를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욥14:1~2) 이라고 인생을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예외 없이 고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인생은 고난으로 채워지는 짧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극단적인 표현까지도 쓰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8~9f)
자신의 것을 챙겨서 집을 떠나 타락하여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다 잃어버린 탕자에게도 오늘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밤낮 수고하고 애쓰는 바울과 그 일행에게도 고난은 비껴가지 않았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로 인한 고난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인류에게 함께 나누어주기 위해서 수고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의로운 고난이 있는 것이다.
죄를 위한 고난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유익이 없다. 그러나 의로운 고난은 반드시 유익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왕에 고난을 당하는 인생이라면 가치 있는 고난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Ⅲ.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뿐이다. 그러나 의미는 다르다.
1.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4:13)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고난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 한 계속 진노를 쌓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사람들도 범죄 할 수 있고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징계의 채찍을 드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또 용서를 약속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일꾼이라도 범죄를 허락지 않으신다. "…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
베드로 사도는 당부하기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7)
2.의를 위한 고난은 가치가 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하여 의인도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면서 하나같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더불어 살았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심지어는 모세를 이야기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5) 라고 평가하고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의를 위하여 고통받아야 한다고 격려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0~23)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앞세웠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우리는 어떤 종류의 고난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때 좋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3.의로운 고난의 유익.
1.함께 환난 받는 자를 위로하게 하신다.(4~6)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을 받았는데 부족한 나야...."
2.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견고해 진다.(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사실 소망이 있다면 고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어떤 종류의 고난이 나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Ⅳ.그러나 반드시 고난은 해결될 것이다.
고난의 문제는 범죄한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至高至善의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고 그래서 친히 우리 인간의 질고와 절망을 해결해 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의인들이 비록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 고난의 세상이 끝날 때 영원한 영광을 약속하고 계신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2~53)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우리의 고난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Ⅴ.결론.
불신자이건 하늘에 속한 성도이건 그것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에서나 고난은 있을 수 있다. 범죄 한 인류에게 고통이 없을 거이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일 뿐이다. 고난의 원인인 죄가 해결되기까지는 인생의 앞날은 낙관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못하다. 우리는 고난이 닥칠 때 그 원인을 바로 파악해야 한다. 죄로 인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고 주시는 징계의 채찍인지 아니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연단 하시는 시련인지 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의로운 고난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범이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3, 5)
우리는 고난 당한다고 낙심할 것도 없고 고난이 없다고 교만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 경우가 어떠하든지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는 바울사도의 신앙적 권면을 들어야 할 것이다. 범죄 했다면 긍휼과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자세로 사죄를 위해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한 연단일지라도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역시 하나님만 의뢰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셔서 승리케 해 주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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