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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예수께서 어린 시절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교훈 하는 바가 큰 말씀이다. 천사에 순종하여 모든 불이익을 다 감수하고 부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탄생시키기까지 한 신앙의 모범을 가졌던 요셉과 마리아 부부의 일 순간의 실수와 거기에 따르는 일들은 오늘 같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
특히 이 사건이 유대인의 신앙의 명절인 유월절 바로 이후였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오는 바로 신앙의 역사에 이은 실수라는 데서 오늘 신앙의 행위 뒤에 남게되는 방심과 은혜 주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딴 것들에 눈 돌리다 신앙의 깊이를 잃어버리는 요식 행위에 만족하는 다소 미신적인 믿음에 경계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마치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허전한 마음에 성경을 꺼내 읽어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행8:27~31)에게서 빌립이 봤던 처량함이 오늘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같은 과정을 답습하는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여러분들의 삶에 예수께서 계심이 확실한가?
※오늘 우리의 믿음 생활이 사실과 진리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사실은 함께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함께 있다고 임마누엘을 외친다. 한마디로 착각에 사는 종교인들이다. 그러나 이 착각만큼이나 비극적인 것도 없다. 올바른 신앙을 잃었다고 깨닫기나 하면 찾기라도 할 탠데 빈 통조림통 들고 앉아서 그 안에 먹을 것이 가득 들어있다고 착각하고 좋아하는 아이처럼 예수도 없는 신앙을 가지고 헛된 만족을 가지고 있다. 한껏 감정만 부풀려 있는 그러면서도 천국은 제것이라고 떠벌리는 가련한 모습은 참으로 불쌍한 모습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고 자만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주님께서는 저들을 세계 각지에 흩어 버렸던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생각과 헛된 꾀로 헤아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사실 속에서 늘 열매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7) 주님께서 떠나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실과 그럴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생각의 차이도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과연 나의 신앙의 삶에 예수께서 명령하고 계심이 확실한가?
Ⅰ.예수를 잃어버린 삶이란?(48, 50)
예수쟁이가 예수를 잃어버리면 참으로 인생의 가치를 잃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를 잃어버린 인생의 기간은 헛된 인생의 기간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가치는 생명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 주님이 동행하시는 가는 죽어서 냄새 나는 삶인지 살아서 생의 향기를 나타내는지의 관건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주님은 요한 사도를 통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확실히 모시고 사는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를 잃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예수를 잃어버린 삶은 비극이다. [500:3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아멘]
옛날의 희곡에서 연인을 연모하는 표현이 "그대 없는 세상은 불꺼진 항구"라고 했던가...? 우리 인생에 있어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야 말로 칠흑 같은 밤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을 잃어 버렸다든지 또는 멀리 계시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예수를 잃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찾았지만 그 예수를 대하는 요셉과 마리아의 자세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1.짜증스러운 삶이 된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48f)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배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도 엘리사벳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6~48) 처음 깨달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중요하다.[85:1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를 잃어버린 삶은 자신들의 수고만 생각하고 짜증스러워한다. 우리 信仰人들의 陽地와 陰地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느냐 멀리 하느냐에 있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삶은 환경이 어떠하든지 웃음과 기쁨이 마르지 않을 것이지만 주님 멀리 하면 과거에 자신이 한 수고만 내세우고 쉽게 짜증스러워 한다.
2.근심하는 삶이 된다.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b) 주님을 마음에 모신 첫째의 복이 마음의 평안과 감사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보면 내일 먹을 때 거리가 없어도 마음은 걱정이 없는 것을 본다. 그러나 주님을 잃어버린 삶의 마음에서는 가만히 근심부터 머리를 들게 되는 것이다.
3.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50) 예수님께서 전혀 색다른 말씀을 하시거나 방언을 하신 것도 아닌데 특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 주님의 본질적인 사역을 말씀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과거에 예수님의 정결 예식을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34~35) 라는 예언을 들을 때도 알아들었는데 예수를 잃어버렸던 경황 중에서는 쉬운 말씀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나와는 관련 없는 먼 이야기로 들릴 때도 예수님을 잃지 않았는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Ⅱ.예수를 잃지 않으려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시고 나의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한순간이라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주님을 잃지 않는 신앙 생활을 할 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역시 배우게 된다.
1.습관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41~43)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특징은 언제나 절기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신앙인 들이었다는 것이고 여기에 예수님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러한 절기를 패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2:11)다 하셨고 복음 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절기에 매여 신앙하는 갈라디아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
오늘도 동일하게 절기는 물론이고 날과 달, 절기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신앙하는 습관적인 믿음 생활은 아직도 복음보다는 구약의 율법적인 신앙생활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바울사도께서는 경계를 여러 번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 속에서의 삶은 항상, 쉬지 않고 모여서 예배하던 흩어져서 세상에 살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다.
절기에 의례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의례적으로 마치고는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우리는 예배에 오든 어떤 일 속에서도 어디를 가든 오든 예수 그리스도를 챙겨야 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 해 둬야 한다는 말이다.
2.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살아서는 안된다.(44f)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나를 위해서 피 흘리신 주님께서 중심이 되지 않고 나의 이성적인 판단과 생각이 모든 것을 제한하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 생명인데도 모든 것을 理性的으로 肉身的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은 모든 우리의 삶의 문제를 말씀과 성령의 의지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본문의 내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래간만에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을 잃었던 것 같아.[도로와 집들의 변화, 꽃 또는 단풍, 사람들 등등] 그러나 어디를 가든, 오든 예수 그리스도를 챙겨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감정이 앞서기 쉽다. 하나님의 입장보다는 네 감정이 먼저 앞서버리는 경험들을 신앙인들도 더러 만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고 판단하면 안된다. 오늘 나는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Ⅲ.잃어버린 예수를 찾으려면...?
1.친척들 사이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안되(44b)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신앙의 문제는 혈연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친척이라는 관계 때문에 믿음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심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역시 아들로만 생각했다. 이 얘기는 또한 친척일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는 신앙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2.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우리는 잃어진 순서를 역순으로 추적하여 회복을 해야 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3.약속의 장소에서 찾을 수 있다.(46f, 49)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최종적인 회복은 언제나 성전에서다. 모임의 회합, 교회의 예배, 그리고 내 마음의 성전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전 삶의 영역을 지휘하시는가?
Ⅳ.결론.
우리가 열심히 믿음생활 하면서도 예수는 잃어버리고 절기에 매여서 요식 행위에 그칠 신앙의 위험성은 늘 있다. 우리 민족의 전래적 정서 상 감상적이 되기 쉽고 오늘의 학문의 확산에 따라 신앙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위험도 있다. 단순히 "이렇게 하면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거야!" 라는 어리석은 판단은 자칫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삶은 Battery 가 바닥나 notebook 과 같다. 그 안에 엄청난 data 가 있다고 할지라도 꺼내어 쓸 수 없는 것처럼, 믿음으로 대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짜증스러워지고 근심이 다시 머리를 쳐들고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은 때는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칫 습관적인 신앙과 어리석게도 자신의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껍데기뿐인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 만약에 예수를 잃어버렸다고 판단이 된다면 육신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말고 처음 신앙을 회복하도록 주님의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찾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확신함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강론할 때마다 언급되는 경계는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데는 하루 밖에 안 걸렸지만 되찾는데는 사흘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만큼 잃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들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 내가 과연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가지는 나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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