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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누구나 눈을 가졌다. 그러나 가진 눈의 상태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을 본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도 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11:34~36; 마6:22~23) 분명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보이는 육신의 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인류는 보는 눈이 바르지 못함으로 더 이상 비판을 중지해야만 한다. 범죄 한 인류의 판단은 언제나 치우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시는 것처럼[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판단을 중지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인 사람들이 범죄하여 육체의 사람으로 짐승과 같이 되어 버렸고 모든 판단은 신령한 판단이 되지 못하고 육체를 따라 판단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8:15) 주님께서도 판단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야 얼마나 연약한가...? 때문에 우리 각자는 판단을 다시 심판 주로 오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
오늘 불완전한 나의 비판은 다시 나 자신을 심판하는 정죄로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에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눈에 티 하나만 들어가도 얼마나 괴로운데 들보가 들어 있다면 먼저는 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불편하겠는가?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기쁨이 없다. 오직 힘써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눈을 가리는 들보를 빼내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앙의 자세이어야 한다. 우리 일생의 과제가 어쩌면 주님의 눈과 같이 편견이 없이 사랑과 긍휼과 진리의 기준으로 대상을 볼 수 있는 데까지 들보를 빼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신앙의 성숙은 얼마나 주님을 닮은 밝은 눈으로 변화를 받았는가 일 것이다.
Ⅰ.무엇을 통해서 보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나의 상태에 따라서 남은 다르게 보인다. 그러므로 문제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
1.죄의 눈이 있다.
범죄한 인류는 좋은 것보다는 수치를 보고 부끄러움을 본다.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좋은 부분보다는 좋지 않은 부분을 먼저 보게 된다.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리라 기대 했지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죄로 붉게 물든 눈은 아무 것도 바르게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영적인 세계와는 무관하게 육신적인 면으로만 보게 된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2:14)[그들의 눈에는 음욕이 가득하고 끊임없이 죄만 지으며 들뜬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그들은 욕심을 채우는 데만 잘 훈련되어 있는 자들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에 알맞은 자식들입니다.-공동] 고 경계하고 있다.
2.사랑의 눈이 있다.
십자가의 피로 회복된 눈이 있다.
사랑의 눈에는 미운 것이란 없다. 백옥 같이 흰 피부만이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검은 피부도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예루살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까무스름하더라도 아름답단다. 광야에 사는 게달족이 쳐놓은 장막처럼 까무스름하더라도 솔로몬 성전에 꾸며 놓은 휘장처럼 아름답단다.](아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 우리의 사랑의 주님은 죄와 허물 투성이인 나(우리)를 아름답게 보시고 신부로 삼아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럼으로 결혼전의 자매들은 사랑 받기를 원한다면 피부를 가꾸는 것보다도 사랑의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본래 사랑의 사람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죄의 미움이 들어오면서 이 귀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랑의 대상(對象)에게 미움이 가는 사람은 없다. 그럼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밉게 보인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추하게 보이고 밉게 보인다면 나 자신의 사랑에 고장이 났다는 사실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 눈에 들보가 크구나! 주님 들보를 제거하게 하셔서 사랑으로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Ⅱ.들보는 범죄한 인간의 죄성의 단면이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복이 나오지 않고 저주가 나오는 것은 이러한 죄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축복만 할 것을 명하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를 더 아름답게 보고 죄악 된 가치는 의인을 격려하는 것보다는 죄인을 더 옹호하는 악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32)
1.교만의 들보가 있다.
자존심의 들보이기도 하다. 존경심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함에도 사악한 죄의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강하여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사정없이 저주해 버리고 비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남을 저주하고 헐뜯는 존재는 바로 마귀로 나타난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b) 우리는 주님께서 보이셨던 겸손으로 내려가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럼으로 주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쒸워 주실 때까지 겸손의 훈련을 지속해야만 한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저 사람은 나보다 났다, 나는 모든 사람보다 부족하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 때 교만의 들보는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결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이 잃어 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겸손을 바라봄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2.미움의 들보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역시 죄악으로 뒤범벅이 된 이 세상은 미움이 지배하게 되고 신앙 속에서도 마지막의 시대에는 더욱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움이 범람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계한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반대로 사랑치 못하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 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인정치 않으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v19~20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3.허영의 들보가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도 형제 자매에게 요구하고 비방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때문에 바울사도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우리 각자는 스스로는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허영심임을 알아야 한다. 또 그런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말씀조차도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들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은 항상 완벽한데 주변의 사람들, 우리 교우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고 이렇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거나 주님 오실 때까지 회개치 못하면 기대하는 천국은 고사하고 그 마지막은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자들의 운명을 말하기를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8)
Ⅲ.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시려고 피를 흘리셨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들보는 제거되지 않는다. 비록 죄의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 볼 때만, 그 대속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만 내 눈에 들보는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을 때만 모든 것을 삐뚤어지게 보는 나의 눈의 들보는 제거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인류의 모든 미움과 저주를 십자가위에서 모두 담당하셨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5)
미움의 사람, 원수조차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하시려고 친히 온 인류의 미움과 수치를 다 짊어지신 것이다. 그럼으로 주님으로 통하여 거듭난 사람은 허물을 더 이상 남에게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으며 모든 잘 못된 원인은 자신 때문이라고 겸손해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 마음 눈에 미움과 저주의 들보가 제거된 사람들만이 가능할 것이다. 들보를 빼낸 눈을 가진 사람만이 인간을 사실대로 보고 그들을 불쌍히 보며 하나님께로 이끌고자 한다.
Ⅳ.결론.
"오늘 나는 어떤 눈을 가졌는가?" 나의 눈은 들보로 가려져 있지 않은가? 나는 다 온전한데 옆의 사람들이 다 잘못 되 보이지는 않는가? 만약에 다른 사람이 미움으로 보이는 들보를 내 눈에 가지고 있는 한 기쁨이나 행복은 없고 들보를 눈에 가진 고통만이 있을 것이다. 만약 내 눈에 들보를 가지고 있는 한 한 사람도 바로 보이지 않고 진실도 진실로 보이지 않으며 신앙하는 것조차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죄악이 아름답게 보이고 의를 행하는 것이 위선을 행하는 것으로 가증하게 보게 될 것이다.
죄악으로 교만의 들보, 미움의 들보가 가리운 눈은 천 개를 가졌어도 어느 것도 바르게 보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의 모든 삶의 회복을 위해서 있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다. 그것은 나의 인생의 회복과 함께 나의 가치관도 바꿔 주시기에 충분한 사랑의 역사다. '나의 눈, 나의 생각' 모두가 주님의 피 흘리심을 믿고 의지할 때만 진정한 천국의 기쁨은 오늘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주님의 대속의 은총은 나에게 실재적 이여야만 한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며 생각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며 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이냐 보다는 내가 남을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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