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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과 제사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사마리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것들은 거의 회복되어 가는 상황에서 다시 에스라와 더불어 2차 귀환이 이루어지면서 보다 내면적인 죄의 부분들을 다루게 되는 모습을 이 에스라서의 뒷부분은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외형적인 모양이 갖추어지면 내면도 다듬어 질 것 같은데 실재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지적해 준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와 상황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이런 것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배우게 된다.
예수께서도 마23:25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눅11:39)라고 지적하셨다. 죄진 인간의 죄성은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적 분위기를 만들어 놔도 그 분위기 때문에 거룩해지지는 못함을 깨닫는다. 생활이 안정이 되고 경제가 나아지면, 어떤 직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것 같은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반대로 가기 쉬운 모습들을 얼마든지 본다.
때문에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오자마자 황폐화되어 있는 사람들의 거친 마음 밭부터 갈아엎으려고 도전하는 것을 본다. 8장에서 귀환하는 에스라와 백성들의 모습을 보는가 싶더니 9장에서부터는 백성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스라가 계속해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통회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이 마지막 장에 이른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죄악의 포로 되어 살다가 돌아왔음에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자만심과 이기심으로 신앙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하고 외형적인 모습에 더 이끌리기 쉬운 오늘의 시대에 불신의 세계와 더불어 적당히 타협하면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이방인들과의 통혼처럼 세상의 것들과 적당히 동거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천국의 감격은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에스라처럼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천국을 향한 삶에는 진정한 감격은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의 죄악의 논리를 완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쫓아내지 못하면 거기에 끌려 여전히 종노릇 할 위험성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에스라의 신앙회복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루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으면 한다.
Ⅰ.거룩한 울음과 기도가 있었다.(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눈물과 한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눈물과 한탄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나 먹지 못해 허기져서 우는 것도 아니고 떠나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과 통한의 눈물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눈물을 가르켜 이르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고 죄악과 더불어 단꿈을 꾸는 자들을 향하여서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눈물 바다를 이룬 이유는 9:1~2에 나타난 이유 때문이었다. "…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가장 경계하셨던 말씀이요 또 사실은 그 일로 인하여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신7:1~5)
그러나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도 아닌 동족의 죄를 한탄하는 지도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회개의 눈물을 보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들은 다음 세상인 천국에서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쾌락으로 헛된 웃음과 더불어 산 사람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먼저는 경건한 신앙의 지도자의 하나님 앞에 엎드린 모습을 본다. 그리고 장차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겪는 회개의 고통을 겪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듣기 민망한 죄의 지적에도 그 말씀에 기꺼이 동조하는 많은 백성들의 함께 하는 모습을 본다.
엘리야는 엄청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결국 낙심하여 광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사사기5:23에서 여선지 드보라와 바락의 가나안 왕 야빈과의 싸움에 동조치 않은 거민을 저주하는 것을 읽게 된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라고 승리의 노래 중에 무서운 저주를 선포한다.
여기의 회개에는 어른과 아이가 따로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하신 만큼 사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넘치도록 은혜를 주셨음에도 그것으로 일하지 못하는 눈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과연 오늘 나(우리)에게는 어떤 눈물이 있는가…?
Ⅱ.울음 가운데서도 소망을 찾았다.(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그러나 그들은 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눈물 속에서 소망을 찾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논리가 아니고는 찾기 힘드는 삶의 논리이다.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눈물은 더 이상 소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에 눈물은 절망을 바꾸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줄 대상은 없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죄와 더불어 잘 나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새마을 열차일 것이지만 그 죄를 심각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소망을 부르는 슬픈 노래인 셈이다.
시편기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좀더 적극적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고 고백하고 있다.
내가 죄를 온전히 떨쳐 버리지 못해서 우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늘 우는 자들은 소망이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러한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7) 이 세상에서 하나님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린 자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세계에서 그들의 눈물을 영원히 씻기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536:3이 눈물 골짜기 저 너머 위에는, 끝없는 사랑만으로 쉴 곳이 있도다; 544:2눈물 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 길 다 간 후에, 주의 품안에 내가 안기어 영원토록 살리로다,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이왕에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울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면 소망을 인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셨다...
Ⅲ.죄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었다.(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회개가 말씀과 함께 할 때 은혜의 결단을 가져오게 된다. 여기에 말씀이 세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①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②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③율법대로 행할 것이라[법에 그렇게 있으면 그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공동]
Ⅳ.지도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었다.(4)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은혜 받을 자들의 자세는 다르다. 듣기 좋은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축복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 저들의 죄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①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②일어나소서 ③우리가 도우리니 ④힘써 행하소서" 신앙의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경건해야 하고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아무리 진리를 가르쳐도 그것을 믿음 없이 들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성령과 더불어 서로의 강한 신뢰가 말씀이 생명으로 역사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살전2:13) 데살로니가 교회가 소문난 교회가 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절망의 안개를 걷기 위하여 영적 지도자의 경건과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바른 지적이 있었고 그 거룩한 요청에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회개와 아름다운 회복 운동의 물결이 확산되어 가는 것을 본다.
신앙회복 교회회복은 어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역사에서나 하나님께서 깨달은 지도자를 주시고 거기에 의를 사모하는 백성들이 동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과 역사 속에서 읽게 된다.
Ⅴ.결론.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황은 어떤 것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그 상황에 직면하는 자세가 문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수욕적인 바벨론의 70년여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돌아 왔지만, 세속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바벨론에 길들여져 버린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라는 거룩한 언약의 장소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과 종교의 지도자들이 죄를 짓는데 으뜸이 되는 비극의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바로 파악하는 영적인 지도자의 탄식 어린 중보의 눈물이 있었고 거기에 함께 동조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함께 함으로 저들의 비극에 대한 치료는 구체적인 진척을 보이게 된다.
분명히 오늘의 우리 상황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외형적으로는 건물들이나 숫자에서는 자리를 잡은 것 같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지도자들부터 타협되었고 백성들이 죄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세계는 피폐해져서 뜻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는 안타까움을 보고 듣는다. 그러나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무사 안일의 종교 생활과 구별된 회개와 거룩한 연합의 신앙 운동을 일으킨다면 오히려 이 어두움의 시대에서의 적은 불빛도 더 밝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면 비극이나 절망이 오히려 더 큰 소망을 보게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현재의 죄악의 상황에 안주하려는 무서운 죄의 유혹이 우리를 계속해서 죄에 주저앉히는 비극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탄식의 눈물과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의 말씀, 그리고 성령과 더불어 영적인 지도자의 의지, 거기에 동조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구체적인 신앙회복(운동이다)의 결단은 이 영적으로 어두운 현실을 이기고 다시 한번 소망을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 각자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능욕의 십자가를 이제 내가 지겠다는 각오가 함께 할 때 놀라운 영적 회복 운동의 물결은 점점 강해지고 확산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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