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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창 12:1~9 2000-09-03
같은 명령을 오늘 나에게 주신다면‥?  
9월달 신앙의 푯대 세움 말씀이 "구원의 도구로 회복"이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었던 아브라함처럼 구원의 귀중한 도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쉽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한다. 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야 같은 복을 받을 거라는 것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브람일 때의 믿음부터를 봐야하고 우리가 신앙의 사람으로서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동일한 명령을 주신다면 같은 신앙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는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우리가 이기적인 것은 믿음은 아브라함의 백분 일도 못되고 십분 일도 순종치 못하면서 받는 복은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더 큰 것들을 욕심 낸다는 사실이다.



Ⅰ.이 말씀을 받고 있는 아브라함의 인간 됨.



성경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됨됨이는 사실 별로 특출하지도 못하고 유능하지도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만은 고지식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함을 본다.



[1]태생(수24:2). 우상 장사[우르 불교 교구사]하는 데라의 집안 -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직업은 아닌 듯 하다(자라 오면서 보아 왔던 것은 우상을 사가는 사람들과 거래하는 아버지).



[2]인간 됨. 대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을 말할 때 그의 훌륭한 점들만 말하는데 오늘의 그의 그늘진 부분들만을 잠깐 얘기 해 보자.



①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나약함(처음에는 부분적인 순종이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b~4)



②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당장 또 애굽으로 내려갔다(v10).



③자기 목숨 살려고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속임)(11~13) 남에게 쉽게 내어주고 혼자 가슴앓이를 한다(졸장부).(14~20)



④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한 것이기도 하다. 자손이 많으리라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유혹으로 하갈을 통해서 후손을 보고자 하는 인간적인 방법을 받아들인다.(16장)



이러한 면에서 보면 정말 별 볼 일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면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의 조건은 분명히 아브라함보다 다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영적인 입장에서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다 접어두고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오늘의 사람들과 더불어 보는 것은 온유한 사람으로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같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신앙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았다. 주님의 주시는 은혜와 평안이 세상의 환경에서 받는 모든 스트레스를 압도할 만큼 컸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만 한가지 철저한 압력같이 작용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과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의 불만족이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우리의 스트레스가 이런 신령한 것이라면 얼마나 귀할까?



Ⅱ.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이 오늘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삶의 본거지를 떠나라!(현재의 자신의 보호 처를 버리라!)



씨족사회 족장시대의 "①본토[td,l,/m모레데트-탄생'(복수로는 '출생지'); 함축적으로 '혈통', '본국', 또는 '자손', '가족':-낳은, 태어난, 자식, 자녀, 친척, 본토의], ②친척, ③아비 집"은 우리가 오늘 "너는 부산 땅을 떠나라" 하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다. "너는 대한민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라!" 그러나 나(우리)는 이유 없이 "너는 당장 대한민국을 떠나라"는 명령조차도 어려울 것이다. "뭐 꼭 떠나는 게 신앙에 오른 것은 아닐 거야, 아마 하나님께서 너무나 나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것 같애, 아마 기다리면 다른 명령이 있으실 거야!"(민22:12, 19 - 발람)



2.하든 일을 중단하라!



아브라함은 요즘 말하는 3D 업종이 아니라 잘 나가는 장사를 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경우는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깊이 연구치 않더라도 바로 그 일은 아브라함의 일이었다. 그러나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안정된 일을 "당장 그만 두라!"는 말과 별로 다른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이 메소포타미아의 성격상 분명히 가업으로 계승되었던 것 같고 전통과 역사를 가진 이 안정된 일을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살길이 막막할 수 있는, 해고 정도가 아니라 정말 살아 남기 위해서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을 알고 생명의 피를 나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은혜를 듣고서도 분명히 신앙에 거리끼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라고 우리는 그 일을 그만 둘 용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만 둘 수 있는 사람은 담대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안정된 일을 버리라고 하면 과연 기쁘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아브람에게 주시는 명령은 분명히 이런 것이었다.



3.좋아하는 것들을 당장 중단하라!



당시 하브람의 시대에 삶의 오락은 가장 친근한 사람들끼리 이루어 졌다고 본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라는 명령은 유랑의 삶에서 더 이상 그러한 오락이나 기쁨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주문이다.



오늘 우리는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즐기는 것들이지만 기꺼이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폭력적이거나 우리의 욕망을 표출하는 저속한 것, 또는 음란한 것들로; 요즈음은 컴퓨터 game에도 참으로 그런 것들이 많다. 채팅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이고 하나님의 성도로서 결코 득이 안 되는 것들을 그만 두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오늘 어떤 사람들은 담배조차도 끊지 못하고 믿음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하나도 단절치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한 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주님 때문에 버린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또 컴퓨터 game을 그만 두라고 하면 오히려 "신앙하는 것하고 game 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못하게 하는가?"고 불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이런 저속한 쾌락에서도 우리를 불러내셨음을 믿어야 한다. 바울 사도께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믿는가?



Ⅲ.아브라함에게 주신 미래의 약속은 어떤 의미일까?(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지금 아브라함이 떠나야할 가장 현실 적인 것에 비교할 때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것들뿐이다. 오히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약속은 현재로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하란 땅에서 더 이루어지기 쉬운 것들이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의를 따라 상 주신다 거나 우리의 눈물을 씻기신다 거나 하는 것들은 너무나 머나먼 얘기들 같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더욱더 피상적인 것들이지 않는가?



오늘 신앙인들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사모하고 그것이 참 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평안도 기쁨도 상실한 어정쩡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당시로서는 너무나 피상적이고 안개 같은 얘기가 하나님의 약속이셨기 때문에 공수표가 되지 않고 사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성취를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확실한 약속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Ⅳ.여기에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자세를 오늘 나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4~8)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5)아브람이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8)‥‥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일단 떠나게 되면 의지할 이가 하나님밖에 없게 된다.



아브라함의 인간 됨도 조건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아름거리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처음은 그렇지 못했지만 점점 순종의 도를 높여갔고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러한 믿음의 본을 누구나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다.



오는 나는 과연 아브라함의 복을 희구하면서 그러한 순종과 응답으로 신앙하고 있는가? 존귀와 영광, 말씀대로 라는 고백은 입술로만 드려서는 의미가 없다. 순종과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오늘 나의 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