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20:19~23 2002-04-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그날 아침은 승리의 시작이었다. 슬픔과 실음에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은 이제 승리의 감격으로 울게 되었다. 이김의 첫날이며 생명의 첫날이며 영광의 첫날이었다.



그러나 이 영광의 날 예루살렘 다른 모처에서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한 남자들이 위와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그들도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다. 그 광명과 죽음이 정복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은 저물 수 없는 부활의 영광을 어둠으로 덮고 있는 부활의 영광 뒤에 가려진 전혀 다른 장면으로 빛과 어두움의 간격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이것은 오늘도 신앙의 사람들과 아주 다른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 예수를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항상 듣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비극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벽 하나의 사이에 두고 온 갓 두려움과 걱정에 붙잡혀 있었으며 주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를 점검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폈으면 한다.



저들은 분명히 흩어지지 않고 한께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은 의미도 생명도 기쁨도 없는 부담감만 잔득 느끼는 그야말로 도피의 한 수단으로서의 모임이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가지고 모인다고 하는 우리의 예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Ⅰ.왜 제자들의 모임이 이랬을까?(19f)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1.잘못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모인 이유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밖의 세상을 두려워해서였다.



①자신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생각하여 선생이 없는 상황에서 더욱 자신들을 박해 할 것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이러한 두려움을 해결해 보려고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잔머리들을 굴려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사실은 예전보다도 더 확실히 자신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해 계신 주님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밖에서 우리가 봐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사실 오늘 나 자신이 그럴 수 있다.



오늘 나는 주님을 만나는 예배를 위해서 왔다고 하면서 행여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도피하기 위해서 예배에 왔다면 역시 이 한심한 제자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오늘 나에게 '유대인들'은 없는가? 그것이 부모와 가족, 친척, 친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어떤 '일' 일 수도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대상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합당치 못하다.



②죄악 된 세상이 싫어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의 경건만을 생각하는 수도원(기도원) 주의자들의 모습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 즐거운 곳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속에 버려진 영혼들을 향하여 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나 혼자만의 경건을 생각하고 세상의 사람들을 외면한 채로 우리끼리만 모일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 죄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의 피를 흘리시고 오늘 나에게 너만 은혜를 맛보려 하지 말고 그들도 대리고 가서 함께 모일 것을 당부하신다.



③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인간적이고 세상 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사실은 이것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다. 우리의 태생 적인 바탕으로 가지는 두려움들이 신앙을 방해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주팔자, 액운, 징크스 같은 것들도 우리를 바른 진리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도 성경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풍속들이 우리 생각을 지배해서 주님의 보호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일들이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를 주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세상이나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해서 도피하기 위해서 약속을 멀리하고 모이는 모습들은 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주님에 대한 경외는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애로우시고 인자하신 사랑의 아버지로서의 경외가 있을 뿐이다.



2.단절된 모임이었다.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로 인하여 멸망 받아 마땅한 인류이지만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구원의 문을 아직도 닫지 않으신다. 천년을 하루 같이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그러나 우리는 이 제자들처럼 너무나 쉽게 세상과 다른 사람과 단절해버린다. 물론 사탄이 들락거리는 문이나 죄악의 문들은 걸어 잠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물들을 걸어 잠그는 것은 결코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를 잠가서 구속시키는 경우도 현재는 많이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제자들은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아걸면서 그들은 그날 아침의 영광 된 소식도 부활의 약속도 주님께서 전도를 위하여 주셨던 어두움의 세력을 제어하던 능력도 모두 단절해 버리다 보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도 단절해 버렸다.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우리가 모이면서 복음의 문, 교제의 문, 하늘의 문은 절대로 닫아걸어서는 안 될 문들이다.



제자들은 부활의 약속을 헤아릴 수없이 들었음에도 잠시 주님께서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모든 문들을 닫아걸었다.



오늘 우리의 모임에서, 삶에서 문은 열려 있는가? 누구든지 들어오도록 초청될 수 있는 천국처럼 모두를 용납하고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열린 삶이 되어야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Ⅱ.그럼에도 주님께서 찾아 오셨다.(19b)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실 문을 여는 것은 각 사람의 목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으로 문들을 꽁꽁 걸어 잠가 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주셨다. 닫혀 있었던 저들의 어두운 방에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변화된 완전한 빛으로 찾아 오셨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는 모든 잠겨있는 마음들에 억지로 들어오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계시록 3:20의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닫힌 방에 오신 이유는 분명히 다르다. ①주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직접 선택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②아직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③성령이 완전히 오시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등등, 분명히 오늘 우리의 상황과는 다른 이유들이 있으셨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 모든 것들이 다 주어졌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오셨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예배의 중심에, 우리 각자의 중심에, 우리 모임의 중심에, 우리 각자의 삶의 중심에 오셔야만 한다. 주님께 내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언저리가 아니라 중심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죄인이 의인으로, 사망은 생명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수치는 영광으로, 어둠은 빛으로, 눈물은 웃음으로 바뀌게 된다.



Ⅲ.주님께서 저들의 중심에 오셔서 회복해 주신 것들은...(19b~23)



(19b)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1]평강을 끼쳐 주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 '샬롬!, 샬롬!'



[2]말씀을 주셨다. "(20f)이 말씀을 하시고, (22f)이 말씀을 하시고"



[3]십자가(희생의 흔적을)를 주셨다. "(20m)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눅24:40)



[4]다시 사명을 주셨다. "(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5]성령을 확인시켜 주셨다. "(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6]사죄의 권세를 주셨다.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사면의 특권을 주셨다. 이 권한을 잘 못 쓰면 안 된다.



[7]미래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입을 영광을 보여 주셨다.(19b)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실 이런 것들이 없어서 공포와 단절과 슬픔에 가득했었는데 주님께서 회복 시켜 주셨다.



Ⅳ.결론.



주님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실 때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수없이 말씀하신 바 있다.(마16:21, 마17:23, 마20:19 등등)



베드로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빈 무덤까지 확인을 했지만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20:9) 예수의 죽으심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저들은 당연히 부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우리가 수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여전히 두려움과 우리들만의 단절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통로를 걸어 잠가 버린 채로 두려움과 근심을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괴로워할 수 있다. 우리의 예배도 세상이 싫기 때문에 단순히 도피처로만 생각하여 모일 수 있고 같은 고민을 가진 것 때문에만 단순히 모여있을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을 너무 의식하고 살다보면 더욱 그러하고 다른 사람들과 세상과 담을 쌓는 것처럼 단절하고 사는 열려있지 못한 삶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자신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처럼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고통을 단절하기 위하여 나를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연약한 저들에게 주님께서는 기쁨을 주셨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b) 제자들은 손과 발과 옆구리의 흔적을 확인하고야 기뻐했다. 주님의 희생의 십자가만이 인생의 참 맛을 잃은 인생들의 가슴에 기쁨의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희생을 확실히 체험한 자들만이 또한 자신도 희생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당시의 제자들은 너무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성령을 힘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하셨지만 오늘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상황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미 주님께서는 확실한 증거와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오늘은 우리가 분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총을 맞아들이시기를 원하신다. 불안에 떠는 제자들을 찾으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단절 속에서도 주님의 주도적인 긍휼과 은혜의 역사였음은 오늘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오늘도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고난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동일한 긍휼의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용서와 위로로 통한 평화를 우리 속에 넘치도록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



이 평강만이 세상을 이기도 죄악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우리의 유일한 도구이다. 이 평화의 약속을 충만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