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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17:22~31 2002-05-26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철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가운데서 당시에 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교훈 하던 아레오바고 가운데서 당시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시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빌어서 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를 꾸짖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실 철학이라는 것의 목적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최고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근본을 잃어버리고 인간과 사람을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을 바로 깨닫고 거기에 따라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흠 없는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Ⅰ.반드시 알아야 할 것(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하여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그래서 대상이 무엇이 됐든지 섬기려고 하는 것은 비록 범죄 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하나님 없이는 살지 못하는 특별한 성격을 사람들 속에 창조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범죄 한 인류는 그 섬김의 대상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대신에 다른 피조물들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 없는 사람이든지 지식이 많은 사람이든지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예외가 없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더 종교적인 것은 1세기 최고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부터 과학의 최첨단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같다.

또 문명국일수록 오히려 다신교적인 것을 역사 속에서 흔하게 보는 것들이다. 최고로 지혜로운 시민이라는 긍지를 가진 아테네 사람들은 신들의 이름을 붙이다 못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까지 제사하는 제단을 꾸몄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유일신교는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 같이 보이는 것 같다.

앗수르 왕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말하기를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왕하18:22) 저들이 보기에는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이 군사를 많이 거느리는 것과 같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신앙은 아니지만 그들은 '만약에 예수 믿어서 천국이 있으면 가고 다른 신도 믿어 가지고 손해볼 것은 없지 않느냐!' 하는 식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사람들은 바울 시대의 아덴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칭찬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신을 많이 섬기는 것보다 생명이 걸린 문제는 그 신이 참으로 사람을 도울 힘이 있는 참신이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위하고 섬기는 것으로 그 자신들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권력을 섬기는 사람도 있고 돈을 섬기는 사람도 있고 사람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가? 바울 사도께서 오늘 이 곳에 오셔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것 같고 너무 막연한 신앙 생활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마치 젓가락 한 짝도 못 드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을 수도 있다.

Ⅱ.나(우리)는 어디서 왔는가?(24~26)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우리의 출생은 곧 자신의 신분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어느 집안 출신이다." 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아무 지능도 없는 벌레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 역시 오늘 나의 가치 평가에 대단히 중요한 근본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렇다고 오늘 가문이나 파벌을 주장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27~29f) 고백되고 있다.

1.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생명과 필요한 모든 것은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누리지 못한다. 그럼으로 오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부요를 누리고 있다면 내가 능력이 있어 많이 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심은 범죄로 잃어버린 생명을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신의 형상을 가진 인류를 사랑하신다.

2.하나님의 지음 받은 존재...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자신의 창조자를 모르는 사람들만이 스스로 짐승의 후손으로 짐승과 같은 삶을 산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출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효자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출처를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뿌리를 바로 아는 것은 조상들의 영예를 위하여 삶에 경계를 갖는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했듯이 예수께서 동일하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22:32)라고 환기시켜 주고 계신 것이다.

3.생사의 권한을 가지신 분...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살고 죽는 경계와 삶의 범위를 결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시다. 살고 죽이는 권세를 쥐고 계시는 분을 외면하는 것은 세상에서도 어리석다고 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사람들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도 영원의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을 외면하는 것은 그야 말로 무지한 소치다.

특히 우리 신앙의 사람들 오늘 나됨이 주님 때문임을 생각지 못한다면 짐승같이 산다고 하는 불신의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이다. 바울 사도처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고백은 신앙하는 모든 사람의 입에서 고백되어져야 할 은혜의 찬양이다.

Ⅲ.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27~29)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이것은 오늘 "내가 어떻게 사느냐?" 라는 가치 평가가 되는 까닭에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시의 그리스 아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인류의 현재의 삶의 이유와 방법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기회로 있는 것이다.

1.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때...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 7~80에서 120년의 인생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바로 육신이 살아 있는 기간이라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때문에 영원의 문제를 해결치 못하는 인생은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실패한 인생이다. 믿는가?

하나님은 구만리 장천에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오늘 내가 호흡하고 있는 이 장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한다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을 향해서 도망가는 길에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창28:11),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17) 고백하는 것을 듣는다.

2.자신의 섬길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할 때...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오늘 내가 누구와 더불어 사느냐는 오늘 나의 가치의 결정이면서 미래에 대한 약속을 누린다고 하는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아직도 유치한 피조물을 신으로 위하는 어리석음이 있다면 참으로 무지하고 가련한 인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으로 신앙하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지는 경계다. 지금 나의 거처하고 있는 자리, 서있는 자리는 역시 바로 평가해야할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여러분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가? 하나님과 同居同樂 하는 삶이라면 적어도 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신다. "…야 네가 어디 있느냐?" 수치스러운 자리,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자리, 불만과 수치와 원망의 자리...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심판의 자리, 자라지 못하고 계속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 등등.... 오늘 나는 어디에 서있으며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

Ⅳ.나(우리)는 어디로 가는가?(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1.알지 못할 때, 듣지 못한 자들에게는 허물치 않으셨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것은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장래에 운명이 달려 있는 중요한 분석이면서 특히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지해서 그랬다 하더라도 이 모든 이치를 깨닫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나음은 무엇인가?

2.회개를 명하셨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일회적이면서 계속적이다.

3.심판의 날이 작정되어 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4.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심판의 두려움과 천국의 영광을 보게 하셨음으로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나는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아무리 천국을 사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거룩한 미래의 영광의 삶을 당겨서 살지 못하면 우리의 기대는 오히려 헛된 것일 수도 있다.

Ⅴ.결론.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 있다. 우리의 출처가 어디며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점검은 신앙인 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과제들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무디어진 자기 검진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