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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석
사 58:11~12, 히 11:39~40 2019-09-29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 : 성화  
본문:

이사야 58:11-12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서론

죄의 속성에 대해 에덴 동산에서부터 연구해 온 그래서 우리 인간보다 죄의 속성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탄은 우리의 생존 본능이 욕심이 되고 궁극적으로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비교와 경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 전반을 지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비교와 경쟁”의 원리를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도 침투시켜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교회와 가정까지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주 전에는 사탄이 어떻게 예배를 교묘하게 타락하게 했는지 보셨습니다. 먼저 예배의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 대신에 우상 숭배로 바꾸어 왔고, 심지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조차도 사탄의 기준 즉 세상의 기준으로 바꾸어 예배를 사람의 눈에 보기 좋고 예배의 형식으로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로 예배의 무너진 데를 보수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 주 전에는 고난(고통)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이 겪는 고난(고통)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또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지은 죄로 인해 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당장 어떤 고난을 겪고 있다면 그 이유는 나 자신의 죄, 자연재해, 타인의 죄, 사탄의 공격 등이 될 수 있으므로 판단하기 보다는 겸손함으로 회개하되, 죄책감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끝까지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히려 주위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격려하고 사랑하자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성화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성화라는 주제는 결국 의인으로 연결됩니다. 의인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여러 주를 이사야 58:11-12 말씀으로 이어왔습니다. 세상의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찾으십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찾으셨던 것,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으셨던 것,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았던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의 의인, 그리고 에스겔 22:30에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와 같이 의인을 찾으신 것이 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과 같은 의인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고 그 무너진 데를 보수하기를 원하십니다.



첫번째, 성화란?

두번째, 성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세번째, 성화된 자, 즉 온전한 자들의 모습



본문

첫번째, 성스럽다(HOLY)=거룩하다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표현으로도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겠지만, 거룩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만 어울리는 표현일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표현의 뜻은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구분되다”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벽하심, 사랑과 긍휼하심이 하나님을 그 외의 존재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는데, 오늘 보신 히브리서의 말씀에서는 또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39-40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도 가지지 못했던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도 완전히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만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전에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왜 계속 죄를 짓습니까? 마음 속의 여러가지 부정적인 생각, 더 나아가 절제되지 않는 말과 행동 때문에 괴롭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내 주위에 도저히 그 행동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같이 있기가 괴롭고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계속 짓는 이유는 죄에 대한 벌을 바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엇인가 나쁜 생각을 했을 때 하나님이 음성으로나 하늘에 나타나는 매로 즉각 저를 벌하신다면 저는 죄를 많이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의지를 억지로 꺽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스스로 그 과정을 이겨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꾸지람을 받고 매를 맞아서 억지로 순종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께 순종하기를 원하시기에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성장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왜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신약과는 달라 보이는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셨을까요? 우리가 갓 태어났을 때는 부모님이 먹이는 것부터 자고 입는 것까지 모두 챙겨 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부터 ‘나가서 차조심해라 사회생활에서는 어떻게 해라 기도해라 성경말씀 읽어라’라고 아주 사소한 것부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까지 “잔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민족들의 역사를 볼 때, 구약은 마치 성인이 되지 전의 자녀들에게 대하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훈육하셨습니다. 특히 출애굽 후 광야에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마치 어머니가 이제 막 유치원 초등학교 가기를 시작한 자녀들에게 건네는 걱정 가득한 사랑의 표현과도 같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을 거쳐 두 왕국으로 나누어지는 모습은 우리 자녀들이 사춘기를 거쳐 젊은 혈기를 견디지 못해 주위의 모든 것과 싸우려고 드는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아셨습니다. 그렇게 집 나가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 동안 기다리시다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다시 오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어른 대 어른, 성인 대 성인으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은 아들, 딸에게 같은 어른으로 말을 거십니다. 우리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갇힌 존재라 이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나의 한계를 깨달은 후에서야 그 중에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지요.

히5:12-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 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의 단위로도 계속 성장하기를 원하셨고 우리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계속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가 여쭈었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그 믿음의 영웅들도 받지 못했던 것 하지만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우리를 위해 오신 것, 그래서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리(요 3:16)라는 약속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두번째 소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 성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예수로 옷 입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3:27-29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1)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2)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찾아 주셨습니다. 먼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불가능 보였던 죽음까지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리스도로 옷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즉 심판의 날 우리 모두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텐데, 만약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이에 예수께서 서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세번째, 성화된 자, 즉 온전한 자들의 모습?

갈라디아서 5:22–23 (NKRV)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성화된 자, 즉 온전한 자들의 모습이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항상 노력하고 좀더 풍성히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성화된 자, 즉 온전한 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이 세상에 있는 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았고 주님 오시는 그 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가능합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 중에서 개인의 삶까지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인물은 다윗일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삶에 오점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부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더 나아가 그 여인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계략을 세웁니다.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살인을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영웅이 말이죠. 하지만 다윗이 사울왕과 달랐던 점이 무엇입니까? 다윗왕이 다른 이방 나라의 왕들과 달랐던 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았습니다.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고 그 댓가로 갓 태어난 아들이 죽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회개에 있습니다.



두번째, 심판과 판단의 차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 순종과 불술종을 반복하고 그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민족이 전체적으로 성장을 해 온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의 자신만의 믿음의 성장 과정에서 서로 다른 단계에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순종하지만 누군가는 매우 힘들게 순종하고 또 누군가는 순종한 후에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지만 또 누군가는 뜨거운 것보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신앙으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만이 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과 이 세상을 정확하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행동은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지 또는 더 성장을 이룰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기억하십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두 정확하게 심판해 주시리라 믿고 우리는 우리의 믿음 생활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와 같은 의인을 지금도 찾고 계신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