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엡 4:13~15 2020-01-05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성경은 교회를 유기체(有機體)적인 존재로 표현하여 생명있는 몸으로 비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엡1:22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4:15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로 우리 모든 말씀을 순종하여 거듭난 구성원들을 각 지체[고전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로 비유한다.

이 몸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런 이유에서 호흡을 하고 신진대사를 계속하고 생명을 위한 순환을 계속해야 한다고 봐야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자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라지 않으면 오히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을 계속 낳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의 육신적인 몸의 기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이것은 낡아가는 인간의 육체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연령(年齡)으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육의 몸을 가진 것처럼 신령한 몸이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그러므로 우리 육신의 성장은 한계에 이르면 성장을 멈추고 퇴화하지만 영적인 몸은 적어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또는 우리 각자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자라야만 하는데 오늘 본문은 그 장성해야할 최종적인 기준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13)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하는 삶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이르지 못했다면 완전히 성장한 것은 아니고 세상에서 아무리 거룩한 사람일찌라도 그리스도의 모습에까지 자란 사람은 없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의 성장은 그 한계가 없다고 본다.

이런 이유에서 아무리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고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도전의 과제가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올 한해는 이러한 우리의 영적인 성장에 좀 더 애써봤으면 해서 교회론이라고 하는 이 에베소서 말씀의 중심되는 내용을 가지고 신앙하고자 한다. 11절에 교회의 직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목적도 교회와 성도의 장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신앙 성장의 범위를 먼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습이 되어야 하겠지만 신앙 성장에 있어서의 태두리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신앙의 성장은 보이는 모습의 성장이라는 덕(德)을 위하여 사는 삶의 모습도 있겠지만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 바로 세워져야함을 가르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과거의 어떤 삶을 살았던 그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해 주셨기 때문에 묻지 앉고 따지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 주셨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분의 자녀들에게 성숙을 주문하는 부분이 많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성장을 7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5~7)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백성다운 모습이 나와야 한다는 당연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여겨진다. 우리 스스로 값을 치른 것이 없이 거져 구원을 받았으니 은혜이지만 과거의 주님을 알기 전의 죄악된 삶에 몸서리쳐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당연한 모습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육신적인 영광이나 형편이 좋아지는 것보다 영적인 부분이 나의 삶에 더 확대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앙의 성장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13f)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아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되어야 함을 당부한다. 먼저 각 개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이 이중적이지 않고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믿음의 내용은 지식적으로든 나타나는 행위이건 다르지 않아야 함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개인적으로 지식과 삶이 하나된 것은 전체 공동체 속에서도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여기 “다”라는 수식어는 [모든, 어떤, 온, 전체의, 만유, 만민, 매(일), 많은(것)]을 의미하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때 그것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13m) 물론 여기에 “이루다”라는 말은 완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성숙을 의하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결과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b)이다. “장성한”은 성숙(햇수, 또는 크기에 있어서), 나이, 키의 의미이고 “분량”이란 기준이나 척도를 말하고 “충만”은 완성, 가득찬 것, 완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기준에서 성숙하여 가득찬 것을 가르친다.

특히 여기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13f)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와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즉, 복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간편하게 정리하면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Incarnation, Crucifixion, Resurrection, Ascension, Second Coming]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다 하나가 될 때, 이 일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는 복음이 생명이 되고 복음을 위하고 복음으로 살 때 올바른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 역사 속에 교회는 상황에 따라서 이 복음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있었던 어떤 한 부분이 확대되고 더 귀중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고 그럴 때 교회는 자라는 데서 주저앉고 마는 경우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를 위한 치유 사역과 빈곤을 채우시는 부분 같은 것이 이런 것이다. 이것도 분명히 복음에서 무시 될 수 없는 부분이고 사실이었지만 복음의 바른 균형이 바른 성장을 가져온다.



Ⅱ.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성장해야 할 이유와 더불어 방해가 되고 잘못된 성장을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13:11)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3)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성장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때 사람들은 불쾌해 한다는 사실인데 오히려 장성한 사람이라면 어떤 말에도 불쾌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14f) 여기 “이제부터”는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때부터는 당연한 것이고 ‘더이상 ~아니다’ 바울이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그들 또한 온 갓 유혹이나 핍박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고 그들을 교훈하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바르며 귀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14m) 세상을 많이 산 어른들은 사실 속임수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속임수나 유혹에 약한 것은 인생의 경험을 많이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속임수 [κυβεία (κυβόϛ-정 육면체) 주사위를 던지다. 야바위, 놀음, 술책]” 주사위는 던지기 전까지는 몇번이 올라올지 절대로 모른다.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와는 반대로 세상의 변화무쌍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가르침을 주면서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살전2:3)고 세상이나 장터의 야바위꾼들의 속임수가 없는 순수한 가르침을 환인해 주고 있다.

“간사한 유혹”은 의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교활함이나 계교 같은 것을 의미하는 “유혹[πανουργί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여기에 “간사한[술에 취하다 μεθύσκω]” 라는 독특한 표현이 유혹이라는 말을 수식하고 있다. 장성한 사람은 절대로 술취한 것처럼 비정상적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b)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흔들리기 쉬운데 어느정도냐 하면 “요동하다[κλυδωνίξομαι]” 방향타 즉, 키가 없는 배를 의미하는데서 바람부는 대로 떠밀려 다니는 배를 의미하므로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바른 진리에 거하는 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요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머무를 때 머무르고 어떤 세상의 바람과 같은 물결이나 풍조에도 바른 방향을 찾아 갈 수 있는 한 방향을 향해서만 가는 사람이다. 결국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세상의 유행과 바람에 떠밀려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자라지 못하면 세상의 풍조에 흔들려 나아가야할 바른 신앙의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믿음은 자라야 한다고 당부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고 같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한번의 온전한 제사로 구원을 보장 받은 주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고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Ⅲ.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가 성장이 이루어져야할 토대와 최종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의 신앙의 목표는 다르지 않고 또 함께 해야 한다. 개인의 성숙이 모여서 교회의 성숙을 이루고 교회의 성숙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에 더하게 하는 생명의 잉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들이 자라갈 토대 즉, 바탕이 바르지 못하면 역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v13과 같은 말씀을 여기에 한번 더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v13과 다르지 않다.

여기 성장의 바탕은 두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15f) 첫째는 “사랑 안에서”이다.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안에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언제 들어도 감격이 되는 표현이고 주님 앞에 엎드리고 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놀라운 사랑의 선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역시 사랑의 절정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죄로 인하여 도저히 대면할 수 없는 나(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찾아 오신 그 사랑이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범주에서 본다면 미워할 대상은 마귀 사탄 외에는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는 사람조차도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신앙의 사람들이 장성해야할 첫번째 자리는 바로 이 “사랑 안에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먹고 살면서도 짐짓 옛 어두움의 습성으로 인하여 밤낮 참소하는 마귀의 속성에 더 익숙할 때가 많다. 신앙의 출발이 주님의 사랑이었다면 과정도 끝도 그 사랑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참된 것을 하여”이다. 사랑안에서 거짓을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는 “은혜와 진리”로 이해할 수 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적인 모습의 형태이다.

그럼에도 여기 앞에 강조되는 또 다른 표현은 “오직”으로 수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것 외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 이를 수 없다는 반대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장의 목표를 다시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b)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에서 봤지만 골2:10에서는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하여 모든 통치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비슷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도 요한은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1:5)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인용한대로 엡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하였지만 v23에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케하기 위해서라고 증거한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바로 앞의 v10에서도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 v15m에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의 성장은 어떤 것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범사에” 즉 모든 일에서이고 역시 최종목표는 “그에게까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목표를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사람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 전까지는 그런 목표를 가질 수 있지만 v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

올 한해는 우리 모두 신앙의 목표를 좀 크게 잡자.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가자.

자라지 못해서 세상의 바람과 물결에 요통치는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모든 권세와 임금들의 머리요 교회로 말미암아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사람을 목표삼지 말고 오로지 주님을 목표삼는 하늘의 사람들로 자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