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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딛 1:5~9 2020-01-26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참고 : 딤전3:1~7; 벧전5:1~4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장의 가장 분명한 모범이 성경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장로의 모습이다. 교회의 성장과 모습은 사실 신앙이 바르게 성숙한 사람들로 장로들이 세워져야만 하고 우리 교회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 서두에서도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5) 라고 디도에게 당부함을 본다.  장로는 그리스도의 3중직처럼 역시 3중직이라는 중요성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도를 본받은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 20:17~28에 나타나는 내용이나 오늘 인용하는 베드로전서5:1~4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V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πρεσβύτερος]들을 청하니”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ἐπίσκοπος]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ποιμαίνω-ποιμήν] 하셨느니라”(v28b) 벧전5:1f “너희 중 장로(πρεσβύτερος)들에게 권하노니…” v2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ποιμαίνω) 억지로 하지(ἐπισκοπέω) 말고”  ①장로[πρεσβύτερος]- elder, (나이 많음의 비교급) 더 늙은, 손윗 사람; ②감독자[ἐπίσκοπος]- overseer, bishop, 감독; ③목자[ποιμήν]-pastor, shepherd , 양치기, 목자. [반드시 복수(複數)]

왜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의 모습이라고 하느냐 하면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로 세워진 그런 장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과 방법에 의해서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분명한 자격과 역할을 증거하는 직분이 장로직이다.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다루는 목회서신신 이라는 디모데(딤전3:1~7)와 디도(본문)에서 각각 두 번이나 거론하고 함께 장로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베드로 사도 역시 장로의 모범을 제시(벧전5:1~4)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지도자인 만큼 영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격이나 역할에 있어서 육신적인 것보다 영적인 자질을 직접적으로 나열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을 제대로 갖춘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에 버금가는 신앙적 모습을 보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이렇게 분명한 자격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이것을 적용하지 않으므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직분을 가지게 됨으로 교회에 모범이 되지 못하고 당사자들 역시 스스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고 교만하여 스스로도 성장을 중단하고 교회와 하나님 앞에 안타까운 역할을 하는 모습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안의 교회들의 모습이다.

또 자격을 다룸에 있어서 ‘성경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순종할 수 없는 말씀을 주시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면 이 세상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좁은길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순종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말씀을 적용하거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말씀 그대로가 아니라 세상의 이치나 방법에 영향을 받아 적용하기 때문에 오늘 교회의 모습이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오히려 초라한 세상의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가려서 순종할 말씀이 아니다. 즉, 지키기 쉬운 것은 지키고 힘드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판단은 잘 못된 것이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도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9) 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메시야의 복음 완성과 함께 주신 계명의 지킴의 대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과 같은 율법을 구속의 역사가 완성된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렵지만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OT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에 들어갔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역시 예외없이 버림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역사의 기록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이다.

순종하려고만 하면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 하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순종하지 않고 거역한 자들은 그의 약속된 언약에 참여하지 못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OT의 율법조차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사람들이 이런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더라”(렘42:6)

특히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세우는 부분에서 더욱 그래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의 피를 값주고 사신 기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피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려울지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에 철저히 순종해야만 한다.



Ⅰ.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다.(6~8; 딤전3:1~3)

“(6)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1)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3:1~3)

우리는 이 장로의 자격들을 일일이 원문을 살펴서 나누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럴찌라도 여기에 거론되는 모습을 종합하면 그것은 완벽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판박이로 볼 수 있다.

①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표현이 3번씩이나 쓰이고 있다.(6, 7, 딤전3:2) 이것은 뒤에 연결되어 거론되는 아내, 자녀, 교우, 사회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비방거리를 전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미워하는 그의 적수들에게까지도 비방거리를 보이지 않으셨다. 심지어 나중에는 비방거리를 찾을 수 없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짓 증인들을 만들어 세우기까지 하였다.

②자기 자신을 부정해 버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7b~8)

v7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v8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짓은 하지 않고 이것을 한다’는 표현이다. v7의 내용은 자신을 비워버린 모습이다. ‘구타하지[πλήκτηϛ, 싸움을 좋아하는 자] 아니하며’ 할 때 물리적인 육신의 폭력뿐만이 아닌 언어폭력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말에 의해서 상하는 일이 많다. 디모데전서3:3f에서도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라는 같은 항목이 나타난다.

③그리스도로 인한 손해를 늘 감수하는 사람이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7bb~8)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3:3b)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5:2)

④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각오하는 사람이다.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벧전5:1m)

⑤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6) 라고 경계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상이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한 것이지만 세우는 전도자도 새로 와서 이런 중요한 직분을 급하게 세우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직 NT성경이 쓰여지기 이전에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의 시대에는 물론 성령의 바른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지금의 시대에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는 전도자는 대상을 말씀으로의 검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바른 판단은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당 기간 함께 한 교우들이 바른 판단이 가능할 것이고 그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일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도자로 주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집사직의 임직과도 다르다.

두번째는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면서 주변의 관계 속에서의 모습으로 옮겨간다.



Ⅱ. 가족과 교회와 이웃에도 모범임을 볼 수 있다.(6~7, 11; 딤전3:4~5, 11)

(6)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딤전3:4~5)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오), (11)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쳐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①부부의 하나된 경건을 요구하고 있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6f)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3:2f)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

②자녀들의 양육에서도 신앙의 모범으로 지도하는 가장(家長)이어야 한다. “…방탕하다 하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6b)”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오)(딤전3:4~5)

③모든 사람들로부터 경건을 인정 받는 사람이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7)  장로는 자신의 신앙과 모습뿐만 아니라 가정 전체의 모습이 교회다운 성결함이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이미 거론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적어도 교회 속에서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지적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비난이나 원망을 받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그를 좋아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로부터 본받고 싶어하는 신앙의 사람이어야 한다.



Ⅲ. 항상 미래 지향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이다.(딤전3:1; 벧전5:1b, 3~4)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딤전3: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3~4)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f) 초대교회시대는 오늘 우리 시대와는 다르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위험과 핍박이 있었고 그런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교회의 지도자 역할은 불가능했음을 사도행전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교회에 핍박과 어려움이 있을 때 맨 먼저 그것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장로들이었다. ‘이 21세기에 신앙하는 상황이 초대교회와 같다면 과연 사람들이 오늘처럼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하고 싶어할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비슷한 예로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공개처형을 당한다. 그럼에도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장보다는 하나님과 교회의 유익을 먼저 챙기는 일이야 말로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할 수 있다.

오늘과 같이 신앙 생활하는 것이 핍박을 받거나 제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육간에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면 바로 장로의 자격을 가진 것이라는 표현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f) 라는 의미이다.

장로는 진리로 가르치는 것과 함께 먼저 자신이 그 가르침에 “양 무리의 본이 되라”는 명령처럼 실천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교육이나 양육은 단순히 교리나 이념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전달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 모두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런 가르침이셨기 때문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 막1:22)고 효과 있는 가르침이 가능했음을 볼 수 있다.

장로는 이렇게 자신은 죽어 없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을 위해 사는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주실 미래의 상(賞)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경건한 모습이 오늘 제목을 잡은 것처럼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고 양 무리의 본이 되는 그리스도를 본삼는 삶의 모범이다.

문제는 오늘의 일반적인 현상이 이와는 반대로 미래의 영원속에서 받을 하나님의 상은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의 영광만을 찾으려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기대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b) 이것은 어려움에서도 불구하고 장로의 직책을 잘 감당한 일꾼에게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영광의 약속이다. 현재는 “고난의 증인” 즉 십자가에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감당해야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가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는 보장이다.

그 보장을 좀더 분명하게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4)고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희생의 모범이요 우두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을 것이라는 언약이다. 왜 ‘관을 주리라’ 하시지 않고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실까?  그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고난의 증인”으로 섬긴 보상(報償)은 직분의 충성여부에 따라 얻을 상급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표현보다 능동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귀한 직분을 맡았다고 하는 것 만으로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는 두려운 경고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유에서 최고의 성장의 모델인 장로를 우리 교회에서는 아직 세우지 못했다. 성경이 요구하는 선택과 자격의 어려움에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로부터도 비난받지 않고 모든 지체들로부터 본받고 싶어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모든 지체들이 이러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