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6:41~51 2020-02-0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그럴싸한 책을 썼다. 성경의 이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지만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삶의 이유와 활력을 묻고 있는 명제이다. 오늘 ‘나는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해 봄직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저물어가는 빈들에서 저녁 때를 놓진 5천명이 넘는 군중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배부르게 해 주시자 군중들은 오히려 엉뚱한 생각을 하게된다. V15에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라는 기록을 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영광이나 권력을 가지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사망에 종노릇하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만이 이 역사속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목적이기 때문에 이런 군중들의 마음을 이미 아시고 자리를 피하셨던 것처럼 영적인 이치를 육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셨다.

이러한 영적인 영원한 이치로 지난 번에 상고한 바 있는 v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자 저들 중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하고 서로 수근 거리고 저희들끼리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을 오늘 첫부분부터 볼 수 있다.

그때나 이때나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불신에서 건져낼 방법이 없다. 오늘 본문에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48) 라는 말씀을 육신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뒤에 가서 이들은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반문하고 있음을 다음 주에 좀더 구체적으로 나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고 순종의 자세로 주님께 오는 자들에게는 주님은 죄의 절망에서 자신의 피로 그러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말씀되신 자신의 삶 전체를 먹여 살게 하시는 진정한 양식이요 영원한 양식이 되신다.

세상에 최고의 음식이나 보약은 못 먹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넘치도록 믿음으로 먹고 영육이 건강하여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우리의 믿음이 장성하여(벧전1:5~7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마련하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



Ⅰ. 육신의 기준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지 못한다.(41~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이 되어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사는 불쌍한 인간군상들을 위하여 스스로 먹히기 위하여 짐승의 우릿간에 탄생하신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주님의 하시는 일과 가르침에 대하여 이처럼 수근 거리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41) 우리 주님께서는 당연히 하실 말씀을 하셨고 가르치셨지만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소화될 수 없는 음식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당당치 못한 표현임을 안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1:29)라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세임을 지적하고 있다.

언제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게 불평을 표현하는 모습이나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불평을 토하는 모습이 수근거림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수근거린다면 그런 행위는 신앙의 사람으로서는 합당치 못한 행동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될 삶의 자세이다.

v42에서는 그들이 수근거리는 이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역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모를 안다고 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에 보는 대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를 지적한다.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라면서도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마13:55~56f) 라고 빈정된다.

오히려 초라한 곳에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야, 개천에서 용났다.’라며 환영하고 좋아해야 할 탠데 죄의 속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즐거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하는 것은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13:55f) 막노동꾼의 아들로 생각해서 태생의 약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42m)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평가를 대개 그 탄생에서 찾는다.

항상 누구의 아들이 성경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성경에 [~의 아들]이란 표현이 무려 1,415회 정도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의 출처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막10:46)

반대로는 그 아버지가 경건했기 때문에 그 아들도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하는데 성경에는 이 역시 그렇지 못함도 본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핑계를 할 때도 그런 경우를 본다. “…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 안타깝게도 성경에도 이런 일들이 더러 나타난다.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의 아버지가 곧 그 아들은 아니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그러함을 성경을 읽는 사람이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 부모를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주님의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심의 도구가 바로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이지만 전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부모가 아니며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탄생의 진정한 신비를 모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하늘의 신비를 열어 증거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 부모를 안다고 하는 이 사실이 그들에게 하늘로서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막아 버린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f)

너무 맹목적인 것도 비극이지만 성경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이만큼 안타깝다. 대부분의 불신의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우리가 얼마나 큰 감사로 주님을 섬겨야 하겠는가!



Ⅱ.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43~46)

여기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주님께서 저들의 수근거림이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43b)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을 증거해 주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f)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귀중한 진리이지만 이 말씀 역시 어떤 교리로 한정해 버리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개인 개인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그리스도께로 올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말씀은 옳은 말씀이지만 잘못된 이해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교훈에서도 보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실 때는 아직 성령의 때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당연히 복음이 완성된 이후를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사죄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신 이후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고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동시적인 역사로 죄인을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초청을 받은 사람의 순종의 응답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다.

십자가에서 복음이 완성된 이후에는 하나님은 OT시대와 같이 즉, 율법시대처럼 절대로 강제로 사람을 이끌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이는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죄인은 이 역사 속에 없다. 비록 누구 때문에 성경을 읽고 교회를 왔어도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끌어 준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이끄심의 도구일 뿐이다.

다음 절은 이사야54:1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

인용된 내용은 바로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라는 말씀으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말씀을 배워야 하고 그 배운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편의 역할도 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6) 바로 앞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씀을 나눈 바 있다. 그러므로 OT에서부터 “…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뵐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독생하신 품 속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빌립에게 주님께서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b) 하신 것럼 “…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6b)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뵀으며 그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뵐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Ⅲ.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이다.(47~51)

이 교훈은 영생은 양식과 관련되는 생명의 요소이다.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하는 영생은 영원한 삶이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먹고 싶지 않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못먹어도 그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짐승에게는 그 짐승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먹이가 있어야 하고 사람의 육신도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물]이며 필요한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야 계속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삶에 필요한 양식이라기 보다는 영생에 필요한 양식이라고 선언하시는 중요한 부분으로 주님의 말씀을 육신적으로 듣고 이해하고 있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운 사람들에게 가르시고 계신 내용이 오늘 마지막 부분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 여기 믿음의 대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이내용 역시 앞의 v35에서 선언하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붙여서 말씀하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48)하시는 내용도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강조적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 않고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전에 먹었던 유월절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의미가 크다.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5:7b)

모든 제물의 중심은 하나님께 향기가 되도록 태워바쳐야 함을 레위기의 제사예식에서 보게 되는데 당연히 크 피는 제단에 뿌리게 되어 있지만 유월절 양의 독특한 것은 양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양을 먹을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나 내장을 제단에 태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피를 바른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남김없이 먹게 되어 있다.

그런데 먹는 방법도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출12:8~9) 날 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오로지 불에 구워먹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유월절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의 양식으로 먹어야 되는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여러가지 이해가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날것으로 먹으려 덤비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가지 양념을 더해서 물에 삶아 먹는 것 같은 모습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먹기보다는 그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움직인 다리만 먹으려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만 먹으려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애굽을 상징하는 이 세상을 탈출하여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순수하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해를 할 수 없는 군중들이었기 때문에 과거 그들의 조상들의 경험을 거론하고 계신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49) 이 말씀 역시 깊은 의미를 가지는데 육신의 양식도 하늘이 주셔야 먹는 것이지만 육신의 양식은 육신을 살게 하는 것 뿐이라는 가르치심이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50) 앞에서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하셨지만 여기 요점은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 “이는”이라는 대명사는 물론 하늘로서 내려오신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를 더욱 분명하게 못박으시는 말씀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사실 죽어 썩어진 것을 먹는 것 보다 살아있는 것을 먹은 것이 육신의 건강에도 좋다고 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더욱 산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이해가 아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51f) 이 보이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양식은 아무리 생체의학이나 과학이 발달하였지만 아직 찾아 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의 출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가능하다.

“살아 있는 떡” 역시 육신의 기준에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들의 혼란을 본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 전체와 그분의 교훈과 삶을 나의 것으로 먹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님의 날마다 기념함으로 먹으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b) 주님의 생명의 교훈의 절정이지만 이것을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혼란을 줄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마치 곰을 살려두고 계속 주사기로 웅담을 체취하는 것과 같은 있어서는 안될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기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경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죄인된 인류를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몰랐을 것이고 영생과는 관련을 영원히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역시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함이 없이는 이 거저 주시는 생명의 은혜는 생명되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영생을 위해 주어진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먹어야만 한다. 그분의 호흡과 삶과 역사와 모든 것을 다른 것을 조금도 섞지않고 전체를 남김없이 먹어야 영생을 살 것이다. 그것을 찾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응답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