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6:52~59 2020-02-09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많은 유대인들의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육신의 양식에만 집착해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육신뿐만 아니라 영생을 위하여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산다는 육신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주신 교훈을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산다는 주님의 가르침 앞에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혼란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죄에 대한 진노를 대신 감당하시고 그 희생을 (OT성경의 제사를 드린 후 제물을 먹듯이) 기념하라시는 당부가 없으셨다면 이러한 영적인 이치를 우리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이 귀중한 예배의 이치를 오늘 우리의 예배와 관련하여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사 후에 제물을 먹고 마시는 음복(飮福)은 우리 동양권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익숙해 있는 사실이다. 복음이 아니라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조상제사를 지낸 후에도 젯상에 놨던 음식과 부었던 술(酒)을 제사를 인도하는 사람과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으므로 제사를 마무리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가장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예배는 OT에서 그 수 없이 드려진 희생제사의 완성이고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공적인 예배와 우리 각자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에 대해서는 오후 모임에서 보충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이 없는 제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 드리는 예배(제사)의 제물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제물이 과연 무엇인가? ‘연보?’ ‘우리들의 몸?’ 아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제사의 예물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OT에서는 매회 제사를 드릴 때마다 바쳐졌지만 이제 우리는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을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신 주님이 이렇게 계십니다.’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이 예배이다

이러한 근거는 물론 히브리서 10장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2)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14)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매주의 첫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을 하나님께 기념하며 드리는 제사이면서 그것이 옆으로 나누어지고 계속 전하는 계승(繼承)을 주님의 재림때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죽음을 박차고 ‘승리하신 날’ 바로 부활하신 날에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예배를 처음 사도행전 교회에서 볼 수 있고(행2:42, 46, 20:1) 이 예배는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는 예배이다.

또 이런 이유를 분명히 이해한다면 ‘왜 예수님의 생일을 성경이 침묵하며 기념하지 않는가!’도 분명해 진다. 또 아무 행사에나 ‘예배’라는 이름을 마구 붙이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알 것이다.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속하신 제물로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로 거듭난 제사장된 우리들이 매주님의 날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예배이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슬로건을 내 걸었지만 가톨릭에 의해서 너무나 규격화된 성례를 거부하고 라틴어로 설교를 하는 것을 말씀으로 되돌리자고 하여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이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순종치 못하므로 ‘말씀 중심의 예배’랍시고 소위 말하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크나큰 실수이자 실패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는 매주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여 먹고 그 영적인 힘으로 나머지 엿새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다.



Ⅰ. 진리를 받거나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진리의 말씀이 내리는 곳에는 모든 것이 평정되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께서 천국 비유에서 말씀하신 교훈처럼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마음’들은 달라서 ‘길가’와 같은 마음밭이 있는가 하면 ‘옥토’와 같은 마음밭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꼭 같은 진리의 말씀이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반응이 다를 뿐만 아니라 열매도 달라서 감격과 기쁨으로 환영하는가 하면 이 유대인들처럼 다툼과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교훈을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위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3:14~16)

본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신앙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들임에도 정작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된 진리를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귀에는 소음으로 들리고 오히려 소란만 일으키게 됨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쉬운 표현으로 코드(code)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겉으로는 분명히 저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저들의 마음에는 이 세상의 주관자인 어두움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어서 진리를 진리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저들을 꾸짖으신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3~44)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주지 말라고까지 경계하신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분명히 저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시지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라는 표현으로 볼 때 혼란만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의 이야기이기 보다는 바른 진리가 생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분명이 주님의 생명을 가진 교회 속에도 이런 사람들도 있었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각자가 경성하고 깨어 회개해야함을 경계하시는 교훈이다.[딤전1:20 후메내오-(결혼에 속하는)와 알렉산더-남자 수비수, 딤후2:17 후메내오와 빌레도-(총애 받는, 인기 많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마치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주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4) 라고 되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적인 이치, 하늘의 가치를 세상의 가치로 이해하면 오히려 혼란을 느낄 뿐이다.

OT의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2f, 4)고 명령하신다. 성전문에 서서 이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거짓처럼 들렸을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세우신 성전일찌라도 그들에게 주님을 경외함이나 순종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곳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없다면 평안이 아니라 혼란이요 능력이 아니라 초라함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Ⅱ. 참 생명의 양식과 음료.(53~55)

이것은 사실이면서 상징이다.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을 들어갈 자들이 먹어야 할 유월절양이신 그리스도의 실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먹어야할 생명의 양식이다. ‘살’은 형체이며 모양이라면 ‘피’는 곧 생명을 말한다. 요한 사도는 1세기의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하여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2) 라고 증거하였다.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나셔서 사람의 삶을 친히 경험하시며 약 33년을 사셨지만 주님은 사람과 같은 죄를 짖지 않으시고 전혀 무죄한 삶을 사셨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는 유월절양으로 죄인되고 짐승된 인류에게 먹히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인류의 유월절양이시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분의 ‘살’이라하면 이 역사 속에 오셔서 사셨던 그분의 삶의 모두를 의미한다.

다음에 생명의 가장 귀중한 요소는 바로 피이다. 피가 의미하는 바는 생명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피는 홍수이후부터 율법속에서는 물론이고 복음시대까지도 먹는 것을 금하셨다.(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런 상황에 익숙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피를 마셔야 한다.’시는 주님의 증거에 거부감을 강하게 가지고 주님의 가르치심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고까지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바쳤던 짐승조차도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아담이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그 피가 영원히 살 수 없는 상할 수 있고 오염될 수 있고 썩을 수 있는 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이유에서 세상에서 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썩을 수 밖에 없으므로 그렇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생명의 피를 수혈 받아야 하는 한정된 생명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마시는데 피를 직접 마시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가지고 기념할 것을 명령 받았다.

아직 구속 사역이 완성되지 않은 복음서들에서는 “마시라!” 하셨지만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셨던 만찬자리에서 비로소 떡과 포도즙을 가지시고 기념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교회가 탄생한 후에 이 명령은 행해졌고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2, 46)

예배로 모이는 이유가 되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20:7f) 이렇게 계승되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이 고린도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어 이를 더욱 분명하고 바르게 가르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

그러므로 주님의 몸과 피를 직접 먹고 마시는 것이라면 한계가 있고 율법을 어기는 것도 되겠지만 주님의 만찬으로 먹고 마시는 기념설은 어떤 장소나 시간 속에서도 순종하려고만 한다면 가능한 주님의 사랑의 명령이셨음을 감사하게 된다.



Ⅲ.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삶,(56~59)

우리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이기보다는 항상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루어지고 지속됨을 가르치는 내용이 세번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같이 기도도 삶도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지속됨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주님 안에 거하고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교회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에서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안에 있고 영원속에 머물 것임을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 우리는 이 신비한 연합을 구하는 기도를 주님의 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 요한복음17장에서 본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17:21~23f)이라고 구속으로 이루게 될 신비한 하나됨을 확인하신다.

그럼으로 이 역시 십자가 구속의 완성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여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56) 라고 했는데 “거한다, μένω, 머물다,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는 말이 우리 육신을 비유하는 “장막[σκῆνος, 임시 거주지, 즉 상징적으로(영혼의 거처로써의) 인간의 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표현이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함으로써 육신의 삶과 영원의 삶을 구분하는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하셨는데 이 말씀은 앞의 v32~33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9~50)는 말씀의 반복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14:13, 15:16, 16:23~24f, 26f)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4:11m) 한 것처럼 그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구속의 십자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는 기록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먹으면서 그를 힘입어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사는 것이다.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하듯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영생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선언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인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거듭남이 없이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양식을 바르게 먹을 수 없다. 오늘도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면서 이 사실을 깊이 이해고하 감사하는 백성들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