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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6:66~71 2020-03-01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밤 낮으로 말씀 들으러 쫓아 다니던 군중들,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육신의 양식까지 기적으로 마련하시고 그 떡을 통해서 자신을 먹고 마셔야 산다고 가르치셨지만 그 긴 시간의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결국 사도라 일컬음을 받은 열 두 명이었고 그마저 한 사람은 부정적인 역할을 할 가룟 유다였음이 나타나면서 이 벳세다의 언덕의 영육의 풍성함으로 시작된 사랑의 역사는 안타까움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어쩌면 이 뒷부분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육신의 형통을 선전하면 기뻐하고 찬송하지만 정작 생명과 영생과 진리를 선포하면 어렵다고 불평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과연 이 역사가 접혀지는 마지막에 이 남은 제자들처럼 그야말로 소수의 사람만이 남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우려를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이집트에서 나온 20세이상의 장정 603,550(민1:46) - 갈렙과 여호수아 2사람; 물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이601,730명 (민26:51)]

또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처럼 부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절망으로 가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영생을 위해 남을 자가 누구인가를 개인적으로는 구분해 주고 있지 않다는 데서 역시 두려움을 갖게 되고 경성해야할 영적 삶을 당부한다. 물론 영적인 사람, 주님께 목숨바쳐 순종하는 사람들이 남겠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감정의 변화를 보면서 영성의 성장과 확실성을 키워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안타까움도 가진다.



Ⅰ. 떠나는 사람들,(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떠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런 헤어짐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과 바른 관련을 갖지 않는 어떤 단체나 그런 사람들과 헤어짐은 오히려 떠나감이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영원 속에서 탄식하고 후회할 헤어짐이 될 것이다.

“그 때부터” 라는 시점이 과연 ‘어느 때일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라는 부정적인 판단이 확대되면서부터가 아니겠는가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말이 더 쉽게 확산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죄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역시 세상의 물결에 떠밀려 다니는 인간군상들을 볼 수 있다. 제자들 중에 “그의 제자 중에서” 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베우고 따르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앞에서도 나눈바 있다.

어떤 경우에 오늘 날 진리를 증거하고 가르치면 사람이 많이 모일 것 같은데 이런 본문과 같은 과거의 모습은 오늘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죄의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주님께서 오히려 “떠나라!”는 명령을 주시기도 한다. 바울은 우상과 하나님과 구분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떠날 것을 당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고후6:17f)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불법한 단체에서는 떠나라 당부하신다.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b)

그러나 본문 내용처럼 주님을 떠나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라는 기록이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남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영생과는 관련을 잃어버리는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라는 비극을 보는 것이다.

최종적인 비극은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b) 그리스도와 생명이 단절된 모습을 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귀중한 교훈을 주신다.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b) 하였는데,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완전히 삶의 방향을 어두움으로 굳혀버린 상징적인 모습이다. 적어도 이런 절대절망의 비극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이나 사람들의 관계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의 삶마저 단절해 버리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우리 사랑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다. 결코 한 사람도 잃어짐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그럼에도 오늘 인간관계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접어버리는 사람들이 많고 세상 때문에 또 어떤 것 때문에 함께 삶을 나누던 생명의 주님과의 동행을 끝내버리는 안타까움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옳은 길로 다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이고 상급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b)

우리가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하지만 반대로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음은 적어도 없어야 한다.



Ⅱ. 떠날 수 없는 사람들,(67~69)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많은 군중이 기적의 떡으로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먹여 주기 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 삼으려했지만(15) 거절하시는 주님을 모두 떠나버리고 남은 열 둘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은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으로 들린다.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좀더 가까이 이해하면 ‘그래 모두 다 가버렸구나, 그러니 너희도 가려느냐?’ 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성미급한 베드로지만 이럴 때마다 주님께 위로를 드리는 모습이 역시 베드로 답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사람들의 평가를 확인하신 후 자신이 직접 택하신 제자들에게 확인을 하신 바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그럴 때에도 오늘 본문 같은 신앙 고백을 드린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여기 열 두 제자들은 당연히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열 둘(마10:1~4; 막3:13~19; 눅6:12~16)이 틀림없다. 주님께서 이들을 세우신 이유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에게도 “너희도 가려느냐?”시는 주님의 참담한 마음을 이해할만 하다. 결국 죄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더 이상의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떠날 수도 있음을 배우는데 이들은 더 이상 기적의 떡을 얻어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났지만, 영생에 관한 유익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끝날 수 없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주님곁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심정을 어느정도 헤아렸는지 모르겠지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이 대답 역시 자신이 했다기보다는 주님께서 그의 바른 신앙고백을 들으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셨지만 복음을 위해 안타까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아버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위로와 격려를 주셨다고 보여진다.

최소 장정만 5천명이 모였다가 12명; 그것도 한 사람은 쭉정이라는 사실을 아셨지만, 최소한 11명의 제자들이 남아 있는 것에서도 다음 주님의 반응(70)을 보면 기뻐하심을 본다. 또 거짓과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비율이 이렇게 차이가 많다는 것도 앞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베드로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라는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도 예배를 드리며 연보를 드리고 교회를 오고 헌신하는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이유는 죄로 인한 죽음의 절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대속의 은총으로 해결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면 이러한 출처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약속되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곳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라는 고백과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런 믿음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이 건전한 신앙의 사람이지만 오늘 이런 귀한 구호(slogan)는 오히려 건전하지 못한 종교들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의 어려움에 도움을 받는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이지 목적은 아니다. 진리와 영생이 분명하다면 그것에 삶을 드릴 수 있는 이 베드로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연이어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9) 이 말씀의 배열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다.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세상적인 이치는 ‘알고 믿습니다.’ 이것이 땅에서 난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나눈바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은 깨달음이 없을지라도 순종하고 나면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100%의 신뢰가 전제 되어야 하고 그래서 신앙이라는 표현보다는 “믿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말하면 믿음이라는 퍼센트는 당연히 100%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9) 이 말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거룩하신 자가 없음을 인정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런 입장에서 또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고백과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들린다.

이러한 고백은 주님의 사역 초기 가버나움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이 들렸던 사람에 의해서 먼저 고백 되어진 내용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눅4:34) 사람들은 몰라봤지만 어둠의 영들이 먼저 알아 봤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역사에 태어난 사람은 성경이 비록 의인으로 인정하는 사람(겔14:14, 20 - 노아, 다니엘, 욥)일찌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는 될 수 없다. 하나님 외에는 거룩하다는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성을 바르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바른 믿음의 사람이고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영생의 사람으로 남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제자된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경건한 사람’이고 표현한다. [εὐσεβὴς, 행10:2 하나님의 품성과 인격을 닮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9) 라는 고백이 사람에게 사용되고 또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믿음의 사람들이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거룩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여러분 모두의 믿음의 고백이되시를…



Ⅲ. 예수를 팔 사람,(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이 마지막 두절은 열한 제자들과 가룟 유다의 선택과 역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증거한 바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70f)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 라는 고백에 대한 답변이라는 데 의미를 둬야 한다.

언제나 우리 주님께서는 신앙적으로 확실한 고백 뒤에 이런 경계를 주고 계심을 보는데; 앞에서 언급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의 신앙고백 후에도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말씀을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m)는 다소 심한 표현을 쓰시기까지 하셨다.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에도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 막14:27) 하셨을 때도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라는 장담을 들으시고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말씀하시지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35)고 확인하였다.

이 사건후 겟세마네의 기도 후에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70f) 하신 것은 저들의 교만을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도 주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지나친 부분들이 더러 있고 심지어 하늘의 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확신이 지나쳐서 건전치 못한 종교단체를 만들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륜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경계를 실감하게 된다.

이 요한복음에서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하여 우리를 택하신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다면 신령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있어야 하는 의무감과 역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여기 덧붙여지는 말씀 역시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70b) 택하심이 다가 아니라 택하심을 받은 중에도 안타까운 대상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라고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심으로서 오히려 이것으로 모든 제자들의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셨다.

요한 사도가 오히려 여기에 대해 평가를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1) 이 서신이 모든 구원의 역사가 완료된 후 교회가 이땅 위에 탄생한 후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평가라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하나 경계되는 교훈은 택함 받았음에도 예수님을 파는 역할로 끝내버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경계이다. 물론 영생의 삶을 사는 경건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믿음이 단순히 이 세상 일들의 형통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너무나 쉽게 팔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팔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가룟 유다를 탓할바 아니다.

어쨌거나 벳새다의 아름다운 기적의 떡으로 시작된 주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안타까운 평가로 마무리 됨을 보면서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것을 주신 의도대로 사용되지 못하면 결국 은혜되지 못하고 생명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배우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의 귀한 교훈을 듣고 받았지만 자신의 물질적이든 명예적이든 이권이 사라지면 주님을 떠나는 얕은 신앙의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이유가 분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오로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라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 어떤 형편을 당하든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라는 고백과 감사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믿음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영생을 가진 사람이 분명하다.

영생의 말씀과 성령과 함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 받은 감사가 겸손과 인내로 믿음의 삶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파는 수치가 아니라 천국백성다운 삶을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과 우리의 주위에 드러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