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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1~~9 2020-03-08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7장에서는 이스라엘의 3대절기 중의 하나인 초막절 기간에 예수님과 육신의 형제들과 예루살렘에서 있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게 된다.

다른 공관복음들에서 절기는 유월절에 있었던 일들만 나타나는 반면에 이 요한복음은 남쪽 유다와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사역하신 내용들이 더러 나타므로 다른 절기에 있었던 주님의 활동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는 것들도 특징 중 하나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초막절과 함께 유월절은 더러 언급되지만(9번) 유대인들의 포로기 후의 절기인 수전절까지도 10:22에 언급되고 있다. 장막절이라고도 하는 초막절에 관한 내용은 레위기23:33~44과 신명기16:13~17에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디스리월이라고도 하고 에다님월(왕상8:2)이라고 하는 그들의 종교력으로 일곱째 달, 열 닷새날에 시작되어 8일 동안을 즐기는 그들의 3대절기 중에도 마지막 절기이다. 주로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 힘겨운 40년의 광야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물과 양식을 모자람 없이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절기다.

유월절이 자신들의 노예생활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뻐져나올 수 있게 하여 자유를 선물하신 역사를 기억하고자하는 절기였다면 초막절 역시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모래와 바위가 대부분인 광야에서 필요할 때 물을 주셨고 맛나를 주심으로 주리지 않게 하신 역사를 기리는 것이다.

이런 절기의 기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여 미래에도 그 능력의 하나님께 순종만 한다면 과거의 삶을 책임지셨듯이 앞길에도 역시 같은 은혜의 역사로 이끄실 것이라는 사실적인 교육이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어려움을 감당하면서 그보다 힘든 시간과 상황을 이기고 나온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때도 견뎌내고 살아왔는데…’라는 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숟한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그것을 견디게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확신한다면 어려울수록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 완성되므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엡2:15; 히7:18, 히10:9b) 기록된 것처럼 OT의 절기들은 폐해졌지만 의미는 계승되고 있다.

초막절 끝날에는 평상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번제단 주위를 축제를 위해 모여든 백성들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취하여(레23:40) 들고 다음 농사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간절히 구하면서 물을 길어다가 전제와 함께 부으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나중 v37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외치셨던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 두고도 확실치 않은 미래를 좋게 해달라고 소리지르는 축제 참여자들에게 자신을 선포하시는 내용이 이 말씀의 절정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초막절이 시작되기 전부터 주님을 불신하는 육신의 형제들은 주님께 출세하기 위해서는 묻혀있지 말고 이 초막절 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을 나타내라는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때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반된 모습을 보는데 여기서도 역시 하늘과 땅과 같은 다른 모습을 보게된다.



Ⅰ. 생명의 빛을 끄려는 어두움.(1)

이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나는 ~이다.” 라는 자기 선언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서론에서 말한 바 있지만 바로 앞에 봤던 6장에서는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다음 8장에서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고 10장에서는 [양의 문]이라, [선한 목자]라 하셨고 11장에서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시고 14장에서는 [진리요 생명]하시고 18장에서는 자신이 [왕]이라 하신다.

정선된 7가지의 이적도 바로 예수님 자신이 죄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과 동시에 이런 7번의 자기 선언 역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움의 세상에 생명이 선포되면 될수록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 사탄은 구속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싯점에서부터 끊임없이 그의 간교한 어두움의 지혜를 사용하여 막아서는데 그 도구는 오히려 당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긴다고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더 극성을 부렸음을 보게 된다.

이 요한복음에 유대인들이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하는 시도는 10번이상이나 언급되고 있음을 읽어볼 수 있다.(5:18, 7:1, 19, 20, 25, 8:37, 40, 10:10, 11:53, 12:10, 18: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러 오셨지만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시거나 헛된 충돌이나 가치없는 죽음을 원지 않으셨기 때문에 때로는 그 죽음의 자리를 피하기도 하셨고 기적을 배푸시고도 그 사실을 침묵시키시는 일들도 더러 나타남을 본다.

베드로 사도가 훈륭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도 오히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20)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마8:4m) 하셨으며 변화산에서 영광을 본 제자들에게도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마17:9b) 귀먹고 말 더듬던 사람을 고치시고도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막7:36f) 라고 기록되고 있다.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하셨지만 지혜의 주님께서는 쓸데없는 소모전은 어떤 경우도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 첫절에서도 다소 부정적인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1)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예정과 시간표에 자신의 삶을 맞추셨음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에도 복음은 전하셔야 했지만 어떤 경우도 자신의 원하시는 것을 하려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음을 모범으로 나타내셨다. 오늘 본문 v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라시는 표현도 그것이다.

시시 때때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뜻에 맞추시려고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셔서 갈릴리에 다니셨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주님의 모범도 본 삼아 살며 섬겨야 할 것이다. 어떤 어두움의 달콤한 속임수에도 속는 일이 없어야 하겠고 어떤 계획이나 결정을 함에 있어서 주님처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7:1) 라는 하늘의 가치와 시간에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는…



Ⅱ. 사람의 생각,(2~5)

예수님을 잉태하여 이 땅에 낳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 후에 상당 수의 아들과 딸을 낳은 것으로 성경에 나타난다. 그 형제들의 이름들조차 기록되고 있다.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13:55~56f)

그럼에도 같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도 믿지 못했음을 본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5) 이것은 비단 그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마찬가지였음을 본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나중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말씀을 전하신 후에 그들이 믿지 못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13:57) 하시기까지 안타까워 하셨다.

‘왜, 선지자가 자기 고향이나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할까!’ 그것은 당연히 그들이 그 선지자의 육신적인 삶 즉, 나고 자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나타난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2~3) 이스라엘의 큰 절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배에서 함께 난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은근히 부추기는 말을 한다.

사람도 많지 않은 이 시골구석에 있어봐야 봐주는 사람들이 없으니 큰명절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이적을 보이라는 것인데 어찌보면 예수님을 위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좋은 의도이기 보다는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평가하고 있다. 우리 말처럼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이 형제들의 권면은 육신적으로 보면 상당히 그럴싸한 말이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 예수님은 분명히 어느 순간에 세상에 나타나셔야 하는 분이지만 절대로 스스로 나타나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중 주님은 이 7:28에서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말씀하시고 8:42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올 수 밖에 없으셨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헤아리는 고린도 교우들을 향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라고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났음을 확인한다.

물론 앞에서 요한은 이렇게 난 사람들을 가리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를 육신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가장 안타까운 비극은 육신으로 안다고 하는 사람의 생각 때문에 영적인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의 이해가 먼저 깔려서 영적인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안타까움은 인간적이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귀하고 중요하다.



Ⅲ. 사람의 때와 하나님의 때.(6~9)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따르시는 것과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것을 원하는 대로 사용함을 비교해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주님 자신의 자세와 육신적인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세상의 반응을 말씀하시고 혈육의 형제들을 먼저 보내시고 아직 갈릴리에 머물고 계시는 모습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6f)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함께 청함받은 가나의 결혼식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딱한 사정을 마리아가 말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4) 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뒤의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 말씀하셨고 v30b에 역시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거나 8:20b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하셨다.

그런 다음에 드디어 때가 이르렀을 때에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하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7:1m) 말씀하시는 고백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철저하리만큼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표에 의해서 움직이시고 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헌신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구속의 역사를 모두 완성하신 후에 최종적으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묻는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라고 확인 시키신다.

이와는 반대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b)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승인에 관계없이 바로 행할 수 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1:7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도나 제자들일찌라도 이렇게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때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조차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4:4)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표대로 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들은 늘 바쁘고 급하다. 그래서 하늘에서 허락한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손해를 본다. 우리가 주님처럼 하늘의 때에 삶을 맞출 수만 있다면 사실 많은 실수를 줄이고 손해도 줄일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 어둠에 속한 세상을 빛되신 주님은 책망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아직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육신의 형제들에게 안타까움을 말씀하신다.

같은 세상은 그 빛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 역시 미워할 것이라고 조금 뒤에서 말씀하신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을 격려하신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우리가 주님을 순종함으로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면 오히려 복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f)

오늘 마지막 v8~9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했는데 율법 속에서 유대인 남자들은 최소한 1년에 3번은 성전을 올라가야 할 의무가 기록되고 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신16:16; 출23:14, 17, 34:22~23)

이스라엘은 이런 초막절 같은 종교적 의무에 의해서 집을 짓는 것 까지도 고려가 되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를 지어도 우리처럼 높은 일자형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초막절에 각 가구당 베란다(veranda)에 이 초막을 지을 수 있게 설계할 정도이고 현실적으로 그런 형태의 아파트를 지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 기록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형제들에게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을 것으로 말씀하시고 나중에 올라가시는 것처럼 보여 형제들에게 거짓을 말씀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아직”이라는 표현을 두번이나 말씀하심을 본다.(8) ‘아직 올라갈 때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라는 말씀으로 ‘명절이 시작될 때부터 많은 사람들게 자신을 나타내야 출세할 수 있다.’는 그의 형제들의 권면에 동의하지 않으신 것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계획과 시간 속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한 희생의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하셨고 데살로니가전서5:10에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같은 말씀을 쓰고 있다.

아담을 범죄케한 어둠의 세력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뜨리려고 온갓 간교한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실패했다. 그 마귀 사탄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다. 그럼에도 절대적은 권능과 능력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가 사람의 생각이나 나 자신이 하고 싶은 때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나 방법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께서 철저하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