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7:10~18 2020-03-15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지난 주에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 말씀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던 주님께서 명절 중에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예루살렘에서도 이미 주님에 관한 관심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상장히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절에 참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고 유대인들 역시 그 가르치심에 놀라 자기들끼리 나름대로 평가하는 모습들도 기록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12b) 그럼에도 이런 논쟁조차도 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수근거리는 형태로 주변을 의식하는 조심스러운 모습들이었음을 요한이 증거하고 있다.

자신들처럼 공개적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배운 적이 없다고 판단되는 주님의 가르치심의 깊이에 더욱 놀라고 이러한 저들의 반응에 주님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교훈이 결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영적인 귀중한 교훈을 주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유대인들의 혼란 속에서도 여기에 분명한 기준을 주고 계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여기에 대한 해답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는 것이다.



Ⅰ. 사람들의 진리에 대한 평가,(10~13)

바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희생의 역사를 감당하실 시기가 차기 전까지는 자신을 들어내지 않으시고 은밀히 행하셨음을 더러 볼 수 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내용으로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42:2) 하였고 이를 또한 마태가 인용한바 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9)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10) 주님은 무한히 영광스러우시면서도 그 영광을 감추어 두시는 겸손과 조심성을 함께 나타내신 것에서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러한 주님의 자세와는 다르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는 이단자라고 생각하지만 들어내어 말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11)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막절 축제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주님께서 나타나 또 어떤 일과 가르침을 베푸실까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가지 입장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가 된다. 부정적으로는 유대 종교집단에 어떤 위해를 끼칠 것인가 하는 우려와 이적을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저들에게 어떤 진기한 볼거리인 이적을 베푸실까 하는 양면의 우려와 기대가 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이 바로 다음 절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12) 어찌보면 정치적인 색체가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나 정치적 지도자로 보는 입장에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반응조차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은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3)는 표현을 보는데 사실 판단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또, 생각과 현실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황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한 것처럼 9장에서도 나타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거나 말하면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요9:22)는 분위기에서 짐작이 된다.

분명히 좋은 사람이고 그들이 오랬동안 기대하던 예언된 메시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인 지배세력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속에 가진 생각을 적극적으로 들어내지 못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누다가 들키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부류다.

또 다른 지도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대사회에서 지위나 존경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 백성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위치를 잃지나 안을까 하여 자신들이 부리는 사람들조차 입단속을 하고 백성들의 웅성거리는 민심을 수집하면서 바짝 긴장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12b) 이 반응이 바로 그런 두가지 사람들의 평가였을 것이다. 사실 유대사회의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은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던 것으로 복음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막1:22)는 내용들에서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가르치면서도 삶에 있어서는 전혀 모범이 되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어쩔 수 없이 복종은 하였지만 OT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속히 나타나 그런 이중적인 지도자들을 처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회복된 메시야 정치를 기대하는 것이 당시의 대부분의 국민들의 바램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현실을 견뎌가는 사람들은 그런 당시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환호하고 기뻐했지만 현실의 상황에서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당연히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13)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보다는 적은 수였겠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12b)라는 반응은 당시의 모든 기득권을 가진 지도자 계층의 사람들로 어느 사회나 이런 서로 다른 반응은 있는 것 같다.

어떤 시대나 상황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누리는 사람들을 기득권세력(旣得權勢力)이라고 하는데 그들 소수만이 좋은 것을 나눠 가지기 때문에 힘겹게 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구조가 바껴서 좋은 것들을 나눠서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문제는 이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층의 사람들이 온 갓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들의 가진 것들을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런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고 이것이 바로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지배하는 죄가 더 힘이 있는 세상이다.

부패한 정부에 대하여 한 때는 저항하고 피해를 겪으며 그것을 바꿔보려고 애쓰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달라지리라는 기대를 가져보지만 그들이 실세를 잡아도 과거의 모습과 다름이 없는 것은 사람들의 죄성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사모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12b) 죄악의 세상에서는 진리에 대한 평가가 절대로 바로 될 수 없다. 불변하는 진리는 진리 자체로 평가 되어야 하지만 죄의 사람들은 다만 자신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또는 유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이런 세상적인 가치로는 절대로 진리를 바로 판단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세상의 사람에서 죽고 거듭나 절대적인 진리이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 삼아 죽으심으로 우리를 이러한 죄아래서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Ⅱ. 사람들의 진리에 대한 놀라움,(14~15)

초막절 기간은 일곱째 달 열닷셋날부터이지만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는지는 언급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 라는 것으로 봐서 어느 싯점이 되었든지 주님께서 기록된 대로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회당에서 가르치”시거나(마13:54), “바닷가에 나가서 가르치”기도 하시고(막2:13, 4:1),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막6:2),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눅19:47)” 것처럼 초막절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는 당연한 일상이셨다.

그럼에도 이러한 가르치심조차도 저들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분명히 달랐음을 그들의 반응에서 보게 된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15f) 왜, 유대인들이 놀랐을까! 그것은 산상보훈을 가르치신 후의 군중의 반응과 같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여기에 “권위 있는 자”라고 하는 “권위[ἐξουσία, 힘, 재능, 능력]”는 앵무새처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 자체가 듣는 사람이 순종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진리를 흉내내는 것 같은 것의 차이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b) 이 반응 자체가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되신다. 그러므로 이 창조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보이는 것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들을 보함해서 보이지 않는 생명과 지혜와 지식의 창조도 포함되는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사람은 반드시 듣고 배운 것을 알 수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이시다. 그런 이유에서 소로몬은 잠언9:10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시111:10) 선언하였고 다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고 교훈한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의 근본이신 분을 향하여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놀라고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오신 진리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거듭나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요14:17)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신비한 역사가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에 대하여 직접 말씀하신바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f) 진리는 그 자체로 놀랄만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변하지만 변할 수 없는 것기 진리이기 때문이다.



Ⅲ.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16~18)

유대인들로부터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b)는 의구심을 보신 주님께서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의 출처에 대해 설명하시는 부분이 오늘 마지막 부분이다. 물론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b)는 저들의 반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당대의 학식있고 존경받는 훌륭한 랍비에게서 사사를 받은 즉,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는 반응이다.

거기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말씀하신다.

바울 사도도 나름대로 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공부를 했다는 것을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성도들에게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연보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힌 자리에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행22:3f) 라고 증거한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적 교훈이 사람들에게서 넘겨 받았거나 배운 것이 아님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 증거하는 교훈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하는 표현이다.

누구든 제자는 스승을 자랑하고 훌륭한 선생의 제자일수록 자신보다는 자신의 스승을 높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실 그들이 존경한다고 하는 스승을 세상에서는 갖지 않았고 또 배울 필요가 없으셨다.

그럼에도 주님의 가진 교훈이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여전이 이것에서도 하나님을 자랑하심을 본다.

예수께서 12살 되셨을 때 유월절에 부모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일행중에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잃어버렸음을 알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되돌아가며 찾았을 때도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눅2:46~47)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다음에 우리의 중요한 오늘의 제목으로 선택한 말씀을 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교훈인지 아니면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려면 그 말하는 사람의 자세를 통해서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판단은 오늘도 여전히 진리의 교훈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하는 가운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교훈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도 어려운 점은 있는데 그 판단 자체가 요즘 말로 콩깍지가 씌어진 상태라면 그 사람의 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맹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객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신앙에 있어서의 객관성은 또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쉽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건전하지 못한 상태에 한번 깊이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판단에 대해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 눅6:43~45)고 말씀하셨다. 역시 열매는 단기간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판단하는데도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지침을 주신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아무리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스스로 말할지라도 그의 말하는 것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나 반대로 보내신이의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말하는 자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분명하다는 말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그러셨다. 오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제가 제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해도 좋다는 의미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이 말씀은 그 전하는 자가 불의한가 의로운가의 기준이기도 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불의한 자를 일꾼으로 보내실리 없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이름을 도적질해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거짓된 일꾼들도 분명히 있다.

세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나 진리에 대한 반응은 자신들의 입장이나 이권에 의해서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신 그리스도나 진리는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로 진리기기 때문에 사실 세상의 기준에서 판단받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진리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역사를 사람들 속에 일으킨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견없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놀랄만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요 기적이며 생명을 끼칠 수 있다.

오늘 증거되는 이 메시지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듣는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와 각오로 말씀을 듣는다면 제 스스로 말함인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 것인지 판단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바른 판단과 이해로 영적인 혼란이 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섬김으로 진리와 거짓을 넉넉히 구별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풍성함을 넘치도록 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