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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19~22 2020-03-22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다로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모두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약속을 해도 무엇인가 보이는 약속을 얻어내려 하기 때문에 종이짝 한장이라도 증서를 받아야 안심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을 쉽게 [빙산의 일각]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보이는 뒷면에는 보이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이 버티고 있다. 현재 치르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쟁이 보이는 전쟁이 아니지만 세상은 1~2차 세계대전 못지 않는 공포를 가지고 불안해 하고 있다.

그렇다, 나타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보이는 것 만으로 판단하지 말라 당부하신다. 성경은 오히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가르친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말씀하는 것이다.

오늘 주시는 말씀도 자신에 대해 신기해하고 어떤면에서는 기대를 가지면서도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직접 지적하신다.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이나 이적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이 분명함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나 교훈을 보이는 것에서만 아는척하고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경계하신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 역시 내면의 진리를 찾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겉에 나타나는 것으로만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신다. 사실 이것은 그때 그 유대인들이나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자세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보이는 것들보다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내면적 교훈이 더욱 중요한 것을 유대인들이나 오늘의 신앙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같은 실수는 반복되고 있다.

예수께서 앞에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가르치신 내용도 그런 이해가 없이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실로암 못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는 것(5장)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는 물론 올바른 선지자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보이는 안식일의 규례보다 중요한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저들에게 율법의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사실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심을 본다.



Ⅰ. 빛 앞에서 어두움의 반응,(19~20)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여기 두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의 간의 소통이 안되는 가장 극명한 간격을 보이고 있다. 분명히 같은 종교와 민족 같은 나라와 문화권에서 났음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 원인은 바로 빛과 어두움의 매우 분명한 차이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주면서 귀한 약속을 주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 다시 이 율법의 결정판인 신명기서에서도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공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6:25) 증거하였다.

이 두 곳의 말씀의 핵심은 ‘율법과 언약과 말씀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셔서(요1:11) 보신대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19f) 말씀하신다.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하신 것은 한 사람도 주어진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탄식하신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았으면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할 당시의 유대인들은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격으로 거기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회만 되면 죽이려 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19b)

이미 저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시며 말씀하시는 주님께 한마디로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모습이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 자신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리하신 판단에 완전히 딴전을 부리는 모습으로 뒤집어 쒸운다.

자신들의 마음을 들키자 오히려 엉뚱하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신들린 헛소리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마치 바울이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앞에 복음을 전하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b)고 소리지르는 베스도와 같다. 물론 여기에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5) 라고 변명하였다.

적어도 사람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에 대해 ‘귀신이 들렸’다는 표현은 그들이 얼마나 겁없는 사람들인가를 표현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의(義)에 담대하지 못하고 죄에 담대한 이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b)거나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고 당부하고 있다.

앞에서 분명히 출애굽19:5을 인용한 내용에서도 봤지만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될 수 없는 복이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바울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감격하지만 잘못된 그들의 불신과 맡은 바 특권인 말씀을 행하지 않는 반응은 비극이었다.

진리는 그것을 듣고 행하는 자들에게 무한한 자유와 평안과 자긍심을 주지만 그것을 받았다는 특권 하나 만으로 그것을 행하지 않는 반응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같은 비극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바른 반응은 그 진리를 귀중한 것으로 받들고 행하는 것이다. 그럴때만 비로소 그 진리의 보호를 누릴 수 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는 사람들은 같은 빛에 속한 사람이라면 쓴 소리라도 환영하고 기뻐하겠지만 반대로 어두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외면하고 변명하고 대적할 것이다.



Ⅱ. 주님의 안타까움의 증거,(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시는 [한가지 일]이란 앞의 5장에서 실로암 못에 38년을 누워있던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실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 사건을 두고 시비를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이러한 이적을 행하셨고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치료된 날이 안식일이 이었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났지만 예수님께 올무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5장에 돌아가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5:8~10)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정작 치료받은 이 사람은 자신을 고친 의사가 누군지를 몰랐다가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b)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요5:15~16) 이렇게 발단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일 때문에 다시 장막절에 성전에 올라오셔서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일을 근거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당시까지 없었던 큰 이적을 행하신 주님이셨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몰려들었고 그런 사실에 위기감을 느낀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가 아닌데 자신들의 텃밭인 성전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이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눈에 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이런 생각조차 이미 읽어 내시는 주님을 속마음으로는 겁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글자로 주어진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되지 못하면 생명과 영생이 아니라 멸망과 지옥의 자식들이 될 수도 있다.

분명히 율법에서 안식일의 계명은 대단히 엄격하고 지나칠 정도다. OT의 율법에 안식일의 언약이 상당히 많이 기록되고 있지만 대표적인 말씀이 출애굽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라는 말씀을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문자화된 그 계명보다는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하셨다.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걸어가며 배가 고파 밀이삭을 따서 비벼먹던 제자들을 시비삼는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해 주셨다.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다음 항목에서 좀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지만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이런 글자에 메인 성경이해를 그런 이유에서 경계하는 것이다. 마치 받은 편지를 글자 한자 한자를 따지는 것보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지만 이런 표현조차도 성경을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이런 뜻이다 저런 뜻이다 논쟁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쓰게 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주신 계명과 말씀을 가장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비결이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 자신들의 학식이나 세상적 지혜가 아니라 성경을 쓰게하신 성령님의 인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를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비우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오늘의 과제이다. 그렇게 될 때 기록된 성경이 이상하지 않고 우리의 삶의 지침이 됨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안식일의 목적,(22~24)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이유없이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반드시 필요를 위해 법적으로 정해 주셨고 그것은 궁긍적으로는 그 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율법이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물론 율법에는 당시의 사회적인 인간관계 속에서의 법이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바르게 유지하며 살게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이것은 복음 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22f) 사실 율법 중에 어떤 것들은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 이전에 이미 족장들에게 주신 법들이 더러 있었는데 오늘 거론하는 안식일이나 할례의 언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안식일의 최초의 언급은 이 세상의 창조를 완료하신 바로 직후였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3)

그러나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주신 언약이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17:10~11) 라는 말씀과 함께 v14까지 계속되는데 이 언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좀 더 가까운 언약이었다. “…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13b)

그런 다음 이삭이 날 것을 예언하시고 v23에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라고 기록되고 있고 마지막 v26~27에는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오늘 본문 v22b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기록되어 있고 연결되는 23f에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이라는 말씀은 두 법 중에 한 법이 다른 법에 의해서 범해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분명히 이해된다.

어찌보면 안식일의 법이 성경에서는 먼저 언급되었는데 나중에 아브라함 때에 주어진 할례의 언약을 지키게 하려고 이 먼저 재정된 안식일의 언약을 어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낳은지 팔일째 되는 날에는 할례를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 때부터였다.(창17:12; 레12:3) 그런데 그 팔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일찌라도 할례의 언약은 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짐승에게 조차도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철저한 휴식과 하나님 섬김을 명령하셨음에도(출20:10; 신5:14) 할례를 하는 일은 물론이고 제사장들은 그 안식일에 할 수 없는 규정된 일을 성전에서 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12:5; 민28:9~10)

예외 조항들이 더러 나타나는데 그것은 적어도 생명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안식일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면서 예를 드시는 내용을 보면 “…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마12:11) “…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14:5) 말씀하셨는데 반대하지 못하는 것을 봐서 이런 전례는 지켜져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안식일이라면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23b) 말씀하시는 것에 역시 저들은 잠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본다. 주님께서 심지어는 율법적으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과 일행이 굶주릴 때 먹었던(삼상21:6) 예까지 들어서 안식일의 정신을 저들에게 교훈하셨다.(마12:3; 막2:25; 눅6: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노동의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안식일을 법으로 못밖아 안식일에는 짐승에게까지도 일을 시키지 말 것을 명령하셨지만 유대인들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로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안하는 나타나는 일만을 가지고 38년동안이나 중풍병에 잡혀있다가 치료된 이 놀라운 일에도 박수를 쳐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신앙이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임에도 많은 성경을 믿는다는 종교들은 사람들이 만든 계율속에 가둬 버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는 인생들을 초청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다.

오늘 우리가 과연 나(우리)를 위해 대신 죄의 저주를 감당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주신 유쾌함을 신앙으로 누리고 있는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새롭게 되는 날-개정]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한글)

이러한 오해의 종교에 잡혀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죄인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원의 귀한 약속을 기록해 주신 성경이 오해되고 악용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못하면 그들이 비록 성경을 믿는다 할지라도 빛의 생명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추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미 자신들의 틀에 맞토록 성경을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안타까우셨음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타난 현상이나 문자보다는 그것을 주신 이유와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주님께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도 이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고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주님께서는 절대로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신 계명과 교훈들 모두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만한 교제를 위해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보이는 어떤 글자, 문장 한구절에 또는 나타난 현상 한가지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주신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도 중요하지만 그 성경이 우리 모든 인류를 죄에서 자유케하여 자신과 행복한 교제를 위한 것임을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