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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25~30 2020-04-05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오늘 내용도 부정적인 내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사람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다 알려진 사실임에도 공공연히 성전 같은데 나타나셔서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자체가 신기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출처를 아는 것 때문에 참으로 이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영적 사실을 볼 수 없었고 주님께서도 이를 안타까워 하신다.

오늘 제목이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28m)이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아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 세상에 온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주어진 인생이 많이 힘들면 자신의 태어남을 원망하는 것도 본다.

욥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욥3:3~4)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욥10:18) 탄식한다.

안타깝게도 위대한 선지자라고 일컫는 예레미야도 자신의 생일을 안타까워 함을 본다. 20:14~18에서 생일을 탄식하는데 첫절인 v14과 마지막절인 v18만 보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라고 탄식한다.

물론 예레미야는 자신보다는 고국 유다의 범죄로 타국의 포로가 될 수 밖에 없는 형벌 받은 나라이지만 회개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하는 하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스스로 탄생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뻔했다.’ 라는 사람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14:21b)고 안타까워 하심을 본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30세밖에 못 사실 운명을 알고 계시면서도 자신의 탄생이 보내신 이의 뜻에 의해서 오셨다고 우리와 다름을 본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28m)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온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자신의 탄생의 가치와 이유를 소망적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함을 배운다.

오늘 이 말씀을 다루면서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왜곡된 판단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고 가실 자신의 탄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하고 고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우리 각자 역시 이 역사 속에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을 위해 탄생했다는 보다 가치있고 높은 차원의 이해를 우리 각자에세 확인하는…



Ⅰ. 어떤 사람의 판단,(25~26)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앞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 하였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려고 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병패이다. 자신들의 계획이나 뜻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모습과 국민을 핑계대는 것은 다르지 않다. 다만 자신들은 다치지 않기 위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려는 권모술수는 정치라는 좋은 도구의 잘 못된 어두운 면이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25)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라는 표현이 참 많이 쓰여지고 있다. 과거 [개역한글]에서는 ‘혹이’ 라는 표현으로 번역이 되었었다.

어쩌면 이 표현은 당시 예루살렘의 사람들의 조금은 일반적인 의견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의 무리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일반 대중의 의견을 가진 그래도 조금은 객관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이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아니냐”는 물론 그들이 제거하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만큼 이러한 분위기와 사항을 대중 모두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요한의 표현이기도 하다.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26f) 성전에 올라오셔서 장막절 축제에 온 군중들을 가르치고 계신 주님을 그들이 ‘왜, 잡지 않고 두고 보는가!’ 하는 것이 일반 대중들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추측하는 생각이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26b) 결국 일반 대중이 주님을 메시야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반대하고 죽이려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조차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의 평가는 당시 일반 대중의 평가를 대신하는 것이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막연한 [어떤 사람]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OT성경 두 곳의 말씀을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였고 솔로몬도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잠4:8) 증거하였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는 이름없는 겸손으로 섬겨야 하겠지만 [어떤 사람]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말씀을 순종하므로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함으로 그 영화에 참여하는 삶이 바로 영생의 삶이요 천국의 삶이다.



Ⅱ. 보이는 것으로 인한 오해,(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우리는 이미 앞에서도 영과 육신의 삶의 모습들을 상당부분 나누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아는 것과 그의 이름으로 일컫는 교회나 사람들을 단순히 육신적인 이해나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이해와 관계를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27f) 이 역시 주님의 제자들의 고백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일반적인 대중을 대표하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표적 중에 표적이요 이적 중의 이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애는 나타나는 것 보다는 사람들에게 감춰진 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 라는 예언을 들은 바 있었다.

이 [어떤 사람]이 말하고 있는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27f)는 이야기는 사실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단순히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정도로 알았을 뿐이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셨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이라면 이 사람은 오늘 우리만도 못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고 나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어떤 사람처럼 막연히 주님을 알고 대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b) 이 내용은 사실 성격적이지 못한 내용으로 말라기 선지 후 암흑기라고 일컫는 중간기 때에 외경에서나 나타나는 내용이다.

이미 OT성경에 예언 된대로는 미가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되어 있고 나중 이 7장 바로 뒤에 나타나는 v42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내용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나셨을 때 예루살렘을 잘못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에게 왔을 때도 이를 확인한바 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5~6)

이런 분명한 예언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27b)는 것은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를 감추고 있음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예언된 메시야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역사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지고 그렇게 된 과정은 오늘 우리처럼 성경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감춰진 비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f) 한 바 있고 뒤 v52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는 혹평까지 하고 있다.

이들이 예수께서 나셔서 그를 죽이려는 헤롯을 피신해 이집트로 도망 갔다가 주님 사자의 지시로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3) 라는 기록을 본다.

자란 것 때문에 나사렛 사람으로 알고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날 수 없다는 OT의 예언만을 신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히 그들에게는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앞에서 경계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OT에서 예언된 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나(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다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뻔히 보면서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들보다 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Ⅲ. 오신 자와 보내신 자,(28~30)

이 역사 속에 탄생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고싶어 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이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 만으로도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보내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보다 인생을 귀하고 가치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어떤 인생은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할 만큼 비극적이고 힘겨운 인생들이 있다. 특히 도적적이나 윤리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요즘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태어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한 참 살고 난 중년이 되어서야 깨닫고 그 불행했던 과거 때문에 인생을 다시 사는 사람들 또한 더러 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 듣는 우리들은 어떤 이들은 사선을 뚫고 넘어온 부모님 덕택에 북한에 나지 않은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되고, 어떤 나라보다 대한민국에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시기를 우리가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신적인 탄생만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그 옳지 못한 이해조차도 수용하시면서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가시는 모습이 역시 주님 다우심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f)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지 않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28m) 사실을 가지고서도 더 깊고 영적인 이치를 가르치심을 이해하게 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28mb) 이 표현은 분명히 저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말하는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참되시다고 하실 때는 하나님 아버지 만을 마음에 두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conf. 눅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28b~29ff) 여기에서부터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계시다. 그래도 그들 따랐던 제자들조차도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전까지는 주님의 아버지를 요셉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아버지시요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보내신 하나님을 몰랐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유에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28b~29ff) 라는 말씀은 영과 육의 이해의 구분이다. 사실 주님의 혈육의 형제들이나 친척들조차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우했던 것들을 앞에서도 본 바 있다. 좀더 구체적인 고백은 마지막 제사장적 기도를 하고 하시는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보게 된다.(17장)

오늘도 여전히 세상에 자연적으로 난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지만 그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 거듭난 사람들만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아노니” 라는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다음장에서 말씀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십니까? 아는 사람만이 그분의 주신 말씀을 지킬 것이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선언 하신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9b) 이 진리가 사실적으로 믿어지는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거듭난 자라면 주님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29b) 하셨고 다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0b)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내가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에 있든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확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역사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있고 성령께서 계시고 재림의 약속이 유효하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30)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되도록이면 빨리 제거하고자 별별 꾀를 다 부리지만 이 일(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들이 주님을 죽이고자 할지라도 때가 차야 가능한 것이다.

모든 시간은 결국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흐를 것이고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을 최선으로 채우며 살아야 하겠지만 절대로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이 COVID-19가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지만 역시 안된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이번 사태로 외계에까지 위성을 뛰우는 과학 선진국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선진국들이 오히려 이 질병에 더 약한 민낯을 보이고 말았고 의학의 한계도 드러나고 말았다.

우리가 개인의 인생사나 세상의 변화를 보면서 꼭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라는 확신이다.

어떤 시간이나 상황 속에서 늘 막연한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숨긴 막연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처럼 이름을 내놓을 수 있는 당당함과 진심된 사람으로 막연한 다수의 평가를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계획과 시간 속에 시대와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고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 수 있는 천국에서 유명한자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태를 묻은 육신의 고향보다도 우리가 하늘로부터 거듭남이 우리 인생에 더 큰 비중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막연히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또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부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주님처럼 보내심에 합당한 삶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