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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31~36 2020-04-12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비록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계산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하다고 판단하여 죽이려하는 극단적인 흉계까지 꾸미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며 공공연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들리기 때문에 이들의 감정은 더욱 예민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러 하수인들을 보내지만 어쩌면 그들조차 주님께 감동되어 잡을 생각보다는 변호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나중에 보게 된다. 이런 내용은 이 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45~46)

오늘의 내용은 그 보냄을 받은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의 내용이지만 이 내용 역시 겉으로 들려지는 대화보다는 깊은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생각과 판단이 전혀 다른 그들은 절대로 주님께서 계신 곳에 올 수 없다는 두려운 말씀을 하시지만 그들은 역시 이 말씀에 조차 오해를 하는 것을 듣는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b)거나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는 말씀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의 간격을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이 말씀 역시 육신적으로 오해해서 다음 장에 보면 심지어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요8:22) 라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영구한 운명의 갈림길을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경계를 누구보다도 주님의 희생을 힘입어 사는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새겨듣고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는 비극적인 선언을 듣지 않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Ⅰ. 믿음의 고백과 반응,(31~32)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역사는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고 막는다고 중단될 수 없는 것을 본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하였지만 오히려 이들의 불순종 조차도 은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바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 라고 증거한다.

물론 여기 앞의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이고 뒤의 “모든 사람”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지혜의 신비를 다시 찬양하여 이르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고백한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31f)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가르침에 생트집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지만 그것이 오히려 군중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b) 주님께서 이적을 보이고자 의도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병든자들을 고치시고 모든 불편에 잡혀있는 자들을 놓아 자유케 하시는 치유의 역사가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다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다.

그러나 이들의 오해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전체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안타깝게 보인다. 이 역사 속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1b)”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이 요한복음에서 볼 때는 다만 7가지 이적을 소개하는 것 뿐이지만 요한 사도 자체도 그것이 다가 아님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21:25)

그럼에도 여전히 군중들의 이러한 논의는 대중앞에서 말하지 못하고 수근거림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역시 그들이 담대하지 못하여 불이익을 당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32f)

만약에 무리들이 예수께 대하여 부정적인 수근거림이었다면 이들을 쾌재(快哉)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수근거림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위기감을 예감하고 그런 상황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부리는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잡도록 보내는 내용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32b) 라는 모습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신앙에 있어서는 정 반대 입장의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평소에는 이들이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극단에 가서는 서로 앙숙과 같은 사이이지만 자신들에게 공통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판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는데는 바리새인들이 성전 수비대인 군인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수근거릴 필요가 없고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눅12:8)

우리의 믿음을 자신있게 사람들 앞에 증거할 수 있는 자신의 경험과 증거를 가진 사람으로 사는 …



Ⅱ.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3~34)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과 하늘로부터 거듭난 우리 역시 그러한 확신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격려한바 있다.

그러나 오늘 다룰 이 내용은 어쩌면 그것과는 정 반대의 내용으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은혜에 이르지 못할 버려진 자들에 대한 주님의 선언이라고 하는데 두려워해야할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3) 하신 말씀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는 주님께서 구속을 완성하실 기한 즉, 땅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머무실 때가 많지 않으심을 이르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저들이 알아들을 리 없고 오히려 멀지 않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투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로 듣고 안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이 말씀 역시 그들이 듣기에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단순히 목수인 요셉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저들에게는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시는 말씀을 나사렛으로 돌아 가시겠다는 말씀으로 잘 못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들의 이해와는 다른 말씀을 연이어 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 만약에 예수께서 나사렛 목수의 일을 하시는 요셉에게로 돌아 가시는 것이라면 저들이 찾고자 한다면 언재든지 충분히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인데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다음 세번째 부분에서 이들의 그러한 반응을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것은 저들이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영적인 어리석음에서 오는 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인하여 진실되고 바른 말씀을 하시고 계심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중 “…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선언하시지만 역시 불신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 제목으로 잡은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선언하신 저들을 향한 주님의 경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저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고 주님과 저들의 영원한 거처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말씀보다도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라는 증거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신 주님의 그 거룩하신 사랑의 역사가 무효화된 대상들에게 주시는 두려운 경고이다.

나중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할 자들을 위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고(14:2b~3) 다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약속하셨다. 그러나 두렵게도 오늘 이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과 영원의 거처가 다름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과 거처를 같이할 사람 즉, 이러한 선언과 관계 없이 예수님 계시는 곳에 함께 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구원이나 은혜의 역사는 어떤 좋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조건과 상황을 두고 판단하고 저울질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죄에서의 구원은 더욱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천국에 함께 가는 것 그것은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하고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씼음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역시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데 나중 13장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베드로와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주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한사람 한사람 씼으시다가 마침내 베드로의 발을 씼으려 하시자.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말씀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b)하신 내용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씼김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또 하나님과 상관(相關)이 없는 자들로서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사람들이다.

죄인과 하나님과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약속; 주님의 피로 씼음을 받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섬기고 사랑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피의 희생을 힘입기 위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는 경고를 순종할 필요가 있다.

나의 죄의 해결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내용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는 경고의 말씀이다.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시는 비극적인 선언보다는 오히려 강도짓으로 살다가 인생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달렸던 우편 강도의 회개를 보시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말씀을 듣는 것이 비교될 수 없는 영원의 행복한 삶의 차이이다.

최소한 주님으로부터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선언과는 상관없는 영원을 보장 받은 삶을 사는 …



Ⅲ. 이 말이 무슨 말이냐?(35~3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오셨고 그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지만 너희들은 그곳에 절대로 올 수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반응이 이 뒷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그 말씀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그러나 직접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내용을 서로에게 물은들 말씀하신 바른 뜻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주님의 말씀의 이해는 분명히 그렇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

그렇기 때문에 유명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즉, 쓰게하신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만 생명에 이르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 말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이방인들에게로 가려 하는가!’라는 반응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 나름대로 짐작한 것이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객관적으로 보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영적인 교훈에 육신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바로 이럴 것이다.

바울 사도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는 말한 가장 구체적인 본보기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36) 주님께서 여기에 대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6~27)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관계의 깊이를 설명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데 가장 긴밀한 관계를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보다 좀더 안타까운 말을 하고 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이해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다. 앞에서도 약간 말한바 있지만 이해는 바로 관계의 깊이에서 차이가 난다. 웃으면서 행복하게 나누는 어떤 부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소통이다. 그런 이유에서 탈무드는 ‘새로운 부부가 탄생하면 새로운 언어가 생기게 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의 이해는 바로 주님과 관계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두고 그들처럼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36)는 오해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바르게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도 하나님은 역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마리아처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당부를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성경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는 막연한 믿음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백이 아니라 수근거림으로 밖에 믿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오늘 나는 어떤가!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34)는 안타까운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또 그렇게 막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진리와 생명을 선언하심에도 그들의 반응이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35)라거나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36)는 궁금증만 자아낼 뿐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처럼,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참혹한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의 깊이로 믿고 이해하여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깊이 있게 이해하고 바로 순종하는 하늘의 백성들이 되어서 적어도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시는 주님의 말씀과는 관련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