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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37~44 2020-04-1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양고기를 먹는 유월절로 시작하여 곡식의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오순절과 함께 큰 절기 중에서 마지막 절기로 모든 농사를 완료하고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의미에서 수장절이라는 이름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한해의 농사를 끝내는 의미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의 풍년을 위한 기원의 절기이기도 하다. 주로 네게브 즉, 건조한 땅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이 없으면 농사가 어렵고 그런 이유에서 우리 조선시대의 기우제 성격을 갖기도 하는 이른비를 구하는 것이 초막절 마지막 큰날이기도 하다.

장막절에는 제사를 드리는 짐승도 다른 절기와는 독특한데 그것은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숫양 두마리와 일년되고 흠 없는 숫양 14마리를 날마다 드리고 수송아지를 첫날에 13마리부터 매일 한마리씩 줄여서 드렸는데 그 도합이 정확하게 70마리였었다.(민29:12~34)

이 축제를 시작하는 날부터 제사장들과 참가자들은 주로 물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를 매일 잘라다가 번제단 남서쪽에 세워두고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 수문(양문, 미문 등)을 통해서 들어와 제사장의 뜰에 있는 번제단에 포도주와 함께 전제로 부은 다음, 그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면서 제사장들은 은나팔을 불고 마지막 날은 일곱번을 돌고 바닥에 버드나무 가지를 치면서 잎사귀를 모두 떨어뜨리면서 시편118:25 말씀을 목청것 낭송하였다.

다음해에도 농사하는데 부족됨이 없는 이른비와 늦은비를 열망하는 가운데 나팔소리며 백성들의 목청껏 외치는 시편낭송소리와 함께 소란한 분위기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전체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요란한 분위기이기 때문에 장막절의 끝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자신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라고 소리치신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모든 살아 존재하는 것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첫번째 요소는 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생명의 근원이 성령이라고 하는데서 생수와 같은 성령의 충만을 약속하시는 선언이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광야를 거치면서 목마름으로 물을 호소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해서도 역시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서 풍성한 물을 구하는 이 초막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의 생수로의 충만함이 더 귀중하기 때문에 일년을 위한 물보다는 영생을 위한 성령을 충만히 구할 것을 외치셨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상에 필요한 것도 기도의 제목이긴 하지만 이미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그보다 더 귀한 하늘의 뜻과 의지로 채워질 수 있는 충만으로 오늘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성령의 충만을 늘 구하는 …



Ⅰ.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초막절 절정의 마지막날 주님께서 그 요란한 군중들의 주목을 끌 정도의 큰 소리로 외치셨다. 영적으로 채워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로지 육신적인; 보다 낳은 내년의 넉넉한 비로 인한 풍성한 소출의 약속을 스스로에게 주문하듯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118:25)를 부르짓는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이 초막절의 마지막 날 잔치의 큰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시는 초청이 오늘 우리에게도 귀하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에 좀더 시간을 할애하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주님의 초청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향한 초대로 이사야를 통하여 이미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하신 바 있다.

조금 가까이는 쉼을 갖지 못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안식으로의 초대와도 다르지 않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이유는 사람이라면 약속해 놓고 지킬 수 없는 언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b) 사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가진 일들에 목말라 있고 자신의 목표에, 성취에 목말라 있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이룬다고 해도 또 다른 목마름이 시작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 초청이 어떤 한정된 초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이스라엘 속에서는 자신의 민족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짐승같이 치부해 버리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의 초청은 비단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심으로서 그 한계를 정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적어도 이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없이 이 귀하고 풍성한 초청에 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오늘 우리가 이 약속을 누리고 있는 사실이 또한 감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8) 초막절이 시작되면서 매일 제사장과 군중들은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와 번제단에 부었지만 그 물은 말라버려서 축제 기간 내내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죄많은 여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말씀하셨던 내용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성경에 이름과 같이” 말씀하셨듯이 OT의 생수 언약은 상당히 자주 거론되고 있다. 앞에서 이미 이사야55:1을 인용한바 있지만 58:11에도 동일한 약속이 기록되고 있고 44:3을 보면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라고 목마른 자를 초대하는 것이나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는 약속은 주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또 다른 곳의 말씀은 에스겔47:1~12의 성전 문지방 밑에서부터 흘러나와 동해로 흐르는 강 같은 생수를 예언하고 있는데 그 강 좌우편에 나무가 무성하고 그 물이 이르는 데마다 생명이 풍성해지는 역사를 이룸을 보게 된다. 요엘3:18이나 스가랴14:8에도 미래에 이루어질 이 에스겔의 약속과 같은 말씀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선포하시는 주님의 생수의 약속은 이미 OT에 약속된 사실이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b)는 선언은 육신적인 배가 아니라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역사하시는 성령의 시원케 됨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깊은 데서부터 주어지는 생수 같은 성령의 시원함은 모든 안타깝고 답답한 것을 해결하고도 남음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성령의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 덧붙여 해설을 하고 있지만, 장차 완성될 복음의 약속으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힘입는 자들이 받아 누리게 될 성령을 말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이 완성된 오순절날 베드로가 이를 확인해주는 선언이 바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란 언약의 확인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도 요한 사도는 시간적인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b)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계심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주님과 계시는 성령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하실 약속은 십자가의 희생과 함께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말씀을 너무 생각없이 가볍게 읽게 되면 마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자들과 아직은 함께 계시지 않으신 성령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또,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하여 성령의 인격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해설에서는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표현으로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여기에 해설되지 않은 말씀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즉 성령이 아직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오시지 않는 이유를 말하는데 과연 여기서 말하는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요한복음 12장에서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자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심으로 죄에서 인류가 자유케되는 영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제자들조차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도 ‘왜 메시야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으로 혼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같은 12:16에서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이런 일은 더러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2장 말미에서도 유월절 가까운 때 성전에 올라 가셨다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성전을 책망하시자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v18b) 요구한다.

거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b)고 말씀하셨고 46년된 성전을 3일만에 이르키겠는가 반문하는 유대인들을 두고 요한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 한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라는 표현은 구속의 역사 즉,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다는 이해를 할 수 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신 주님을 말하면서 희생을 통한 영광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모범이다. 이 세상에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경건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고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입혀 주실 것이다.



Ⅱ. 마실 수 없는 자들의 혼란,(40~42)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시끄러운 장막절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7b~38) 하시자 여기에 대한 반응들이 두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생수인 성령을 마실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반응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은 언제나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사람들과 증거되는 말씀을 책잡고 그 말씀에 대항하는 부류로 나누게 된다. 나는 어떤 부류인가!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40) 이스라엘에는 모세가 가나안을 앞에 둔 요단강 동편에서 예언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한 말씀이 전해져 왔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서 날 씨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며 약속을 말하고 미가5:2에 예언된 베들레헴이서 날 메시야가 바로 그 선지자라고 전승되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고 한 말은 바로 예언된 메시야 라는 확인이다. 그러나 연이어서는 오해가 덧붙여진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1~42) 이 말씀을 간추려 보면 앞에서 말한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할찌라도 갈릴리 사람은 아니라는 말인데; 우리가 보기로는 역시 자신이 알고있는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출처를 오해한데서 오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나셨는 데도 영적인 이치를 자신이 가진 잘못된 이해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은 이래서 비극이 되는 것이다. 결국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으로 예레미야를 통한 탄식이 그대로 응하고 있는 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물을 얻어도 계속 솟아나는 생수의 근원인 샘물과 떠놓은 물과는 완전히 다름에도 많은 사람들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는 데서 시원함을 얻지 못하고 메마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형편에서건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를 헤아리게 된다.



Ⅲ. 진리를 거스릴 수 없는 세상의 지혜와 권력,(43~44)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마지막 부분에서는 현재적으로 주어진 권력과 분명한 실세를 가졌음에도 보이는 것으로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진리의 역사를 거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실과 영원의 차이임을 배운다.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3) 아무리 귀중하고 큰 진리를 전할찌라도 그 진리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로 논쟁만 일으킬 뿐이다. 나중 주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듣는데서도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요10:19) 라는 현상을 본다.

“쟁론이 되다[σχίσμα, 분열, 나눠짐]”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당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눠지고 찢어져서 하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됨은 한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원리를 배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의 반대편에 서면서도 진리의 권능에 굴복할 수밖에 없으므로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항하려 하면서도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44)는 결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어렵고 험한 상황일찌라도 진리의 편에 선 자들에게는 어떤 악한 세력도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믿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시원함이나 유쾌함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음성으로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초청의 대상에는 세상과 같은 제한이 없다. 공부를 많이 한 학식이 있는 자이건 권력을 가진 자건 금덩어리를 많이 가진 부자이건 아니 이 모든 것 중 아무것도 갖지 못한 가난한 자이건 차별없이 부르신다.

그럼에도 이 생수를 마실 수 없는 사람들은 이 무조건의 초청을 두고도 자신의 육신적이고 세상적으로 판단으로 헤아려 거절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고 지해있는 세력이라도 이렇게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또 이 초청에 응하려는 사람도 방해할 수 없다. 십자가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자들을 하나님의 하늘의 권세로서 이끌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