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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7:45~53 2020-05-03
그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나이다.  
초막절 생수의 초청에 대한 어두운 쪽의 하수인들의 반응이 기록되면서 이 말씀은 끝나고 있다.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무잡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이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로 그치고 있지만 생명의 진리에 대한 어두움과 죽음의 암흑이 하나될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비록 어두움의 하수인들이기 때문에 진리를 순종하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증거에 한 순간이라도 감동한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같지 않음도 배우게 된다. 아무리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고백한다고 할찌라도 자신들이 매여있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여전히 과거의 종노릇할 뿐임을 이 성전수비대인 하수인들에게서 본다.

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구실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안타까운 현상으로 생명의 진리를 함부로 저주하고 거절하는 행동에서도 우리의 속한 위치를 바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율법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권면해 보지만 역시 함께 OT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으로 육신적인 판단에 의해서 반박되고 진리의 생명을 향하여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도 안타깝기만 하다.



Ⅰ. 생명에 대한 권력의 혼란,(45~46)

자신들의 권위와 이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판단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리는 하수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 오도록 보냈지만 그들이 빈 손으로 돌아왔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여기서 보면 결국 상관과 부하가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일 뿐이다.

종교기관의 모습이기 보다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현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회구조는 그래도 부하이면 아니꼬울지라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일찌라도 시키면 상관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일반적인 조직이지만 이 이스라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명령에 부하들이 복종하지 못하는 모습은 의외이다.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45f) 여태껏 이 하수인들은 제사장들의 명령한 일에 어김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이 군인들도 자신의 상관들의 권위로 자신들이 하는 일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복종했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쉽게 갔다가 그야말로 빈손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5b)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조차도 이런 상황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구쳐 묻고 있다. 요즘 우리가 쓰는 표현을 쓰면 ‘어째서 안잡아오고 그냥 왔느냐!’ 분감어린 말투가 짐작이 된다.

잡아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벼르고 있던 대세사장들은 자신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관리해오면서 돈벌이를 잘 해왔지만 이때까지는 감히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는데 몇번씩이나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마다 자신들의 권위를 무참하게 짓밟는 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젊은 선지자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였다.

그럼에도 기죽은 이 군인들은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자신들이 그때까지 종교지도자들의 시키는 대로 사람을 잡아 오라면 그렇게 하였고 자신들의 권세는 아니지만 대제사장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산해드린공회의 권한으로 사람들은 체포해왔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권위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과거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경험을 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은 어떤 위기에서도 분명히 일반 사람들과는 달랐음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한 예로 뒤의 18장에서 보는 것이지만 가룟 유다와 함께 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도 먼저 주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 하시고 “나사렛 예수라” 하자 “내가 그니라”(5) 하셨다.

거기에 대한 반응을 요한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고 적고 있다. 군인들이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잡으러오면 다른 사람 같으면 온 갓 변명을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해 볼려고 ‘나는 아니다’라면서 슬슬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연이어 다시 묻고 “내가 그니라”(8)고 확인하시고 반항없이 따라 나서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다른 사람들이 여태껏 해왔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 때문에 운명하시기까지 지켜본 사형을 집행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고백하기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 막15:39)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위대한 사도라고 하는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표현에 대한 차이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23장의 공회 앞에선 바울은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1)고 말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2) 하자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고 항변한다.

그러자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고 책망한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율법의 근거를 들어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인용한 내용은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대제사장을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달랐다.

요18:19~23의 내용에 대제사장이 예수께 그의 교훈과 제자들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자 예수께서 자신은 몰래 행한일이 없어서 그것을 본 사람에게 물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v22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항의 하자 주님께서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고 책망하신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하수인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라는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권위를 맛 본 것이고 현실보다는 주님을 선택해야만 옳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다만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라고 말할 뿐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도 사람들은 더러 신앙에 있어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라는 식의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 진리에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당연한 것이다. 오늘 나(우리)는 어떤가?



Ⅱ. 새 술을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려는 자세,(48~49)

두번째로 다뤄지는 내용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라고 보고하는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책망하며 ‘산해드린 공회원이나 바리새인 중에는 예수를 믿는자가 없다.’고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율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주까지 한다.

저들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모양만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율법을 글자로만 이해하는 결과가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고 저주까지 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음을 본다. 오늘 마지막 부분의 니고데모도 이런 자세를 책망하고 있지만 그도 역시 주님을 믿고 존경하는 사람이었음을 이미 3장에서 본 바 있다.

나중 12:42에서도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는 기록을 보면 이들의 자세가 바르지 못함을 본다.

하수인들이 돌아와 전혀 기대와는 다른 보고를 하기 때문에 유대종교의 양대산맥 중의 하나인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b)고 질문하듯 다구친다. 여기 “미혹되다[πλανάω, 헤메다, 속다, 죄를 짓다, 넋을 잃다]” 분명히 좋은 표현은 아니다. 요즘 표현으로 ‘너희들도 그 사람에게 넋을 일었구나’ 라는 투의 책망이다.

그들의 말투는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48)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잡으러 그들을 보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렇게 넘어가서 되겠느냐!’ 한편으로는 달래는 듯 책망하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용납할만 하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고 정죄하는 것은 결정적인 저들의 죄악이고 실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 자신들이 율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서 이런 서투른 판단으로 의로운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려고 주신 법이고 바울조차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전까지는 이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주님을 만나뵙고서야 율법의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 것은 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b)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를 먼저 이해하고라야 율법이 예언하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오게 되어 있지만 그냥 10계명과 같은 문자화된 금지의 법으로만 율법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식일에 선한일을 하는 것 가지고도 정죄하는 한계를 이미 그들에게서 엿볼 수 있었다.

낡아져가는 가죽부대 같은 율법에 새로운 포도주와 같은 생명의 발효력이 넘치는 복음을 담는 것은 불가능함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바 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9:17; 눅5:38)

오늘 우리들 역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라는 정죄를 쉽게 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 경계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는 겸손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판단과 정죄는 조심해야할 자세임을 배운다.



Ⅲ. 진리가 통하지 않는 사회,(50~53)

바른 신앙의 사람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살고있는 문화나 사회가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해하며 심지어 왜곡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려니 각오를 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단결을 의지하고 영원속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런 이유는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바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유대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그들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율법을 들어 지적해 보지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오히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났다고 생각하고 그 예수를 대변하는 니고데모에게 ‘같은 고향사람이기 때문에 두둔하느냐?’는 투로 반박한다.

사회적으로나 지식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지도자층에 있는 이들의 반응이 이런정도였기 때문에 입술로는 율법을 들먹이지만 율법이 가르치는 바른 판단조차도 갖지 못하고 있는 저들을 보면서 니고데모는 안타깝고 답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없지만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라고 인정하였고 다시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1:8) 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결코 악한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50)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은 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왔었던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그럼으로 이 니고데모는 주님께 대하여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야라는 확신은 갖지 못했을찌라도 적어도 흔하지 않은 랍비 정도로 는 믿고 있었음을 본다.(요3:2; 19:39)

그는 율법을 통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 이러한 니고데모의 주장은 신앙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기준에서 옳은 것으로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기준으로 판단하고 말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①사람의 말을 듣고, ②그 행한 것을 알기,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가르침 즉, 교리가 성경과 부합하느냐?가 첫번째이고 그들이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행하고 있는가? 즉, 열매를 살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앞에서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8b~49) 라는 주장 때문인데 구원을 위한 성경적 진리는 사실 누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예언된 하나님 말씀과 구원의 역사에 맞는가 하는 기준이 바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전체적인 틀인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성경의 전체적인 범주에서 어긋남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논리를 더 자세히 세분(細分)해 보면 시대적인 구분과 이미 이루어진 역사와 이루어질 역사의 구분이 바로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오늘 시대에도 이미 완성된 OT의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거나 예언에 따라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 외에 또 다른 구세주를 주장하거나 바라는 것은 율법적으로도 옳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런 바른 기준도 갖지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네고데모의 말에 되돌아 오는 반응은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 그들보다 바르고 객관적인 이 증거에 저들은 상당이 자존심을 상한 것 같다.

마치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편을 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갈릴리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편을 드는 너도 갈릴리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곳의 사람이냐?’ 고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b)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마태를 통하여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3)는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이런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비방받는 표적이심이 확인되고 있다.

이스라엘도 지역적인 편견이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지역적인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바른 진리가 통하지 않는 일을 더러 보는데 역시 같은 안타까움을 가지게 된다.

진리는 어느 누구나 또는 어떤 사람이 믿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믿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냥 진리이다. 진리라고 하면서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벌써 진리일 수 없다.

마치 OT성경을 주형화된 틀로 인식하고 그 틀에 맞는 것만 인정하고 예언된 일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이방인을 복음 속에 받아들이기 위한 지혜였다고 바울은 로마서11장에서 증거한다.

어느정도 가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46) 라고 말하지만 이 고백만으로는 온전치 못하다. 그 고백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리는 누가 믿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믿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생명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믿지 못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의 이유는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진리가 잘 통하지 않는 것에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생명의 교훈을 어렵지만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영생을 가진 사람들이며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이다. 아울러 신앙에 대한 판단도 가르침과 열매를 확인하고라야 가능하므로 자신의 입장 때문에 정죄를 함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에서 경계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