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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1~11 2020-05-10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 언급하지 않았던 ( )에 기록된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7:53) 라는 말씀과 연결되면서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1) 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수의 선언과 그러나 그 은혜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대항하고 비판하던 그 상황의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부터 우리에게 묵상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같은 바리새인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논쟁의 끝에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벽을 향해 말하는 것 같은 통하지 않은 그 논쟁 후에도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차이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벌써 이 간악한 무리들의 시험이 있을 것을 아시고 준비하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중 18장에서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이 곳에 온 것을 거론하면서 요한은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요18:2f)고 기록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후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2) 라는 자연스러운 진행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연결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잡힌 여인에게 사죄를 선포하신 이 날은 공교롭게도 초막절과 연결된 여덟째 날에 있었던 사건으로 독특한 의미를 가지면서 일년 농사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한해의 모든 절기를 마무리 하면서 새로운 시작 즉, 새창조와 연관시켜 이 여덟째 날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이 사건조차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주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올무잡아 죽이려는 흉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기 위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올무에 걸리게 덫을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정죄보다 사죄를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 8장은 시작되면서 예수께서 자신을 빛으로 선포하시지만 이 요한복음 중에서도 이렇게 육신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긍하는 사람들과 극렬한 논쟁을 벌이신 일도 없었다.

결국 죄인된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왔던 율법과 다르게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죄에서 놓아 자유케 해 주시려고 오셨지만 그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하수인들의 격렬한 반항을 여기서도 보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대부분 정죄하기에 빠르다. 그러나 절대적인 공의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정죄보다는 사죄를 위해 오셨음을 기억한다면 죄인이면서도 정죄에 빠른 자세가 과연 빛의 백성으로서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유리창을 내다보는 남을 판단하는 삶보다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의 삶이 더 합당함을 이해하게 된다.



Ⅰ. 간악한 어두움의 흉계,(3~6)

여기서는 성전을 자신들의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종교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제사장들로 역할하는 사두개인들은 빠져 있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레위기23:33~44과 민수기29:12~38에 주로 기록되고 있는 이 초막절은 뒷날도 상당히 큰 종교적 행사가 있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레23장의 말씀을 보면 초막절에 이어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36) 하였고 다시 조금 진행하여 v39에 “…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바로 이 여덟째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덟째 날의 행사에 대하여는 안식과 제사드리는 것 외에는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3) 라는 기록으로 봐서 이들은 성대한 추수의 감사를 즐기는 초막절의 절정에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잡을 간교한 방법을 위하여 핏기서린 눈으로 율법을 거스리는 사람들을 찾는데 축제의 시간을 다 쓰다가 마침내 이 간음하는 여자를 잡고 올무의 도구로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간음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남녀 둘 다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22:22)

오히려 약혼한 처녀가 들에서 강간을 당한 경우에는 남자만 죽이게 되어 있다.(신22:25~27) 그런데 여자만 끌고 온 것도 율법을 어긴 행위이다. 예수님을 올무잡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있어 이런 사실조차도 생각지 않고 여인을 끌고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4) 현장에서 잡아 왔다면 남자는 어디다 두고 여자만 끌고 온 저들이 벌써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올무잡을 한가지 생각으로 이런 불완전한 문제를 가지고 와서 큰소리 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

이들이 율법을 빌미로 주님을 시험한 간교한 행위는 이 일만이 아니었다. ①“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

②마태복음22:15~22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막12:13~17; 눅20:20~26)

③마22:23~33 한 여인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다면 부활의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 ④“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 라는 시험이었다.

아무리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올무가 분명하지만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적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f) 어두움의 종이 되면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조차도 이렇게 악하게 사용하는 것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시험당하시는 내용에서 출분히 볼 수 있다. 3번의 시험은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말씀을 도용하여 진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간교한 저들의 의도를 모르실 리 없으신 주님은 일단은 응답을 하지 않으시고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6b) 무엇을 쓰셨는지 기록에 없어서 알길이 없지만 주님께서는 연거푸 두번씩이나 땅에다 무엇을 쓰셨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 [렘17:13b…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결코 지혜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어찌할바를 몰라서나 답을 생각해 내시거나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셨을 리는 만무하다. 어쩌면 저들이 간교한 술책을 가지고 자신을 올무잡으려는 어리석음이 가련하고 남자는 어디로 가버리고 여자만 잡혀와서 이들의 간악한 도구가 될뻔한 이 여인의 처지가 불쌍하여 이런 침묵을 가지셨을 수도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고 증거하였다.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 죽이는데 사용하려는 간교함은 어두움의 하수인들에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깨끗한 믿음으로 거룩한 것을 사용하여 죄인들의 생명을 건지는데 최선을 다하는…



Ⅱ.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9)

아무 답변도 없으신 채로 땅바닥에 연거푸 쓰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저들은 분명 쾌제(快哉)를 불렀을 것이다. ‘여태껏 눈에 가시 같이 우리를 괘롭혔지만 이제는 빠저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빨리 끝을 보기 위하여 독촉한다.

분명히 저들의 판단으로는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율법대로 ‘그래, 돌로 쳐 죽여라!’ 한셨다면 항상 강조하셨던 용서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다고 ‘율법에는 그렇지만 용서해 줘라!’ 하셔도 율법을 범하게 하는 자로 정죄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7f) ‘왜, 잠잠한 거요. 빨리 답변을 주시오. 아니 이번에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겠지?’ 속으로 외치며 다구쳤지만 오히려 들려온 답변은 저들의 양심을 내려치는 한마디였다.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b)

이스라엘의 관습대로는 초막절 여드렛날은 ‘사죄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서로 노래로 응답하며 영광을 돌리는 절기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사죄를 요청할 필요가 없고 그런 절기를 마련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사죄의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찬양하는 절기라고 한다. 그런 절기의 날에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말씀에 이러한 간교한 술수를 계속할 수 있는 강심장은 없었을 것이다.

이 한마디를 던지신 주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 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셨던 것이고 서슬이 파랗게 돌을 집어들고 예수님과 이 여인을 죽이기 위하여 부르르 떨기까지 하던 사람들은 그래도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9f) 들었던 돌은 자신의 발밑에 가만히 떨구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9m) 라는 모습이 되었다.

여기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9m) 라는 모습도 그냥 있어지는 모습이 아닌 것은 ‘사죄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서로 노래로 응답할 때 나이가 많은 랍비들이 선창을 하고 거기에 온 회중이 응답하는 식으로 이 여드렛날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하는 순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b) 죄의 문제는 많은 증인들을 필요로할 수 있지만 타인이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일대 일의 관계가 중요하다. 현장에서 죄로 인하여 잡혀온 여인과 그 죄를 유일하게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일대 일로 대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죄의 해결은 이런 관계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 죄인은 사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설을 들을수록 오히려 죄를 합리화 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 유일하게 죄를 처리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사죄의 기회가 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모든 인류는 이 여인 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539:1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아멘



Ⅲ.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

많은 군중을 끌고 예수님께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 다구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저마다 돌을 들고 ‘이번에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마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던 그들의 양심에 번개를 맞은듯 들은 한 마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신 주님의 말씀에 저들은 하나 둘 자신들의 죄를 볼 수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도망쳤 나갔다.

모두가 빠져나가기까지 땅바닥에 쓰고 계시던 예수께서 조용히 일어나셨다. 그리고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라는 것으로 봐서 사방을 둘러 보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인자하신 음성으로 물으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b) 이 여인은 분명히 율법을 범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한 도구로 악용될 입장이었고 주님의 이 물으심은 ‘그래, 그들은 사실 너를 빌미로 나를 죽이려고 했던 어두움의 자식들이란다.’ 라는 안타까운 의미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표현은 이 여인이 무죄하다는 말씀이 아님을 v11의 말씀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가 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특히 여기 예수님께서 “너를 고발하던 그들, [고발, κατήγορος, 원고, 사탄, 참소(계12:10)]”이나 “너를 정죄한 자, [정죄, κατακρίνω, 선고하다, 정죄하다, 저주하다]” 라는 의미도 차이가 있다.

사실 고발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고발자를 성경은 주로 사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상황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이 여인을 고발하던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다. 축제기간이었지만 그들은 기쁘게 그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올무잡아 죽이기 위하여 죄짓는 상황을 눈에 빨갛게 핏기를 머금고 찾아 나닌 것은 어두움의 하수인들이 분명하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처럼 전후좌우를 다 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면서도 이미 이 여인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죽일 것을 이미 죄의 대가로 정해놓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이유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른 지체를 비난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법을 만들 수 있는 입법자와 사탄의 고소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죄를 정하여 형벌하실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만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이러한 공의와 사랑의 빛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 앞에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던 여인이 응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어쩌면 이 여인은 이미 4장에서 예수님과 만났던 수가성의 여인과 다르지 않았다. 수가성의 여인도 과거의 남편 다섯과 현재의 남편, 최소한 6사람과 관계를 한 여인이라는 데서 오히려 이 여인보다 더했으면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도 생수의 복음을 주셔서 수가성에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사용하셨던 주님이셨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 자신의 수치를 자랑할 사람은 없지만 용서받은 죄는 용서받은 감격의 크기를 나타내기 때문에 기쁘게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주님께서 이 여인의 죄를 이미 다 아시겠지만 죄를 거론하시지도 않고 사죄를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m)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를 자신이 받을 십자가의 형벌로 용서받게 하려고 이 역사속에 오셨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는 주님의 선언은 ‘너의 죄를 위해서도 내가 죽는다.’ 라는 의미를 당연히 담고 있다.

오늘 마지막으로 주시는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음미해야할 말씀으로 중요하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오늘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다는 사실 때문에 어쩌면 죄에 대하여 무뎌지고 가볍게 여겨서 ‘또 용서해 주실 것인데!’ 라는 생각으로 죄를 짓는데 담대해지는 것은 경계해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치료나 용서해 주신 후에 이 여인에게 주신 말씀과 같은 표현을 더러 하셨다. 대표적인 예가 5:14에 삼십팔년 동안 중풍병으로 베데스다라는 못가에 누웠다가 치료받은 사람에게 주신 말씀과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죄는 희생이 없이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도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사죄의 은총을 맛보고 죄를 짓는 사람을 두고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두려운 경계을 주고 있다.

‘망할 사람은 망할 짓만 한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걸어 죽이려고 하나님의 율법까지 악용하는 이런 사람들일 것이다. 추수의 감격이나 사죄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만 사람과 율법을 다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쓰는 간교한 어두움의 하수인들의 간악함을 본다.

계속해서 답변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선포하심으로서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의 죄를 볼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정죄가 하니라 사죄 즉,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다. 이것을 아는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죄를 벗겨주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사죄를 선포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선언하시는 복음을 누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생명의 복음에 더 많은 죄인들을 참여시키는데 최선을 다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