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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12~20 2020-03-17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리적으로는 과학의 발달에 따라 점점 밝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LED(Light Emitting Diode)라는 광 매체로 적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도 밝은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사용하던 전기의 ⅓만 가지고도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어두워진 영적세상은 조금도 밝아질 가능성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의 피로 양심을 씻어 주셨지만 육체를 가지고 사는 현세상에서는 별 차이를 가지는 것 같지 못하다. 주님께서도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눅22:53)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바울도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11) 고 이 세상을 표현하고 있고 우리의 투쟁에 대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증거하였다.

어쨌거나 이런 어두움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를 선언하신다.

그럼에도 어두움의 하수인들이 되어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사실적인 것보다는 여전히 율법을 들어 이를 반박하기만 한다. 율법에서는 두 세사람의 증거를 통하여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직접 율법을 주신 그리스도를 반박하고 나선다.

주님께서 아무리 증거를 많이 하고 바로 해도 그들이 보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스스로의 증거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항의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자신과 함께 증언하시는 아버지께서 함께 증거하시기 때문에 이 증거는 율법적으로 판단해도 옳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을 본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따라야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고 아들과 함께 증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확신하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12~14)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어두움 속을 걷기 위해서는 등불을 들어야 한다. 언제나 대부분의 사람이 어두운 곳을 걸을 때 빛을 뒤에다 두고 걷는 사람은 없다. 이런 원리에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하신 말씀은 실감이 난다.

왜냐하면 나아가는 앞을 비추기 위해서 빛을 앞에 두고 따라가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리이지만 그럼에도 신앙하는 사람들조차 영적으로는 이런 일반적인 원칙조차 무시하는 경우들을 본다. 빛이신 주님을 앞에 모시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빛을 앞서가는 모습을 더러 보는데 그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우리 각자의 바른 자세를 살피고 빛가운데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12f) 마치 창조의 첫째날을 생각하게 한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4)고 태초의 상태를 전달해 주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태초부터 지속적으로 자신을 계시해 오신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빛은 사실 물과 함께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 기본 조건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시는 선언은 “나는 세상의 생명이니,”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 첫 절의 마지막에서도 “나를 따르는 자는 …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말씀의 확인이다.

모두 죄로 인하여 죽어진 상태에 있는 세상에 다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 자체로는 죄의 어두움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라는 선언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사람 자신에게서 불가능한 수동적인 표현임도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평투성이요 싸움 거는데 익숙한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 라고 항의하는 저들의 간악함은 여전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저들은 당연히 불신의 불평을 토해낼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14f)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야 이 말씀이 진실하심을 확신할 수 있지만 불신의 마음으로 접근하는 저들에게는 이러한 진실함이 통할 리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분의 독생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한 아무 것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14m)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의 죄의 문제를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해결하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 가야하실 것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보고 계신 주님의 입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하신 백성들 속에서 오히려 거절당하시는 안타까움은 비교할 수 없는 아픔으로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계시다.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b) 불신하는 저들을 오히려 측은히 여기심이 이 말씀 속에서도 묻어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시고 또 그 분께로 돌아가실 것을 저들이 알았다면 그렇게 완악하게 대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들의 입장을 인정하시는 아량을 본다.

그러므로 1:11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는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여기에서도 본다. 만약에 오늘 주님께서 우리 교회당에 오신다면 우리가 참으로 바르게 영접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두려운 교훈이다.

“네 마음에 근심 있느냐 어둠속을 헤매느냐, 우리 주 예수 바라봄으로 그 밝은 빛 찾으리라, 눈을 주님께 돌려 그 찬란한 얼굴 보라, 주의 은혜와 영광의 빛 앞에 세상 근심은 사라지네”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났다면 이제는 그 빛을 풍성히 누림으로 삶에 어두움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삶 되시기를 …



Ⅱ. 예수님과 함께 증거하시는 하나님, (15~18)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여전히 불신과 대항으로 나오는 저들이지만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로 저들을 일깨우시려는 자의적인 선언을 계속 하신다. 이 둘째 부분에서는 주로 판단[κρίσις, 정죄, 단죄, 재판]과 증언[μαρτυρία, 주어진 확증, 기록, 보고, 증거, 증명]을 말씀하신다. 이 둘은 또 깊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바른 판단은 바른 증언 즉, 반드시 바른 증거를 가져야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15)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렇게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반항을 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과 진리로 섬겨야 할 하나님을 항상 육신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원리는 육신적으로 이해하는 한 어떤 것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나서 갈릴리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고 선지자 노릇하는 거짓 그리스도라고 아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는 영적인 부분을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의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런 말씀이 진실하신 것은 마지막 십자가 위해서까지도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f) 라고 저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주님은 말씀하시지만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 사도는 이미 “…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b)고 증거한 바 있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주님께서 자신의 하시는 일이나 판단이나 모든 것은 5:30b에서 이미 봤던 대로 “…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으로 일이나 판단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맡겨 드리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도 곧 아버지의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께서 이러셨듯이 우리 각자의 자세가 또한 이와 같아야 만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시 그들이 들먹이는 율법을 통해서 저들을 교훈 하신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17)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율법을 사용할 뿐이지 율법 전체의 가르침이나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정당한 원리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18)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고 한 율법의 정신을 주님 자신과 아버지의 두 증언으로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앞에서 저들이 이미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분명한 증거가 저들에게는 변명으로 밖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은 저들의 불신 때문이다.

한번 의심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합리적인 방법과 교훈으로 답변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세계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적인 접근이 불신의 사람들에게 어렵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조차도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진리가 먹히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오늘날도 안타까운 것은 사람은 착하고 바르게 믿으려고 하는데 그의 귀는 이미 진리가 아닌 바르지 못한 교훈에 익숙해져 있어서 어떤 바른 교훈으로 가르쳐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의 귀가 진리를 향해 열려서 진리를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Ⅲ. 아들을 알아야 아버지를 안다. (19~20)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주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18) 하시자 유대인들이 이 말씀에 반문하고 이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변하시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마지막으로 내용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합리적인 답변을 주셔도 저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이미 아시면서도 그들을 이해시키시는 데 최선을 다하심을 보게 된다. 우리 시대 같고 인간적인 입장이라면 주님의 권위로 밀어붙일 수도 있으셨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19) 이 질문은 역시 ‘너를 보내고 함께 너를 증언한다는 그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의미로 묻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묻는 말에 즉각적인 답변보다는 사뭇 경계하시는 안타까움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19m) 결국 앞에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그 주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아버지를 알려 달라고 하니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지만, 또 다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관계를 소개하시지만 여전히 저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통로를 소개하시는 교훈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뵐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셔서 아버지를 보여주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어디 있는가?’하고 묻는 그들에게 보여주거나 나타낼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다.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조차도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8)라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모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하셨다.

오늘 본문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씀이나 빌립에게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은 다르지 않음을 본다.

계속 빌립에게는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0~11)고 당부하심을 듣는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분이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오늘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지 못한다면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19b)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20) 하여 역시 조금은 살벌한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한 저들의 반응이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그만큼 진지하게 일깨워 주시려는 배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돌아온 반응은 여전히 잡아 죽이려는 저들의 결심이 굳어 있음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의 영역이고 손을 댈 수 있는 위치였지만 역시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함을 확신하게 된다.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20b)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변함없는 확신이다.

이 땅에 교회가 설 때 제자들에게 주셨던 약속이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모든 일의 성취, 특히 영적인 역사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라는 말씀하신다.

사람은 급하고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때 즉, 위에서부터 결재가 있어야 함을 신뢰하고 기다리고 참는 자세가 바로 천국백성들의 기본임을 확신해야만 한다. 아무리 다급해도 하늘의 때가 차지 않으면 ‘아직’이라는 시간의식에 익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시간개념을 사라질 사람의 기준에 두기 때문에 걱정하고 낙담하고 어려워하지만 인류의 구세주 이신 주님과 관련된 일들조차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온 갓 꼼수를 다 부려보지만 하나님의 예정하신 시간이 차기까지는 불가능했던 것과 같이 이 역사의 흐름의 기준이 정치가의 계산이나 재산가의 돈을 풀고 거둬들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때에 의해서 허용되고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런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그리고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b) 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 주고 있다.

세상의 광명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점점 밝아지고 있지만 영적인 시각에서는 동트기 이전처럼 가장 어두운 시기에 와 있음을 인식하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어두움에 잡히지 않은 체로 역사의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상황이든 시간이든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의 증거를 완벽하게 보시고 계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의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5~16)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뵐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과 자세와 삶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하므로 더 깊으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는 세상의 빛이니,”랄 수는 없지만 그 빛을 따르는 우리가 또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예수님을 가진 빛이 되어야 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