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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21~30 2020-05-24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동안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이나 예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순종하지 못하는 저들에게 끝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이해시키려고 애쓰셨다. 그럼에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저들의 불신은 커져갔고 극에 달하여 이제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다.

사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족이나 기회가 없어서라고 변명하지 못할 정도로 끊임없이 참아 주시고 받아 주시고 기다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완악함과 어리석음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짖도록 명령하실 때나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하기 직전에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은 데서 이런 과거의 역사는 모두가 분명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씩이나 증거되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경고조차도 심판적인 성격이기 보다는 당시의 상황에서 역시 경계의 권면인 것은 그 이유들을 낱낱이 거론하시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고 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행동하나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령하시고 함께하시는 사실을 저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반감은 버리지 못하고 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판단으로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행하고 있는 것임은 과거의 바울이 사울 때도 그렇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어쩌면 이 말씀은 참으로 안타까운 믿음의 자세이다. 진리를 거역하고 대적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예라고 착각할 것이고 오늘도 건전치 못한 무리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더러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죽이고 나서야 이들 유대인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서 보내신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소수의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완악한 자들은 버림을 당하는 안타까움을 끝끝내 받아들이고 만다.



Ⅰ.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죄가운데 죽는다. (21~24)

뒤로 갈수록 유대인들과 논쟁은 점점 심해가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행한 일과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소망이 아닌 절망적인 선고를 하심을 본다.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선언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거나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12:47b) 시는 말씀처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주님으로부터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시는 선언을 듣는 것은 분명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의 이들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같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죽으리라’는 선언도 저들에게는 분명 안타까운 비극의 선언이지만 거기에 ‘너희 죄 가운데서’를 덧붙이심으로 더욱 큰 비극의 선언을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죽으면 사람들은 죄는 해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그런데도 죽음에도 죄가 그저 있어서 여전히 죄가 해결되지 못하는 마지막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이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이유를 최소한 세가지로 말씀하고 계시는 부분을 먼저 생각하고 저들에게 계속 오해를 당하고 적대시되면서도 그러한 이유들을 말씀하시며 저들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1]메시아를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겠고(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수없이 예언을 주셨고 마침내 보내셨음에도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아직도 여전히 다른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면 더이상 방법이 없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자의적인 선언이셨다. “내가 가리니”는 물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가실 것에 대한 당시로서는 예언이셨다.

비록 저들이 인정하던 부정하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구속의 역사를 시행하실 것이고 그 약속에 대한 구속의 완료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다 포함한 과정을 거치는 의미를 “내가 가리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들이 믿던 부정하던 막론하고 그 예정하러 오신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선언처럼 완성하셨다.

그 다음이 “너희가 나를 찾다가”도 당연히 ‘그리스도를 찾다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는 이미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다 완성하셨음에도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보내실 약속이 계속된다고 믿고 그리스도를 찾지만 한번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메시아는 더 이상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찾겠지만 찾지못하고 자신들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못한 체 죽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선언이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오실 그리스도로 찾고 있다. 이런 불신의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신 하나님 우편에 함께 구원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정죄하고 만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오해 가 있다. 이렇게 심각한 경고를 들으면서도 저들은 여전히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22)

소로몬의 잠언이 생각난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잠16:22)

이보다 더 비극적인 오해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메시아의 역할을 담당하시고 갈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을 그야말로 육신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결국 올 수 없다는 곳을 하나님의 우편인 천국이라고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하여 죽음으로 간다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망할 수밖에 없는 오해이다.

[2]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에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3~24f)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여기에서 엉뚱한 판단과 생각을 하는 저 유대인들과 예수님 자신을 비교하심을 본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 ‘나는 위에서 났으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세상에서 난 것은 예외없이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나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것은 복음의 변함없는 죄와 관련된 세상의 존재들에 평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에 죄가운데 죽으리라 시는 주님의 말씀은 당연한 증거이다.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말씀과 다르지 않은 증거이다.

[3]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b)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께서 앞에서 두가지를 들어 저들이 죽을 것을 선언하셨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동안 그리고 대대로 그리스도를 찾다가 죽을 것이다. 아래 땅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한 존재로 일생을 마친다면 당연히 죄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세번째의 증거는 좀 더 가까이 그리고 핵심으로 다가가는 생명의 교훈이다. 그럼으로 앞에 말씀하신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이면서 더욱 중요한 가르침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아주 무게 있는 선언을 하신다.

“너희가 만일” 적어도 이것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을 가지는 귀중한 가정(假定)이다.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더 중요한 것은 이 원리는 그때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듣던 그들에게만 유효한 생명의 논리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포함한 이 역사 속에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유일한 생명 얻는 방법이다.

이 중요한 가능성의 핵심은 바로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으로 마치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세우시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신 선언과 다름이 없다.

사실 위의 두가지 죄가운데 죽으리라는 이유는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선언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경계로 들어야할 영원한 운명이 걸린 생명의 과제이다.



Ⅱ. 진실된 아버지께서 말씀한 것을 전한다. (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단호하게 증거하시자 돌아오는 반응은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25f)였다. 이러한 반응은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믿을 만한 증거를 내놔 봐라!’ 하는 투의 진정으로 믿고자 해서가 아니라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의 말투였음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답변에서 이해하게 된다.

바로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나면서 시각 장애자였던 사람을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셨지만 정작 눈을 뜨고 나서는 자기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9:36) 라는 믿음을 위한 질문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25b) 주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자신의 신분을 감추신 일이 없으셨다. 즉, 주님의 가르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들의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임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런 이유에서 덧붙일 것도 없이 그들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씀이다.

같은 안타까움으로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6) 이 말씀 속에서도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고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26f) 사실 그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주님이시니 그들의 그런 옳지못한 자세들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만은 그런 말씀을 자제하시고 판단하시는 일도 참으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자제하실 수 있는 이유를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26m) 여기는 사람들과 다른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맡김을 증거하고 있다. 저들의 간악한 행동들을 보고 있지만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하심에 의지하여 자제하고 있노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해야 할 역할에는 충실하고 계심을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26b) 하신다. 자신의 안타까움이나 판단과 비판은 자제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증거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빠뜨림없이 전달하고 계시다는 역할의 충실을 증거하신다.

이렇게 진실하고 진지하심에도 저들의 반응은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27)는 안타까움이었다. 이해의 기준이 하늘과 땅같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하셔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Ⅲ. 인자를 죽인 후에 알게 될 것이다. (28~30)

일깨우시고 교훈하시는 데도 저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들의 하려는 일을 생각없이 지체하지 않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죽게 되실 것을 내다보심을 말씀하신다. 그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이 일의 진행이 주님자신을 십자가에 죽인 후에야 겨우 알게 되겠지만 후회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28f)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 “인자를 든 후에”라는 말씀은 자신을 십자가에 죽인후에 라는 말씀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미 3:14에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여 놓고 서야 그를 알아본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나중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이 어리석은 행위의 책망을 반복적으로 듣는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3:15)

오늘 우리 또한 이런 잘못을 따른다면 그들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개그 같은 경우에도 이런 풍자를 더러 사용함을 본다. 자신의 밑에 들어온 좀 서투른 신입사원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다가 어느 날 보니 회장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이다.

물론 세상의 이런 경우는 그래도 마지막 절망은 아니지만 구세주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영원한 운명을 망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안타깝게도 주님의 이 예언은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b) 주님께서는 말이나 일이나 가르침이나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대로 말하고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사건마다 거절하고 대항하였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 고백이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고 하는 우리 모두가 누려야할 약속이고 누릴 수 있는 약속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감격의 고백은 당연히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는 이유 때문임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가르침에 모두가 무지하고 어리석고 듣지못하는 것은 아니었음이 다행히도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는 결과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언제나 많은 수는 거절하고 배척하는 일이 더 많지만 오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를 남겨 두셨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는 결과는 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말씀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꼭 같은 교훈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음은 이미 앞에서 거론한 바 있다.

이러한 신비한 가르침의 반응의 다른 면을 요한은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히 전달해 주고 있는 것도 또한 다른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과 다른 차원의 이면들을 찾아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가져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의 기록만으로는 이런 영적인 면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절망적 선언은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는 사랑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후 심판의 선언이다. 이런 입장에서 주님을 약속대로 믿고 예배하며 순종하는 사실이 얼마나 큰 감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제 약속을 누리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 세워주셨으니 정죄와 판단보다는 살게 하신 생명의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나누는 일에 주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늘 일상에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우리의 삶에 임마누엘 하실 수 있는 복된 삶이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