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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31~38 2020-05-3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람들은 비록 유한한 존재이긴 하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므로(전3:11) 진리를 알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앙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로 진리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보이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막연히 라도 불변하는 것들을 사모하는 것은 창조된 인간 본성의 욕구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셔서 빌라도에게 끌려 갔을 때 “네가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 “그렇다.”고 말씀하시고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b) 증거하시자 정치적인 욕심만이 가득한 빌라도 조차도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v38f) 물을 뿐이었다. 다만 빌라도는 거기에 대한 답변을 받지 않았다.

빌라도야 말로 사람들의 막연한 진리에 대한 갈증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물어 놓고 기대는 하고 바라면서도 거기에 답변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창조에서 타락과 율법의 부분에서는 이 “진리”가 거의 표현되지 않고 깊이 감춰져 있다. 사무엘하에 오면서 비로소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2:6) 라거나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15:20)는 표현이 사용된다.

시편119편에 오면서 142b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51b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160f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라는 고백이 등장한다.

현재 우리말 성경 번역본을 기준으로 보면 OT에는 거의 감춰져 있던 “진리”는 NT에 오면서 사용횟수가 거의 갑절이나 많이 사용됨을 본다.(성경의 기록된 양으로 볼 때 이러한 비율은 더 큰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럼으로 이 역사에 “진리”를 드러내려 오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진리”를 인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공관복음에 단 3회 사용된 “진리”는 이 요한복음에서는 18회나 사용됨으로써 비교를 허락하지 않고 특히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선언은 막연한 “진리”가 인격으로 표현되면서 그리스도의 귀중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진리의 역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 선언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한다 하시면서 그는 “진리의 영”(14:17) 이라거나 “진리의 성령”(15:26)을 소개하시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선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표현이 “진리”로 표현됨을 말씀하신다.

OT[(571)אֶמֶת, (543)אָמֵן, ← (539)אָמַן, 안정성, 확실함, 진실, 신실한, 옳은, 분명한, 참된, 진실로]; NT[ἀλήθεια, ← ἀ(부정)+λήϑω=λανϑάνω(숨기다) ἀληθής, 잘못의 반대, 참되다, 참되게, 진실성, 사실]

그러므로 “진리”의 일반적인 의미를 든다면 ‘숨기다’의 반대 개념으로 ‘들어내는, 폭로하는’ 같은 의미에서 ‘불변하는, 꾸준한, 믿을 만한’ 등등의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에서는 변함없이 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거나 불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진리에 적당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옳은 것이나 꾸준한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꼭 같이 존재할 수도 없고 계속될 수도 없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 길을 아스팔트로 잘 닦아 두고 거기에 차선을 그리고 차들이 달리게 하는데 미국과 영국이 다르고 우리 나라와 일본이 다르다. 꼭 같은 도로와 차량일지라도 각 나라의 만들어진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일본에 가서 운전을 하면서 우리처럼 오른편차선으로 달리면 그것은 면허증을 빼앗길 범죄가 되고 반대로 우리 나라에서 왼편 차선으로 달리면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법은 진리일 수 없고 약속일 뿐이기 때문에 만들고 만들어도 모자라고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성경적인 의미에서 헤아려 볼 수 밖에 없는데 “진리”는 빛의 성격이면서 들어내서 해결하는 역사를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부끄러운 죄를 꼭꼭 완전히 숨겨두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것으로는 죄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므로 들어내어 처리하는 구속의 역사만이 사람을 죄에서 완전히 자유 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Post Modern이나 New Age 적인 사상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세대가 순간을 즐기려 하고 근본을 부정하면서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진지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깊은 이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진리같은 용어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진부하고 재미없는 일일 수 있지만 바른 이해 없이는 분명한 해결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이해를 한번쯤 해볼 필요가 있다.



Ⅰ. 진리가 주는 자유,(31~32)

이 말씀이야 말로 그리스도교(Christianity)의 유일성(唯一性)을 증거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진리로 다른 세상종교와의 분리를 나타내는 생명의 약속이다. 인류학(人類學)에서 종교를 다루는 학자들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같은 선상에 놓고 종교를 분석하고 평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선언이 종교와 신앙을 분명히 구별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31f) 하심으로서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진리는 진리를 인정하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물론 다를 것이다. 상대적인 이론(理論)에 익숙해 있는 논리적인 사람들은 ‘왜, 그것만 진리(眞理)라 하느냐?’ 반문하게 된다. 그럼에도 진리는 진리 자체로 독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거짓된 사람으로서는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일지라도 진리일 수 없고 진리의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는 진리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31b)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내 말”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고 이 말씀을 이론이나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거하면[μένω, (주어진 장소, 상황, 관계 속에서)머물다, 거주하다, 출석하다, 남아있다, 서다]” 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에 살면 주어지는 결과가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하셨는데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닮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참으로” 라는 수식어가 있는 것으로 봐서 거짓 제자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므로 이 말씀을 좀더 가까이 이해하면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산다면 진정으로 나를 따르는 자가 될 것이며 나를 닮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이고 이렇게 된 사람이 비로소 진리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연결되는 말씀과 자연스럽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알지니”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부관계와 같이 긴밀한 관계를 의미함으로 역시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자’와 관련을 가진다. 이런 입장에서 진리란 머리(理性)로 배워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사는 삶에서 깨닫게 된다는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진리를 안 결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했는데 “자유롭게 하다[ἐλευθερόω, (도덕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면제되다, 해방하다]” 라는 의미를 볼 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가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하고싶은 대로 하는 방종이 “자유”가 아니라 어떤 책임에서 면제되고 해방된다고 하는 데서 평생을 빚과 채무와 같은 죄에 메여 있는 사람이 그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이 죄에서 자유는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구속이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자유를 제공한다는 복음적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게 한다.



Ⅱ. 종과 아들의 차이,(34~36)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제자들을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채무에서 벗어나게 되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확인했다.

앞에서는 진리로 인한 자유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유의 반대이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종의 상태를 지적하고 그럼에도 종과 아들을 비교하면서 자유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종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아들은 가능하다는 귀중한 생명의 논리를 증거하신다.

과거에도 자주 거론했다고 생각되는데 OT의 율법종교는 종의 종교라는 말을 한 것 같다. 사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법이 필요 없는 사랑의 관계인 반면에 종은 계약의 관계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하다.

편의상 v33을 다음 단락에 붙여서 생각하고 v34~36 석 절을 생각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 이 가르침도 중요하고 진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로 진실로를 반복하신다.

종은 기계적이다. 즉, 맹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목적이 없기 때문에 일이든 명령이든 시키는 것을 그냥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여기에 비해 아들은 자신의 목표를 둘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과거의 상태가 바뀌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35)라고 종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대로 증거하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종의 종교인 OT에는 영생이나 영원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결국 종과 아들의 운명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되고 있다.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을지라도 영원히 집에 거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아들은 그 집에서 난 아들이기 때문에 못났어도 부족해도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렇게 종과 아들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결과적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OT의 종의 종교속에 있었던 육신적 이스라엘과 새언약인 NT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복음의 차이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 여기는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요 진리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표현이 “아들(ὁ υἱὸς)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까지에서 죄의 고통과 갈등을 안타까워하던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를 소리 높여 감격함을 듣는다. 바로 조금 진행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고 감격하고 있다.

OT의 아브라함은 충성된 자였지만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아들이 나타나시기까지 이 땅에 종으로 섬겼고 종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온전히 충성하지 못하고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더욱 거역하였음을 연이어 이 말씀은 보여주고 있다.(삼하16:1~4, 므비보셋의 종 시바처럼 어떤 때는 속이기도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더욱 분명히 증거해주고 있다. OT의 하나님의 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달했던 모세와 그리스도를 확실히 구분해 주고 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히3:5~6f)

모세는 비록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자유 하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모두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여 영원히 살게 해 주셨다. 종이었던 모세의 역할과 하나님의 아들의 역할의 차이가 분명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Ⅲ.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33, 37~38)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이해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생명의 교훈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33절은 주님의 가르침에 반문하는 유대인들의 항의가 기록되고 있다.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시자 여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역사적으로나 당시의 상황에서도 조금은 다른 논리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됨을 반문하고 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

이스라엘은 과거 BC 722년에 앗수르에 유다는 586 이후부터 70여년간 바벨론의 포로 즉, 종 노릇하다가 귀환한 경험이 있고 당시에도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로마의 총독이 엄연히 와 있었음에도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는 변명은 그런 역사적 상황보다는 아마도 단일민족성을 중요시하여 지켜 왔다는 것에 대한 요즘 말하는 다문화 국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혈통을 지켜왔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신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37f) 계속 뒤로 가면서 보게 되겠지만 예수님께서 혈통만을 주장하면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정신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나 충성심은 갖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후손이라는 것 만으로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지만 v39b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즉, ‘말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이 아브라함과 같아야 그의 자녀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시는 안타까움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37b)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철저하게 순종하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위대한 이름을 지켜갈 수 있었는데도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 저들은 분명히 진리를 증거하고 계심에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저들의 마음에는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신들의 생각을 깊이 감추고 어떻게 해서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주님을 본다. 앞에서 진리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역사라고 하였다. 사실 복음은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마10:26; 눅8:17, 12:2)라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선언하심을 본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 이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의 자세를 그대로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먼저는 여기 양쪽의 아버지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아버지이시지만 예수께서 꿰뚫어 보시는 저 유대인들의 아비는 사실에 있어서는 저들이 입으로 말하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마귀였다.(44)

다음으로는 양쪽의 출처와 행동의 차이이다. “본 것을 말하고” -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본 것]은 어떤 것보다 확실한 것이지만 [들은 것]은 [본 것]보다는 불확실하고 무엇보다는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인 저들의 아비 마귀는 언제나 교묘히 속이는 속임수의 대가이고 빛이 아닌 어둠속에서 들은 것은 확인할 수 없는 곳일 수 있다.

신앙에 있어서 기록된 말씀은 대낮처럼 환하고 분명한; 한번도 바뀌지 않은 또 바뀔 필요가 없는 생명의 진리이다. 그렇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 옮겨지면서 바뀌고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내용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에는 누구나 직접확인해볼 수 있는 대낮 같은 진리를 모두의 손에 들려주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누구에게 들은 것이라도 진리인 말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는 데서 복음시대 이후로는 자연과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는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세상과 다르게 진리는 모든 것을 빛으로 드러내며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세상의 보이고 변하는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온전히 맡기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자유를 준다.

진리의 보호와 힘을 얻어 자유를 얻었다고 하면서 사실적으로는 죄의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 진리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고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한다.

육신적으로나 모형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삶에 진리를 수용할 수 없다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일 수 없다.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두움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확실히 보여주신 진리를 말하고 행하는 진리의 순종자로 그리고 어둠으로부터 들을 불확실한 것을 듣고 행하는 간격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