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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8:48~59 2020-06-14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도구로 죽이려고 시작한 주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시험은 많은 토론과 함께 여기까지 오게 되지만 서로가 의도하는 바는 완전히 달라서 예수님은 살리는 생명과 영생의 교훈을 가르치시는 대신 저들은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 주님을 넘어뜨리려는 흉계일 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해되지 못하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사람에게 쉽게 붙이는 표현이 ‘귀신들렸다.’는 표현을 곧잘 쓰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다르지 않았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오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기만 한다면 죽지 않고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것도 역시 육신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소화가 될 리 없었다.

주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입혀 주시고 그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는 막연한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너무나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조차도 메시아로 오실 주님의 오심을 기뻐했다고 증거하신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육신적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직 50도 되지 않은 주제에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며 또 다시 돌을 들어 주님을 죽이려 하지만 예수께서 조용히 성전을 빠져나가시는 것으로 이 8장이 마무리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으로 소화되지 않으면 한 마디도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경말씀이다. 항상 땅에서 난 자신의 배움과 경험이 기준이 되는 신앙의 이해는 세상의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신 말씀은 진리이다.

4가지의 소주제로 다루게 되겠지만 첫번째는 불신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에 불과하고 나머지 주제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적 증거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내용들을 다루게 된다.



Ⅰ. 귀신들렸다는 오해, (48~49)

저들의 심장을 찌르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라는 바른 판단을 들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속한 자로 돌아가야 함에도 이런 주님의 가르침조차도 고깝게 듣고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48) 이미 저들이 장막절에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주님께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7:20) 했던 말을 돌이켜 말하는 것 같다.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물론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도 아브라함의 순수혈통을 잃어버린 다문화 인종을 빗대는 말이며 유대인들로부터 천시당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4:9b) 물론 바로 앞장에서도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7:52)고 혹평한바 있다.

여기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49)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신다면 저들의 좋아하는 말로 기분 좋게 해주고 말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때문에 이런 애매한 말을 듣고도 참으신다는 답변이다.

나중 v52f에서도 다시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하였지만 이 기회에 우리는 비이신 하나님의 반대 세력인 어두움의 존재들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마태복음4:1~11에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3가지의 시험을 당하시는데 누가복음4:1~13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대상을 마태나 누가는 [마귀, διάβολος]로 나타내지만 같은 대상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하심으로서 마귀와 사탄을 동격(同格)으로 취급하신다.

역시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3)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 사도는 계시록에서 역시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9)고 하여 두 이름이 같은 존재임을 말한다.

NT성경에 쓰인 것을 보면 [귀신, δαιμόνιον, 60← pl. δαίμων, 5 거라사의 광인(群集形) - 마8:31; 막5:12; 눅829; 계16:14, 18:2 등 악마, 惡靈] [마귀, διάβολος, 38 비방자, 악마, 중상자] [사탄, Σατᾶν,← שָׂטָן, 36 적수, 하나님의 善의 대적] [Βεελζεβοὺλ(of Aramaic origin, Beelzeboul, 바알세불), 사탄의 이름, 집주인(마10:25)]으로 쓰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나 마귀 사탄이 하나님과 같은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성령이신 것처럼 이해를 하려하는데 마귀는 분명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아들과 성령이 동격(同格)으로 나타나지만 마귀는 사탄과 동격일지라도 귀신은 마귀, 사탄의 졸개들로 나타난다.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데도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귀신취급 하는 것과 같다는 데서 심각한 저들의 영적 상태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을 마치 귀신 취급할 수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판단에 옳지 않다고 함부로 ‘귀신이 들렸다’ 싸잡아서 몰아붙이는 것은 불신의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지 믿음의 사람들이 가질 자세는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Ⅱ.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 (51~53)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이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번 더 깊은 영적인 이치를 선언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이 약속도 엄연한 진리이기 때문에 참으로 참으로를 반복하신다. 또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내 말을 믿으면’이 아니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하신 것도 마음을 둬야 할 것이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믿지 않던 하나님께서 죄로 죽을 인류에게 주신 가장 확실한 진리요 은혜의 약속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했던 바울의 증거가 다시 한번 확인되고 만다.

“…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2) 이들은 나름대로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변명하지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온 어리석음을 보일 뿐이다.

우리가 이 흘러가는 역사(歷史)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는 육신의 눈에 보여진 것이 다가 아님을 안다면 육신이 이 땅에서 떠난 믿음의 선진(先進)들에 대해서도 “믿음으로 아벨은 …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b)는 증거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빈정대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 이들이 OT의 마당에서 난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주님께서 영생에 대한 교훈을 계속 주셨음에도 이런 안타까움에 여전히 머물러 있고 우리 역시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들과 다르지 않고 신앙하는 것이 오로지 육신의 형통이 모두라고 이해하고 말 것이다.

이래서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야 말로 영생이 걸린 귀중한 지식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할지라도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들처럼 어리석은 대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서(from)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by) 그를 위하여(for) 창조되었고”(골1:16; 요1:3)

이런 이유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b)할 수 있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수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보다 못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처럼 오늘도 신앙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상대적인 것들과 같이 이해한다면 그에게 영생은 있을 수 없다.

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가장 분명한 신앙적 고백을 드린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이 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Ⅲ. 하나님의 영광을 입은자, (50, 54~56)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적인 선언은 계속된다. 주님의 영광에 대한 선언이시지만 그 영광을 비록 유대인들이 알아주지 못하고 비판한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들도 말로는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 아버지심을 증거하신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50) 이 사실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증거하는 내용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하셨기 때문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 하심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 이 가르침도 아주 평범한 진리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신앙의 자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두번씩이나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라거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경계한 바 있다.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판단이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자세이지만, 이런 일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칭찬은 남이 하도록 하고 스스로 하지 말라!’ 상당히 흔한 동서양(東西洋)을 막론한 격언이다. 이를 너무나 분명히 아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라고 자신의 삶과 일치된 가르침을 주신다.

그러한 겸손한 주님께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라고 영광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f) 하였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온전히 돌려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의 광체를 그에게 비춰 주시는 것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주님께 그 영광을 입혀 주시는 분이 바로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b) 하신다. 그럼에도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55f) 하심으로서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 주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주님의 영광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이라 하신다.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55m)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신 고백이다. 그러나 이 고백 속에는 또한 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로부터 오신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함께 지적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b) 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로부터 온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배척하는 모순도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이미 앞에 v40에서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벨, 에녹,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적 자세를 말하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 역사 속에 메시야를 증거하러 왔다가 간 아브라함을 비롯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고 바라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정작 그 약속과 예언을 따라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들의 안타까움을 지적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영광을 받으셨던 것은 역으로 주님께서 항상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사셨고 그러한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변함없이 쇠하지 않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주셨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 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Ⅳ.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 (57~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라고 말씀하시자 이 증거 역시 육신적으로 이해한 저들은 더욱 분감을 품고 이제는 주님을 죽이려고 까지 달려들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예정된 희생 외에는 의미 없는 죽음은 철저하게 피하셨음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 이들의 잘못된 이해는 그들에게 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신앙한다고 하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과제임에도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에 견주어 생각하는 영적이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하는 섣부른 모습들이 문제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당연히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8)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시는 말씀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분감으로 이 사실을 거부한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59f)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좋아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벌을 더 잘 사용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죄성 때문일 것이다. 이 8장 서두에서 간음 중에 잡인 여자와 예수님께 돌을 들고 나타났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모르고 마지막까지 주님을 향해 이렇게 돌을 드는데 더 익숙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 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용서와 화해보다는 정죄와 판단에 더 빠른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보다는 밤낮 참소하기에 바쁜 마귀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59b) 이것은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던 것처럼 결코 죽음이 무서워서나 비굴해서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주시면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8) 말씀하심 속에서도 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심의 때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되지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세상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실없는 존재로 잘 못 이해시킬 수도 있다. 귀신이나 마귀 사탄도 사실적인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주님과 같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물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영광을 돌려드린다면 그 영광을 곧 우리가 입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계시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으로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주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