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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9:1~12 2020-06-21
그에게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정선해서 쓰고 있는 일곱편의 이적 중에서 여섯 번째 표적으로 이 맹인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어두움에 익숙해져 있어서 빛을 소망하는 마음조차 없는 그런 어두움의 사람으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상태이다. 오늘 이 사건에 언급된 맹인이 예수님을 볼 수 없었듯이 날 때부터 영적으로 소경인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또 이 맹인이 원해서 눈을 뜬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악한 인간들의 반응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하심을 나타내야 했고 이것은 절대적 은혜의 행위이셨다. 은혜란 우리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을 만한 조건이나 자격, 가치가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다.

나면서부터 상실된 시력을 사람은 회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인, 더듬거리면서도 이 땅에 자리잡고 편히 살려는 눈 뜬 소경들에게 참 빛인 밝은 소망 천국을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을 보는 것이다.

나면서부터 세상을 보지 못했던 불행한 인생을 주님의 제자들조차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부모의 죄 때문이라 느니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비난처럼 함부로 말하지만 어쨌거나 이 가련한 인생이 주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모형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와 함께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낮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장차 밤이 될 때는 하고싶어도 일할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경계도 새겨들어야만 할 중요한 신앙의 과제이다.

우리가 조금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치료의 방법조차도 이 시각장애자는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 마침내 광명의 천지를 보게 되고 어쩌면 바리새인들보다 더 바른 신앙이해를 갖게 되는 것도 역시 복음의 능력임을 배운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이 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에 대한 이웃들의 반응과 숨김없이 자신이 치료받은 사실을 그대로 증거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진실함을 이 사람으로부터 배운다.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일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役事)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 되고 계신 것도 다른 은혜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우리 복음 속에 거듭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람과 다름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로서 거듭남으로써 영혼의 눈뜸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사람처럼 자신 있게 나의 나 됨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하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나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Ⅰ. 비극의 바른 이해, (1~3)

우리 옛 속담에 “길을 가다 보면 중도 보고 소도 본다.” 말이 있다. 어쩌면 이 예수님 일행이 겪는 것 같은 일상일 수도 있고 이 나면서 시각장애자 된 사람의 운명 같기도 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인생에 교대로 있을 수 있다는 격언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로 시작된다. 마치 우리 인생길을 가는 것같이 좋은 일 궂은 일은 누구에게나 예고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는 삶의 일반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왜, 제자들이 다른 것들을 보면서는 조용하다가 이 가련한 시각장애자를 보고 말을 시작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공부하고 배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쉬운 것을 본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는 질문은 사람의 불행이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불행하게 된 원인이 되는 죄가 구체적으로는 당시나 오늘의 시대에나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모든 불행이 죄값이라는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 질문 자체가 대단히 모순된 내용이다. 먼저 나면서 시각장애자로 태어났는데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면 사람이 나기 전의 전생을 주장하는 흰두교나 불교적인 윤회설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없다.

만약에 모든 불행이 죄로 인해서라고 한다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거나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는 말씀들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또 부모의 죄로 인함이라는 것도 비슷한 견해로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14:18)라거나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는 말씀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보다 중요하게 볼 내용은 하나님의 형벌은 당대에 그칠 것이라는 것와 어머니의 죄 중에서 잉태되고 났다는 의미이다.

오늘 말씀과 더불어 상고해야 할 성경은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왕하14:6요아스→아마샤; 대하25:4; 렘31:29~30; 겔18:20)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OT의 율법서에서 역사서 선지서 대부분의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죄에 대한 형벌의 선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각장애자의 불행의 원인은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는 말 자체가 바른 질문이 되지 못하는 유대사회나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세속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답변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기에 대한 바른 이해를 듣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3f) 우리가 앞에서 지적했던 대로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광명천지를 볼 수 없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건설적이고 복되신 해석이 연이어 주어진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b)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불행을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실 시기로 보는 견해는 인간세상에는 없는 논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영생의 논리이다. 앞으로 우리도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어려움이든지 신앙으로만 대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 어떤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는 계기가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선수이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려움이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복된 과제로 이해하시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Ⅱ. 빛이 있을 때 빛을 믿으라! (4~7)

주님께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b) 말씀하시고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가능한 때와 이 시각장애자에게는 드디어 눈을 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귀중한 과제를 주시는 내용이 계속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 반드시 어떤 일이든지 가능한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되는데 그 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라고 말씀하시고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심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과 그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말씀하신 것이다.

비슷한 교훈을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일을 앞두고도 말씀하신 바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9~10)

여기에서 중요한 시기는 “때가 아직 낮이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라신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앞의 8장에서 이미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때가 아직 낮이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때를 빛으로, 낮으로 표현하시는데 좀더 분명한 표현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어두움의 사탄은 뱀을 사용하여 어두움의 방법 즉, 거짓으로 하나님의 빛의 법을 어기게 만들어 빛과 희락의 에덴에서 사람이 쫓겨나 어두움에 거하게 되었다.

그후에 율법이라는 달빛 같은 광명을 주셨지만 역시 달빛은 한계가 있었고 정오의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마침내 죄의 어두움을 여지없이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고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주시므로 죄의 대가는 완전히 지불해 주셨다.

그럼 지금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이기 때문에 밤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은 육체로 하셨지만 이제는 거룩하신 성령으로 임무교대를 하셔서 이 땅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여전히 낮이 지속되고 있고 이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일, 구원의 일을 빛이신 성령과 더불어 감당해야만 한다.

자신을 빛으로 선언하신 주님은 이제 이 육신의 어두움속에 있는 시각장애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빛의 역사 즉, 일을 시작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6)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도 이 시각장애자의 입장에서나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역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라는 모습은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역사를 상상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우리 사람의 생각에는 진흙이나 먼지는 눈에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의 타액 즉, 침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조차도 유쾌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움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인생을 새롭게 다시 창조하심에서 이런 처음 창조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이 아닌가 이해되어 진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첫번째로 보시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방법이셨다. ‘비록 맹인이지만 제 눈을 어떻게 보셨길래 하필이면 흙에 침을 섞어 바르십니까!’라고 항의할 만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믿음의 테스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7f) 그냥 그 자리에서 낫게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보이지 않는 눈으로 실로암 못에까지 가서 씻게 하신 것 역시 시각장애자에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주석이 추가되고 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7m) 결국 이 맹인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인 이 사람의 치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이해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b)였다. 하나님의 치유는 전적인 은혜 즉, 받을 사람의 입장이기보다는 주님의 역사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순종이 요구되고 있다. 맹인의 형편에서 실로암 못을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 시각장애자는 순종했고 그 결과 빛을 얻게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이 치료의 역사는 나면서 눈 뜬 맹인 된 영적인 소경인 죄인들의 하나님을 뵐 수 있는 모형인 것이다.



Ⅲ. 은혜를 입은 사람. (8~12)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논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것인 반면에 이 9장의 특징중의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눈 뜨임을 받은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과 대부분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서 주는 도전은 우리 또한 신령한 눈 뜨임을 받았다면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처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역사 앞에 불신하는 바리새인들과 그 당사자와 논쟁이 여기에서부터 v34까지 계속되고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을 달달 외우는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이 사람의 답변이 더 성경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 체험한 사람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8~9f)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 앞에 주변의 사람들은 당연히 의아해하며 호기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들의 반응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더욱 인정하는 증거가 되면서 본인에게는 모든 것이 변화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증거이기도 하다.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9b) 이웃 사람들이 이 본래는 구걸하던 사람의 삶의 변화를 보고 놀란다. 심지어는 눈 뜬 이 사람을 ‘그 사람과 비슷하다’라고까지 말하지만 이 사람은 돌아보기 싫은 지긋지긋한 과거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과거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 은혜 받은 사람이 맞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거역하던 자신의 수치를 숨기지 않는다. “…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 평생에 볼 수 없는 이 신기한 일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이 신기해 할 정도의 변화를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OT성경의 역사에도 나면서 맹인 된 사람이 눈을 뜬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시각장애자로 태어났음에도 이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참 진실한 고백을 듣는다.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도 않았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고백이야 말로 가장 효과 있는 전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짧은 증거는 정확하고 분명하다. 의무적인 것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 이 사람은 눈을 떴어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는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를 가져온 분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나의 인생을 사람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곧 찬양의 제사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히13: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아난 사실을 확인하고야 믿음을 고백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말씀하시는데 아마 이 시각장애자를 마음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짐작된다. 베드로 사도도 이런 사실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칭찬하고 있다.

시간상 이 사람의 증거를 다 풀이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 남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보다 나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실을 증거하는 것보다 호소력 있는 전도는 없다.

이 호소력 있는 증거는 그대로 효과를 나타낸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12f) 그 사람이 구원받은 증거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만나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전도의 효과는 ‘너를 그렇게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라면 나도 만나보고 싶다.’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 주님을 뵌 바 없기 때문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12b) 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否認)이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주변 사람들이 아닌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에서도 이 이름없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에게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증거함을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냉대와 따돌림을 당하며 구걸하는 이 시각장애자가 사람들로부터 받는 동정은 동전 몇 개이었겠지만 주님은 사람들이 줄 수 없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좋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주심으로 인생에게 일어나는 고난은 반드시 비극만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 때야 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때요, 비극을 행복으로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실 기회임을 확신하고 이 맹인처럼 자신의 안타까움을 철저하게 주님께 맡기자.

이 사람처럼 죄와 어두움의 절망을 주님으로부터 해결 받았다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킬 만큼 확실한 변화를 나타내고 나에게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표적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증거의 역할을 기쁘게 감당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