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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9:13~23 2020-06-28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오늘 제목은 사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묻는 질문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b)물으신 후에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하신 질문과 같다.

오늘의 질문은 눈 뜬 시각장애자에게 바리새인들이 물은 질문이지만 누가 묻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답변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과제이다.

이 역사 속에 오셔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 사람이 어떻게 대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에서는 물론 차이가 없겠지만 각 사람의 영원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한 종교 창시자로 이 땅에 왔다 간 석가나 공자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이다.’라는 가장 일반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와 나의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주님을 바라는 자들을 위하여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인류의 구주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명령하신 희생을 기념하는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 자신들이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역사적으로 없었던 이 주님의 사역을 두고도 전통적인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평가때문에 의견이 분분하고 분쟁이 일어나는가 하면 처음부터 불신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해 보려고 의심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증거함으로 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불이익을 피할 것인가 감당할 것인가의 구별도 오늘 본문에서는 보게 된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있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다면 그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의 불이익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참된 영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Ⅰ. 빛의 역사의 사각지대,(13~16)

이 요한복음을 계속 나누면서 앞에서도 이미 안식일의 문제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힌 경우가 더러 있었고 이런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시는 일을 저들 때문에 그만 두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이런 내용까지 볼 수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눅6:7)

그러나 주님은 계속 괴롭힘과 항의를 받으시면서도 안식일에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고치시는 것은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의 바른 정신을 알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접근하는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런 분명한 주님의 의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각이나 반응은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종자가 바뀔 수 없다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전에 맹인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13~14)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왜 이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여기에 기록되고 있는 이유를 한가지 찾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어떤 일에는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여러가지인데 그냥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방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직접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맹인의 눈뜬 것을 보고 눈이 치료되고 천지를 보게 된 것에 박수 쳐주고 격려하면 될 것임에도 이 사람들처럼 끼어 들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생산적이고 소망 적인 역할을 위해서 끼어든다면 다행이지만 문제를 만들고 크게 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들이 이 시각자애자였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감으로 조용해질 문제를 키울 뿐만 아니라 나중에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각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15f) 이웃 사람들과 그가 시각장애자로서 구걸하던 사람임을 알든 사람들이 묻는 질문을 여기서 또 듣게 된다. 안식일에 민감한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이 안식일에 눈을 떴다는 사실을 듣고 가만 있으면 오히려 바리새인이 아니지 싶다.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15b) 시각장애자였던 이 사람의 답변은 바뀐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실로암 못을 빼 버렸을 뿐이다. 그가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소개하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분명히 전달했지만 이미 시비거리를 찾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어느정도 짐작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된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16f) 항상 주님과 신앙적인 논쟁을 일삼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시비거리가 주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도 조심해야할 신앙적 자세로 어떤 말씀한구절을 가지고 견주어서 이 말씀을 어기고 있으니 올바르지 않다라고 쉽게 취할 수 있는 모습이다. 지금도 어떤 종파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초막절이라는 OT의 절기를 지키면서 스가랴14:18b~19의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고까지 얘기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가 이 스가랴서의 말씀이 부분적으로는 계시록에 인용되고 있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이 복음시대에 우리가 그대로 지켜야할 법인가를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런 안타까운 정죄나 판단을 그렇게 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여기서도 사람들이 나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16b) 이 사람들은 분명 바리새인들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근거로 이 일을 행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옳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는데 그래도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보다는 바른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b) 하셨지만 그 일반적인 은혜조차도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은혜의 사각지대가 어느때 어느 곳에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도 있다. 이왕에 거저 주시는 은혜는 생명의 빛으로 풍성히 받는…



Ⅱ.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불신,(17~20)

하나님의 언약과 이루어진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감사로 소화하고 받아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그렇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음 아프셨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16)라는 상황은 다시 시각장애자였던 당사자에게로 불똥이 튄다.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 문제는 저들이 이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려는 자세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의 올무를 잡으려는 저들의 간교함이 여기에도 나타난다.

이 사람은 “…선지자니이다 하니”(17b) 하지만 이러한 답변이 그들이 기대하는 답변도 아니었을 것이고 완벽한 신앙고백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 중에서 그래도 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주님께 대하여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18) 주님께 대한 불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불신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조차도 의심하는 것으로 번지고, 계속되는 질문이 진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세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저들의 이러한 자세속에서 의도하는 바가 이미 어느정도 드러나고 있다.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9) 분명한 사실임에도 그의 부모까지 불러서 확인하려고 하는데 어떤 불신을 확인하려는 이러한 자세는 진리를 간절히 찾고자 광부가 땅 깊숙한 곳까지 파고 보물을 찾으려는 것(욥28:3~4)과 다르게 그들의 마음 속에 불신을 깔고 있는 것을 그대로 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지적하신 바 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아무리 증거가 많아도 믿음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증거들은 오히려 불신의 도구로 역할 하게 됨을 본다. 이래서 신앙의 기초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부모도 이들의 묻고 있는 의도를 어느정도는 알아차렸기 때문에 되어진 상황보다는 그 상황 이전의 사실적인 부분만을 말하고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20)

이것은 어쩌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표적을 보여 달라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미 증거는 넘치고 풍부할지라도 믿음으로 보지 않는 이상은 그 증거들을 오히려 의심의 도구가 된다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저들의 요구도 거절하심을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마16:4)”

우리가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았다는 사실조차도 믿음이 없으면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적도 있다. 사실 우리 모든 삶이 믿음이 없이는 가능한 것이 없음에도(걷는 것, 차, 배, 비행기) 영적인 믿음에 관한 한은 사람들의 완악함을 보는데 역시 빛의 역사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 속에서 늘 의심을 걷어내고 믿음의 사각지대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Ⅲ. 진리를 따르는데 오는 불이익,(21~23)

이 세상이 진리로 다스려지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 인정을 받고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담의 범죄이후 이 세상은 의로운 사람이 쳐죽임을 당하고 억울한 피의 하소연이 하나님께서 땅에서 들린다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던 상황(창4:10)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이를 완전히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의 저주를 친히 감당하셨음에도 이런 일이 마지막 역사까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세력을 완전히 묶어서 영원한 저주의 무저갱에 던져 넣으실 때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로 난 불쌍한 아들이 눈을 떴다는 믿기지 않을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그것이 시비거리가 되리라고는 이 부모들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엄청난 치료의 역사를 경험했는데 그 당사자가 아들이 맞느냐 아니냐는 확인조차 당시의 상황에서 쉽지 않은 답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은 알지만”(20)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21f) 이 답변은 어쩌면 진실된 답변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소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 아들에게 이 어려움을 떠 넘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1b) 그냥 단순한 입장에서 이렇게 답변을 했다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지만 뒤따라오는 내용이 이렇게 대답하게 한 이유를 밝히고 있기 때문 안타깝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22) 즉, 어떻게 하든지 자신에게 오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녀를 낳아 키워본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들이건 딸이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때 그 자식에게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괜 시리 무엇인가 죄 지은 것 같고 미안스러워서 더 정이 가고 잘해주려고 하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이 부모는 조금은 다른 것을 본다. 평생 시각장애 때문에 구걸하며 자유스럽지 못했던 아들이 생각지도 않은 형편에서 그 평생의 짐이 벗겨진 것은 기쁨과 감사의 일임에도 자신들이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의 짐을 살며시 그 가련한 아들에게 밀어 버리고 있다.

또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유대 사회의 보호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이유를 봐도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고백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는 약속은 유효한 것이다. 즉,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바른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생명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모의 입장에서 그런 상황이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라는 형편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22)는 사실을 요한은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이다.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에게 미치는 저주를 자신이 친히 감당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놓일 수 있게 하셨다.

그와는 다르게 이 부모는 모처럼 아들에게 광명을 찾아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받을 수 있는 불이익 때문에 거절해 버리고 만다. 오늘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작은 것에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 받음에 합당한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생을 누리는 실제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밝은 정오의 태양빛도 가리는 것이 있으면 비칠 수 없다. 그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을 싫어하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미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원치 않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려고 근거를 찾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도 불신의 근거가 될 뿐이다. 손에 잡히는 증거를 준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던지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맛봤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불이익도 기쁘게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않기 위해 감당하는 불이익은 주님께서 잃은 것과 비교될 수 없는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