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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0:31~42 2020-08-09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반응 특히,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유대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은 오히려 반발이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돌로 쳐 죽이려는 험악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유대 사회에서 돌을 던져 죽일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다른 신을 섬기자고 선동하는 자나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패역한 자식같은 사람들로 가장 잔인한 극형의 대상을 처벌하는 방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수긍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을 던져 죽이려 하자 예수님은 어떤 이유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는가에 항의하신다.

유대인들의 답변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감히 하나님과 자신을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고 사실 신성모독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맞다. 가령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해도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은 율법의 역사 속에도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위기24:10~16에 이스라엘 여인과 이집트사람 사이에서 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다가 가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명령하신 바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은 저들의 이해가 부족할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라고 하느냐고 오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재판장들을 신이라고 한 성경의 사실을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조차도 신이라고 칭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늘의 역사를 일으키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패할 수 없는 성경이 가르치는는 것이라고 증거하신다.



Ⅰ. 과연 누가 신성모독자인가, (31~33)

바로 앞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 것에 대한 반응이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1)인데 사람을 살려야 할 종교가 사람을 죽이려는 데 급한 것은 문제가 있다. 진리는 언제나 자기 희생적이라면 거짓은 언제나 상대를 죽이려 하는 것이 흔한 역사속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복음의 선포도 그렇고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고 나타나는 기성종교와의 비교에서도 언제나 진리의 사람들은 비 폭력적이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저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 한다고 신명기13:1~5의 어떤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 기적과 이적을 보이면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자고 부추길 때는 그를 죽이라는 말씀에 근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자고 부추긴 적이 없음에도 저들이 바른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자고 하는 위험천만의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대응하시는 v32의 우리 주님의 반응이 더 논리적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들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시키고 계시다. 즉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은 자신이나 사람의 생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증거하신다.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선한 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어떤 것도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려는 데서 거짓과 해악을 끼치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없으셨다. 오로지 고통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궁극적으로는 죄에 메여 고통 하는 인류를 그 죄악으로부터 풀어 자유케 하시려는 모형으로 낫을 수 없는 질병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셨다.

“너희에게 보였거늘” 앞에서 이미 주님께서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1) 말씀하신 바 있다. 또 나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셨을 때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18:20)이라고 증거하신다.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감추거나 몰래 행한 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앞에 떳떳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만을 선포하시고 나타냈었다는 증거다.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32b) 하시는 데 사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반박할 근거가 저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33f)는 데까지는 유대인들도 말꼬리를 잡을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색한 저들의 변명은 한마디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이었다.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죄의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인다.

그 신성모독의 내용은 바로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b)고 말하는데 이들의 영적인 상태를 바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 위의 어두움과 불꽃 가운데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떨며 두려워하여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 달라고 겁을 먹었던 저들의 조상과 다름이 없다.

결국 신령하신 하나님과 깊은 교통이 가능했던 모세는 사람들이 그처럼 두려워하는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며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오로지 육신적인 판단과 생각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저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으로만 끌어내리려는 저들이야말로 참담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바른 영성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영적인 일을 육신적이라고 판단하고 방해하고 거절할 수 있는 육신적으로만 신앙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는 데서 우리 각자의 영성을 항상 점검할 필요가 있다.



Ⅱ. 하나님의 아들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 (34~38)

이러한 유대인들의 영적인 어리석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해설하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이 다섯 절로 길이도 많지만 이 10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데서 중요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34) 이 말씀은 시편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의 인용이다. 즉,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백성들을 판결하는 재판장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물론 여기 율법이란 모세오경 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요한복음에서 표현하는 것만 봐도(12:34, 15:25) OT전체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즉, 이스라엘의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그분의 공의를 힘입고 백성을 판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으므로 신이라 일컬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내용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임시적으로만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분이 아니라 이러한 인용도 온전한 표현은 아니고 다만 저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심이다. 그럴지라도 그런 사람들을 신이라고 칭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야 당연히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같은 권위를 사용하시며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증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35) 이 말씀은 앞 34절의 인증이면서 확인이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하신 것처럼 기록된 진리는 바뀌거나 없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신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35b~36f)를 붙여서 읽을 필요가 있다. 즉, ‘세상속에서 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에 신이라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영원속에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자야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는가!’라는 의미이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6) 세상과 다른 영원속에서의 가치와 일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해설과 함께 자신이 행하셨던 이적의 사실을 덧붙여 증거하신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37)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같이 그냥 무능한 보통사람이라면 굳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사실 하늘의 성품과 신비를 갖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름이 없는 오직 육신적으로만 살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우리 현실의 의미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주님의 두려운 증언이다.

그러나 저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전의 증거를 다시 선언하신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38f) 물론 여기에 “그 일”이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이적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찌 보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 “그 일은 믿으라”

그러나 이 말씀을 거꾸로 이해하면 어려움은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로 바꿔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믿음으로 출발하게 될 때 비로소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8b) 하시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늘 이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만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니라는 잘못된 틀을 먼저 만들어 놓는 것이다. 반대로 비록 육신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나 자신의 기준, 내가 만든 기준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어리석음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많다. 이제부터 라도 하나님의 하신 일에 나 자신을 복종시킨다면 그 역사들은 나를 위한 것이 되고 어려움 없는 이해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Ⅲ. 불신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믿음, (39~42)

이 10장에서는 계속 유대인들과 대화를 하셨지만 그들은 얻지 못하고 여전히 배척속에 그들과 해어지지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되는 주님의 영성과 능력을 보게 된다. 계속적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내쫓거나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한적한 장소에 가 계셨지만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그 곳에까지 모여왔음을 본다.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이었다. 7:30에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하였고 같은 내용이 7:44, 8:59과 눅4:29~30서도 읽을 수 있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40) 이미 앞의 3:22~23에 언급했던 장소로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던 곳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거기에 세례를 주던 세례 요한에 대해 더불어 말하고 있는 내용을 본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41)

먼저는 여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사람들이 적은 수가 아니었음을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그리고 바로 뒤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는 상상하지 못한 큰 결실이다.

적당한 비유가 될 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도 밤에 빛이 있는 곳에는 곤충들이 모이고 집어등을 밝게 켠 곳으로 바닷고기들이 모여듦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신령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은 이미 OT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된 사실이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1~3)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m) OT의 선지자들은 이적을 행했던 사람도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만 전한 선지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극찬하신(마11:11; 눅7:28)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자 요한은 사실 이적은 없는 독특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회개하라고 비수같은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였다.

예수 그리스도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마12:38) 당시 사람들의 평가처럼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m) 그의 증거는 사실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사실 선지자는 선지자 된 표적이 있어야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선지자의 예언의 진위성이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은 거짓선지자들도 더러 있었고 그들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실체를 들어내 보이셨고 또 그런 선지자들을 경계하신 내용도 더러 증거되었다.

그런데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41b)는 평가로 요한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진실되고 중요한 역할을 한 선지자였음이 입증된 샘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말씀이었음은 당연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안다고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활동장소인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오해받고 푸대접을 받으셨는데 사람도 별로 없는 이 외곽에서는 몰려온 사람들로 인정을 받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사람들의 이런 확신의 이야기가 나눠지면서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는 결과를 보게 된다. 마치 바울이 로마서11장에서 증거하는 것처럼 참 감람나무가 찍힘을 받고 돌 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는 구원의 신비를 보는 것과 같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요한 사도가 선정한 일곱가지의 표적 중에 마지막이면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의 절정과 함께 또다른 주님의 사역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은 그분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범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장이나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범할 수 있는 말씀에 어긋난 종교가 자주 범할 수 있는 죄악이다. 이래서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데까지 자라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행하시거나 가르치신 모든 이적과 말씀은 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었다. 오늘 그 아들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또한 주님처럼 폐할 수 없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확신에 찬 하늘의 사람들로 자라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외형적으로 그럴싸한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사모하여 그분을 찾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에게 더욱 믿음을 주시고 사랑하신다.

비록 세례 요한은 이적은 행하지 않았지만 주님을 증거하는 바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칭찬받고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오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분이 오라면 가고 전하라면 전하는 단순한 순종을 기뻐하신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폐할 수 없는 성경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