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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1~16 2020-08-16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우리는 요한 사도가 선정한 일곱 이적과 함께 대중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일곱 표적을 다시 살펴보면 ①물로 포도주를 만드심(2:1~11); ②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③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치심(5:1~47); ④오천명을 먹이심(6:1~41); ⑤바다위로 걸어가심(6:15~21); ⑥소경을 보게 하심(9:1~41); ⑦나사로를 살리심(11:1~57)이다.

이 마지막 표적이야 말로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의 증거의 절정에 이르는 사건이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아직까지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일으킨 사람은 없었었다. 그러나 단 한 분 예외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셨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자들이며 죽음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이 죽음의 잠을 깨울 수 있는 이는 단 한 분 밖에 없다. 오직 인간의 생명을 친히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이다. 맹인이 맹인으로 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선포하셨던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병과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11:4)고 선언하신다.

과연 누가 이런 자신 있는 선언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나는 시체 앞에서 “나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감격의 절정을 늘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과정과정 속에서 계속 나누겠지만 주님께서는 공관복음에서도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도 있으셨다. (마9:18~26; 막5:21~43; 눅8:40~56) 물론 이 내용 가운데는 12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장례를 치렀고 자연의 화학적 반응으로 부패가 이뤄져가는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을 살리시는 사건은 마치 흙을 뭉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일으킨 처음 아담을 만드신 것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창조의 사건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내용은 이 사건의 발단과 생명회복을 위한 접근까지의 시작부분을 다루게 되는데 주님을 극진하게 섬겼던 나사로 가정의 갑자기 당한 어려움으로 인한 호소와 사람의 감정과 그것을 다스리시고 사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주님의 주변에서 오해하고 급하게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보게 된다.



Ⅰ. 개요와 상황(1~5)

죄진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병은 언제 어디서나 예상할 수 없이 평화와 행복의 파괴자로 나타난다. 어떤 것은 가벼운 감기같이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떤 병은 걸린 사람이 주어진 일반적인 생명조차도 다하지 못하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질병도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 주변에 가장 가까운 인물 중에 한 가정이 이 나사로의 집이었고 두 누이는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자신의 소유를 아까워하지 않고 사용하는 주님의 복음을 위한 일꾼들이었다.

물론 오늘 본문에도 소개되고 있지만(2) 다음 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붇는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이다. (12:1~8)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이 두 자매조차도 서로 경쟁하듯 주님을 사랑하는 내용도 엿볼 수 있다. (눅10:38~42)

이 11장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역사의 시작은 오히려 “병자”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도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절망의 상황에서 만나는 소망과 기쁨은 그만큼 감격이 크기도 하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1) 이 첫 절로 볼 때는 한 가족이 아닌 것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마다 자주 머무르셨던 “베다니”와 죽어 썩기까지 하였지만 다시 살아난 병든 “나사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사로[Λάζαρος, (אֶלעָזָר,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 마르다, (Μάρθας, 아람어에서 유래, 여주인, 안주인); 마리아, (미리암, Μαρίας, Μαριάμ, מִריָם, 반항, 반란, 모반)”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2) 드디어 이들의 가족 관계를 소개하면서 특히 마리아는 주님께 이렇게 헌신적인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다음 v3, 5은 이 가족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관계를 증거하고 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여기 나사로의 누이들은 특별히 주님 계신 곳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치료를 구했고 거기에 대한 주님의 모습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는 사랑의 관계를 요한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궁금증은 ‘이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고 특히 사람까지 보냈는데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죽어 장사되기까지 한 상황으로 갔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주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병들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갔기 때문에 오히려 영광은 컸고 주님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극진히 사랑을 입는 성도도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일들을 당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영원한 세계 속에서 반드시 보상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두 자매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 주님께서 돌아오시 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32) 라는 탄식의 불평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m) 선언하신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어려움을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어려움과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없이 당하는 어려움은 기대할 것이 없다. 오늘도 혹시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가 있는가 여전히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Ⅱ. 빛에 다니라(6~10)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랑하시는 오라버니가 병들었으니 와 달라는 요청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 이러한 주님의 응답에 늦어 짐은 오늘 우리도 경험하는 일들이다. 어떤 일은 너무나 급해서 발을 동동 굴리면서 급하게 기도해 보지만 여전히 잠잠히 계시는 주님을 경험할 때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도 시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사람의 생각에 늦어질 뿐이지 하나님께는 결코 어떤 것도 늦어 짐이 없이 계획대로 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오히려 우리는 급하게 설치다 기회를 일거나 일을 그릇치는 경우들도 더러 경험하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의 응답보다는 주님의 뜻에 조용히 맡겨 드림이 이래서 중요하다.

그런 입장이시기 때문에 이 와중에서도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계심을 본다. 즉 어두움에 다니지 말고 빛에 다니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러한 가르침은 그 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역사가 닫힐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진리이다.

나사로에게로 가야할 시간이 되자 주님은 비로소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7) 하셨는데 주님의 역사와 움직이심은 이 세상의 시간 기준에 두지 않으시고 스스로의 뜻에 맞게 움직이심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우리 역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일은 더러 있을 것이다. 항상 급한 우리 자신들이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오히려 더 부정적이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 제자들은 병든 나사로를 고치는 문제보다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더 크게 여겨졌던 것을 본다.

앞에서 이미 유대인들의 주님께 대한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8:59f),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1)이란 상황들을 봐왔던 제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베다니로 가시려는 주님께 경계를 부탁드림은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스승을 아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경우에도 오히려 귀한 교훈으로 답하신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다 사용하셔서 빛에 다닐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9) 이것은 평범한 사실이면서 진리이다. 빛은 밝은 광명과 생명을 의미하고 밤은 어두움과 죄와 죽음을 의미함으로 하나님의 허락과 이끄심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누릴 수 있으므로 빛에 다니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행하는 것이 빛에 다니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에 순종하며 행하는 자들에게는 항상 앞길을 열어 주시고 주님의 뜻을 감당하도록 성령의 빛으로 역사해 주실 것이고 이것은 예정하신 시간과 조건에 대한 순종도 의미함으로 “낮이 열 두 시간이 아니냐” 말씀하신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9b) 이 세상의 광명조차도 사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대부분의 범죄는 밤에 이루어지지만 요즘은 낮에도 흉악한 범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역사가 죄의 어두움이 짙다는 의미이다.

사실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빛이심을 선언하신 바 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그러나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10) 하심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 죄의 어두움에 행하는 것은 자체적인 빛을 갖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나중 예수께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12:36f) 하셨다.

유대로 다시 가자시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안전을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에 순종할 때에 빛에 행하는 것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주신다.



Ⅲ. 요청에 늦은 응답(11~16)

주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지체하신 후에 나사로가 죽은 후에 야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다시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가시려 하지만 죽은 나사로가 잠들어 있다는 표현이나 그가 이미 죽었음을 밝히 말씀하시고 가자고 할 때는 함께 죽으러 가자는 제자들의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안타깝게도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동문서답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삼 년 가까이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여전히 성령의 역사 없이는 진리에 진보는 없음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여기에 “이 말씀을 하신 후”의 [이 말씀]은 당연히 바로 앞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의 교훈이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b)시는 주님의 말씀은 당연히 나사로가 죽은 것을 말씀하심 이었지만 제자들은 말씀 그대로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함을 본다. 데살로니가전서4:13, 14, 15에서 대표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도들의 죽음을 “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12)는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다.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그 병도 문제이지만 잠을 잘 이룰 수 없다는 데서 이제 잠을 잘 수 있는 정도라면 낫을 것이라는 엉뚱한 답변을 하는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시는 표현에서도 사실적으로 자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누이들도 깨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한 것 같다.

요한은 이들의 옳지못한 판단을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13)라고 덧붙이고 있다. 사실 그때는 요한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자신들의 영적이지 못했음을 돌아보며 이러한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다.

제자들의 반응이 이렇게 나오자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고 사실을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나사로가 죽도록까지 그곳에서 지체한 이유를 비로소 말씀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5) 주님께서 나사로 곁에 계셨더라면 모르긴 해도 앞에서 이미 마르다와 마리아가 고백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32)라는 내용을 인용한 바 있지만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시는 것은 전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시간에 맞추시기 위해서임을 또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15f) 이것은 단순히 회피가 아니라 더 깊은 뜻을 위해서였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m) 즉 제자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나사로에게 일찍 가시지 않았음을 인정하시고 사실 이 사건 말미에 기록되는 대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라는 기록으로 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과 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표에 맞추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5b) 이제 드디어 죽어 있는 나사로에게 갈 시간이 되었고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를 통하여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신 역사(役事)를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언제나 확인하고 믿겠다는 도마의 엉뚱한 행동이 여기에서도 또 한번 나타나고 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6) 이 표현은 앞에서 제자들이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신 주님께 드렸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라는 요청과 연결된 믿음이기 보다는 조금은 영웅심리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이러한 행동들이 두어 번 언급되고 있는데(20:25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에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충분히 즉흥적이고 모험적인 이런 엉뚱한 행동들을 할 수 있다는 데서 도마의 실수만이 아니라 우리의 경계의 대상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모든 일이 萬事亨通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사람도 중병에 걸릴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답변이 바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약속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경우에도 빛가운데 행해야만 한다. 즉,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시계는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했는데 사실 우리 사람의 보기에는 그렇다. 우리의 애타는 기도에도 하나님의 응답은 매우 늦을 수 있다. 그러나 응답이 늦을지라도 믿음을 지킨다면 그만큼 하나님께나 우리 자신에게 영광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