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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17~27 2020-08-2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상황은 바뀌었지만 그토록 안타까워하며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나사로의 살던 곳 베다니까지 오셨고 마르다는 슬픔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맞으러 가지만 마리아는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어 오셨다는 소식에도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경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렸는데도 모든 일들이 다 매듭지어 지기까지 응답으로 여겨지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안타까움의 끝자락에서 응답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는 허탈하고 안타까워 이렇게 그토록 사모하고 바라던 주님이 가까이 오셨음에도 허탈해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오셨다고 하는 것 자체로도 어떤 절망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는 가능성의 시작임을 감지할 수 있다면 참 다행인데 마리아는 아직까지 그렇지 못했지만 적어도 마르다는 그런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고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시험되고 준비되고 있다.

더 큰 영광과 위엄을 준비하고 오셨는데 이런 초라한 믿음을 보인다면 주님께서도 역시 서운하실 것임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모습에서도 주님이시다. 주님께는 탄식하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것도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처럼 흘려듣는 모습이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때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어찌할 줄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면 자신과는 너무나 먼 곳의 일로 생각하는 모습 역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마르다의 모습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현실에 수용하고 받아 드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생각과 판단으로는 당하고 있는 현실이 변화시켜 주실 주님의 약속보다 더 가깝게 여겨 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현실에 붙잡혀 절망하고 있는 두 자매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九萬里長天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나타남을 보게 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고 맡기는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역사를 일으키시고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선언이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 진실된 언약임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본문의 제목 같은 주님의 당부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시는 약속이다. 물론 이 언약은 이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바뀌지 않은 주님의 동일한 약속이다.



Ⅰ. 은혜를 위한 침묵(17~20)

나사로가 죽은 지 이틀을 계시던 곳에 계시다 베다니에 돌아와 보니 이미 나사로를 장례 치른지 훌쩍 나흘이 지나버린 그의 가족들에게는 조금도 기대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에 오라버니를 잃어버린 두 여인의 가정에 남은 것은 오로지 슬픔뿐이었고 그나마 그의 친척들이 찾아와 이 오빠를 잃은 두 여동생들을 위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가족이요 이 가정 역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족이었음에도 상황적으로는 소망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은 것은 무거운 슬픔과 침묵 그리고 값싼 위로만이 마음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초상을 끝낸 다른 가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묘사가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7)는 죽음이 충만한 무덤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평상시 이 가정과 교제하였던 가까운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이 안타까운 상황을 채우고 있는 내용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18~19)라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친지들과 친구들은 이 두 외롭게 남은 여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자신의 오빠만은 생명의 주님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이런 죽음의 이별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 여인들의 허탈한 슬픔을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죽을 것이라고 체념해 버린 사람을 보내는 것과 그럴 리가 없다고 행각했던 사람을 갑자기 잃는 것은 그 충격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럴 것이다’ 라고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 죽는 것과 전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의 절망감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v20의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는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가 됨직하다. 모르기는 해도 만약에 나사로가 아직 죽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의 집에 돌아오셨다면 마리아는 그 성품으로 판단해 볼 때 아마 버선발로 아니 맨발로 쫓아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남달리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눅10:39) 자신의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 드리는 마리아(12:3)가 드디어 주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는 모습이 이해되기도 한다.

배신을 당했을 때도 그 만큼 믿고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당하면 그 충격은 당연히 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수많은 병자들을 질병의 종류에 관계없이 치료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죽도록 버려두시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들을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7)

그러나 이것은 비단 그때 마리아 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다. 어떤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겠지!’ 기도하며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전혀 예상밖의 결과를 만나게 되면 ‘과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인가 아닌가!’ 개탄하는 모습일 때 그렇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치 못하면 ‘왜 하나님께서 COVID-19가 이렇게까지 퍼지도록 놔 두시는가!’라고 불평할 수 있고 불신자들조차 ‘거 봐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되도록 두겠냐!’ 오히려 비난해 올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약속하셨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미 말했던 것처럼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은 그것을 믿음으로만 받아 드린다면 비교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으실 하나님의 역사의 서막이 됨을 이 말씀을 통해서도 확신하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Ⅱ. 믿음과 현실(21~24)

여기에서는 언니 마르다와의 신앙상담이라면 다음 주의 v28~37 메시지에서는 동생 마리아와의 대화를 보게 될 것이다. 마르다 역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생명의 주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때 와 주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께 원망 섞인 불평을 본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우리는 앞의 4:46~54에서 갈릴리 가나에 다시 가셨다가 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죽게 되었을 때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라고 안타까워하였지만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내려가는 길에 종들이 아이가 낳았고 전한다.

그리고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불었을 때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는 기록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능력을 베푸시는데 있어서 거리가 관계가 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투정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또 다른 그녀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얼핏 들으면 이 고백은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들리지만 여기에 답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거절해 버림을 본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고백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고백에 합당한 역사를 약속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그럼에도 당장에 이루실 이 역사를 이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부활로 한정해 버린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특히 이 말씀도 실제적인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한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 중에도 부활신앙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있는가 하면 부활을 전혀 믿지 않고 오로지 현실에서의 복을 신앙의 상급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두개인들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같은 이방교회들에서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공회 앞에서 신문을 받을 때 그 공회의 사람들을 향해 부활을 인하여 이러한 일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b)고 증거했고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행23:8)는 내용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 나사로 가정도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마르다의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고백 중에서 뒷부분은 믿음이기 보다는 이성적이다.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좀더 바람직한 고백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믿나이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는 것을 믿는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실 모든 사람이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쌀을 씻어서 적당한 양의 물을 붇고 적당히 끓이고 뜸을 들이면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도 그대로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음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이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다시 살 것을 약속하시지만 이 역시 자신의 가진 고정관념으로 이해하여 응답하는 이런 마르다의 믿음은 사실 오늘 대부분의 이성적인 신앙의 대표적인 믿음이다. 여기서 나는 어떠 한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Ⅲ.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25~27)

이러한 불완전한 마르다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과 영원속에 모두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언하시는 내용으로 이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의 절정이다. 다시 확인을 하면 4:26 “내가 그(메시야)라”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10:9 “내가 문이니”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있는가! 감격스러운 주님의 자기선언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면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딤전6:16)라고 증거한 바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이 표현은 독특한 표현이다. 부활과 생명의 앞에 각각의 관사가 붙어 있어서 ‘그 부활, 그 생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활과 생명을 바라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 또한 짐승과 다른 속성이다. (전3:11,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런데 모든 사람이 바라고 기대하는 ‘그 부활과 그 생명’을 홀로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시는 표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활과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기 보다는 그 ‘부활과 생명’ 자체라는 표현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b) 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부활과 생명을 죄로 죽어 있는 인류에게 유효하게 하시려고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전인격적(全人格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나를 믿는 자는”이라 말씀하고 계시다.

전인격적이라는 의미는 삶의 어떤 부분 즉, 마음만이나 육체 또는 생각뿐만이 아닌 전체의 삶으로 라는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이 약속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는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죽어도, κἂν ἀποθάνῃ,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죽을지라도” “죽어도 살겠고”는 역시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단순히 육신의 삶 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귀한 영생의 약속이 그리스도인의 육신의 삶이 끝날지라도 중단되지 않는다는 약속인 것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 이 약속 역시 ‘살아서’라는 단서는 물론 육신을 포함하지만 “살아서 나를 믿는 자, ὁ ζῶν καὶ πιστεύων,” “살아서”와 “믿는 자”가 한 관사로 묶여 있어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받아들여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 영적인 상태의 사람을 의미하므로 역시 육신의 삶 만을 의미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살아서” 또는 “죽어서”의 차이일 뿐이지 v25의 내용을 좀더 심도 있게 설명하신 내용이 v26이다.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사실 늙어가고 낡아지는 육신을 가진 상태에서는 영원히 살고 죽지 않는 것은 복이 아니라 비극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9장에 다섯째 천사가 저주의 나팔을 불었을 때 무저갱에서 연기와 함께 올라온 황충이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그 고통은 전갈에 쏘인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계9:6)하는 것처럼 질병과 같은 고통에서 영원히 견뎌야 한다면 그것은 보이 아니라 엄청난 저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신 후에 마르다에게 도전하시는 말씀이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으신 것이고 이 질문은 오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 고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계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 되심에 대한 고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의 믿음은 뒤에도 한결 같지 못했다.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하셨음에도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하였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물으셨을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하였지만 이것이 실제적인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정작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 할 때 부정해 버리는 것을 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39f)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b)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문제들은 더러 나타난다. 하나님의 약속을 다 믿고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닥치는 현실에서는 부정해 버리는 깊이 배우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모습들은 신앙의 연륜에 관계없이 더러 나타나는 안타까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상적으로 미래에 영원한 약속이면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실 약속임을 의심치 않는, 그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시는 주님의 약속을 우리 각자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