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11:28~37 2020-08-30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맞으러 나온 마르다를 만나 전후사정을 투정과 함께 들으신 그 마을 어귀에 아직 그대로 서 계시고 마르다는 어쩌면 아직도 토라져 있는 자신의 동생을 주님께서 찾으심을 돌아가서 알린다.

오시기를 청했고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에 다시 오셨음에도 너무나 실망과 아픔을 크게 느꼈던 마리아는 언니가 먼저 주님을 만나 봰 후에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님 계신 곳으로 오지만 여전히 주님께는 원망스러운 투정을 하고 있다.

오늘의 내용은 주로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모습이지만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려고 죽은 나사로를 향해 다가가시는 주님의 모습과 함께 죽음 앞에 직면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 주변에 묻어 나옴을 본다.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시지만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랑하시는 사람들조차 그 죽음에 붙잡혀 희생물이 되는 안타까움의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나타내신다. 결국 사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죽음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자신이 해결해 주시려고 죽음을 맛보시는 데까지 낮아지신 주님이심을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님의 몸소 행하신 사랑을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고 확인해 주고 있다.

어쩌면 오늘의 내용은 그냥 다음 사건의 진행으로 넘어가는 별로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해설자 로서의 사도 요한의 쉼표를 찍는 것 같은 장면이지만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부분이 상황 전계의 해설로 대략 지나갈 수도 있는 곳이지만 두 자매의 동일한 안타까움의 표현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기도의 자세까지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Ⅰ. 마리아를 찾으신 주님(28~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는 지나가실 때마다 들르셨던 나사로의 집에 가시지 않고 마을 어귀에서 마르다를 만나 대화를 하시다가 마리아를 불으셨던 것으로 마르다의 동생에게 하는 말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의 집에도 가시지 않고 무덤에 가시기 전에 마리아를 부르셨을 까도 생각해 봄 직 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마리아가 자신의 환경과 처지가 바꼈다고 주님이 부르시기 전에는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마리아의 신앙을 역시 확인하고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배려밖에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누가복음8:22~25에 배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함께 건너다가 광풍을 만나 주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24) 소동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 책망하셨던 주님께서 역시 마리아에게도 같은 안타까움을 가지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만나 신앙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도 같은 교훈을 주시고자 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을 뵙게 된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28) 여기서 마르다의 “이 말”은 당연히 바로 앞 절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라는 신앙 고백 후에 마리아에게로 갔다는 말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마르다도 처음 주님을 뵐 때 오늘 본문의 마리아와 같은 꼭 같은 불평으로 주님을 맞았었다. 그러나 마리아를 부르러 갈 때는 이렇게 주님께 메시야 되심을 고백하게 된 변화를 보는 것이다.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28) 너무나 서운한 감정에 주님을 바로 맞으러 가지 못했지만 그러한 심정을 헤아리시고 마리아에게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그 주변의 문상객들이 알지 못하도록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29)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정도 잊어버리시고 관심도 없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오빠가 죽도록 버려 두셨다고 생각했던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신다는 언니의 기별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시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다시한번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30) 이것 역시 마리아의 믿음의 시험일 수도 있다. 시큰둥하게 집에 머물며 자신을 맞지 않은 마리아를 직접 찾아 가실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을 어귀에 서 계시면서 마리아를 오도록 부르심도 어떤 면에서는 믿음의 테스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꺼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표현들을 더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43:4)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7)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우리가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문제는 주님의 마리아를 부르신 줄 알 수 없는 문상객들이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31) 마르다가 마리아에게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 고 귀 띰을 해주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나가는 마리아를 본 문상객들은 울려고 오빠의 묘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어쩌면 이 모습이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지 못하는 아직 자라지 못한 믿음의 사람들일 수도 있고 막연히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주변의 비 신자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더불어 영적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같은 교회 안의 신앙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는 위로에 동참하기도 하고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인 말씀을 따라 가는 데는 하나되지 못하고 막연히 행동만 따라할 뿐인 교인으로 남는 문제이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가족 친척으로 남는 것과 같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의 가족이나 친척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Ⅱ.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32~35)

언니 마르다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는 기별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마을 어귀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는 마리아의 안타까운 하소연과 긍휼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반응을 보게 된다.

이 하소연을 다시 제목으로 잡은 것은 오늘 날에도 이 마르다나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도 가까이 받들고 섬겼던 이 사람들도 그랬는데!’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예수님을 뵙고 존경의 표시를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녀의 불평은 그의 언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v21에서 언니 마르다가 했던 것과 꼭 같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서운함을 어느정도는 살핀 바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병을 치료하시는 분으로는 믿으면서도 죽어 썩은 사람일지라도 부활시키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리아 자매 형제의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 주께서 만나는 어떤 질병이든지 못 고치심이 없으신 분이라면 이미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명의 주님이심도 믿어야 당연함에도 오늘 우리들 조차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이해의 수준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한정하는 선에서 부활이요 생명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어떤 어려운 일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서 그 응답을 스스로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정하고 꼭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응답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를 찾는다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경우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다할 수는 없지만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에게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5:10)고 응답을 주지만 나아만은 이 응답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아만이 …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라고 진노한다. 이것은 사실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이런 문제를 많이 보게 되는데,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대부분의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나아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기도는 해놓고 자신이 생각했던 응답이 아니면 믿지 않고 부정해 버리는 것을 본다.

또 미리 하나님께 어떤 응답을 주문하기도 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렇게 해 주시고 저렇게 해 주십시오.” 사실 이렇게 응답을 주실 하나님의 권한을 앞서는 주님의 주권을 넘어서서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 기도에 응답하실 리가 없을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 당부하셨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경우 가까운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이렇게 마르다나 마리아와 같이 시험될 수도 있음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믿음을 밀어내는 것도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인격인 지정의(知情意)는 항상 신앙을 뒤따르고 순종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부활이요 생명이신 능력의 주님이시지만 죽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에 그대로 동참하시는 긍휼의 주님이심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이 우리의 감정을 외면해 버리시는 주님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나 아버지 하나님은 감정을 잃어버린 그런 독제자가 아니시다.

마태는 이러한 주님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라고 표현하고 있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고 표현하고 있다.

누가도 주님의 슬픔을 전달해 주고 있는데 장래에 멸망할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서시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슬픔은 또 다른 비애(悲哀)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이 마리아 형제와 다르지 않은 믿고 맡기면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임에도 믿지 못하고 온전히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34) 예수께서는 그곳에 서서도 나사로를 일으키실 수 있었지만 마리아 형제가 죽기전에 오시기를 바랬던 공간적인 갭을 가지고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의 무덤을 물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감성(感性)을 언급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죽지 않을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하신 대로 죽지 않을 생영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 후에 죽음에 바쳐져 썩는 냄새와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의 운명을 안타까워하시고 동정하시는 사람으로 표현하면 연민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심을 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형제만 볼 것이 아니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어떤 안타까운 상황에서 ‘~ 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주님의 임재를 의심하지는 않는지 주님의 더 큰 역사를 준비하심을 믿지 못하는 신앙은 아닌지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는 …



Ⅲ. 주변 사람들의 반응(36~37)

예수 그리스도와 마르다 형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럼에도 ‘왜, 주님께서 이 가정에는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주셨는가?’ 하는 주변의 반응이 오늘 나눌 마지막 부분이다. 역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타나는 현상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말하면서도 다음에 나타날 여호와 이레의 사랑의 역사를 감지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고 우리가 또한 이런 모습이라면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36)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반응에 관계없이 불신의 사람들조차 감지할 수 있는 큰 것임을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 조그만 시간과 물질을 드리면서도 대단한 섬김 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그것과 비교될 수 없고 어쩌면 조건에 관계없이 사랑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요한 사도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감격스러운 고백을 쓰고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사랑을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이르기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증거하였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7)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나면서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렇게 사랑했던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는 것이다. 이 나사로가정에 나타났던 안타까운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다. 바로 앞장인 9장에서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당연히 “죽지 않게 할 수” 있으셨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을 이제 나타날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이들도 믿음으로 돌아선 것으로 뒤이어지는 내용들이 말해 주고 있다.

이 두절을 함축하면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죽지 않고 살게 할 수는 없었는가!’라는 것으로 역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한 마르다 형제의 표현과 맥락을 같이 하는 표현이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이 요한복음 11장의 절정(climax)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르다로부터 불평을 들으시면서도 역시 같이 사랑하시던 마리아의 믿음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바로 앞 10장에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밖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찾아 함께 사랑을 나누실 것을 증거하신 바 있다.

이런 주님이셨기 때문에 비록 슬픈 감정에 사로잡혀 그 사랑을 잠시 잊고 있었던 마리아의 믿음도 회복시키기 위한 모습을 여기에서 보았다. 이것은 그때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닌 오늘 우리의 지체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사랑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나는 너희 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잃어진 영혼도 동일하게 사랑하므로 찾도록 힘쓰거라!”는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라는 당시의 고백은 육체적인 임마누엘이었지만 지금은 어떤 상징이나 어떤 증거가 있어야 함께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시는 약속을 무시하는 것이다.

항상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산다면 주님께서도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우리가 확실한 믿음으로 회복된다면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죽지 않고 살게 할 수는 없었는가!’라고 한 마리아의 주변 사람들처럼 더 큰 주님의 사랑의 역사들을 우리 주변 사람들로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