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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38~46 2020-09-06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하나님의 영광은 선포되었고 사람들은 준비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시간이 다가왔다.

이 역사적인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하면 가장 가깝게 전달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 상당한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주님자신의 부활만큼이나 역사 속에 아직은 한번밖에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역사(役事)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 혼자서도 이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지만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에 사람을 동참시키실 뿐 아니라 주님을 불신하던 많은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신 사건이지만 그 중에는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사건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이 은혜의 역사를 유대인들에게 고자질하듯 알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불신의 세상의 완악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늘 이 역사적인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썩어서 냄새 나던 나사로는 다시 살리셨지만 여전히 다시 나이 들어 죽은 안타까움은 남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한계이다. 세 제목으로 다루게 될 내용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순종하면서 나타난 역사들을 오늘 우리 모두의 소망과 순종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영원히 다시 죽지 않을 생명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Ⅰ. 돌을 옮겨 놓으라(38~40)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면서 찾아간 무덤은 삶과 죽음을 갈라 놓은 큰 돌로 막혀 있고 모든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적막만이 놓여 있었음을 요한은 해설하듯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38f) 여기에서 “비통히 여기다, [ἐμβριμάομαι, 화가나서 씩씩거리다, 분개하다]” 그냥 슬퍼하시는 정도에서 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잡아 둔 죽음을 향해 진노하시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죽음은 사람에게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말하지만 죽음은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상태일 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래 죽을 수 없는 “생령(生靈)”을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비록 죄를 짓고 죽을 죄인이라도 결코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33:11)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38b) 이스라엘에서의 일반적인 죽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흙으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家門)마다 굴을 파 두고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죽은 사람을 그곳에 넣어 두는 내용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헷족속에게 헤브론의 막벨라 굴을 사서 대대의 무덤으로 사용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기록이다(창23장).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39f) 이 결연한 주님의 명령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한 명령이셨다. 주님께서는 죽음과 삶의 사이에 놓여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신 것이다. ‘돌이 놓여 있는 체로 불러내시면 불가능하실까!’ 물론 그것이 제한이 되지 않겠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 또한 주님의 은혜요 사랑이시다.

나중 나사로를 불러내시기 전 함께 돌을 굴러냈던 사람들은 두고두고 자신들이 주님의 역사를 도왔다고 자긍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것 역시 그 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사망의 그늘에서 사람들을 생명으로 불러내는 일에 동참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기에 표현을 따르면 “돌을 옮겨 놓으라!”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러분들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럼에도 여기에 또 하나의 불신이 가로막고 나선다. 그것은 유대인들도 불신의 사람도 주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b) 이 표현은 좀더 쉽게 묘사하면 ‘이제는 늦었어요, 썩기 시작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보고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확인 때문에 주님의 역사는 더 빛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르다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b) 라는 표현은 믿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판단이나 생각 그리고 수단이 다 끝났을 때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기도”라는 역시 주님께서 주신 도구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이런 마르다의 부정적인 탄식 앞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확인하신다.

이미 앞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하였고 이 마르다의 말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하실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고백한 믿음의 확인이다.

실컷 “내가 믿나이다!” 고백해 놓고 사실적인 상황에서 다시 의심이 생기는 것은 마태복음14:29~30에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는 모습과 같다. 물위로 “오라!” 하시는 것은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이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은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는 사실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 약속은 어느 시간 어디에서나 같은 진리의 언약이다. 주님의 약속이 “내 말이”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반대로 믿지 못하면 여전히 ‘죽음과 슬픔과 좌절과 비극을 볼 뿐이다.’라는 말씀과 같다. 오늘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Ⅱ.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주님은 다음의 단계로 넘어 가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기에는 준비되지 못한 나사로의 자매들과 주변에 죽음을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의 불신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심을 본다.

몰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꼭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나사로를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은 아니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의 내용도 자신에게 어떤 것을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오로지 주변의 사람들로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고 고백 드린다. 또 이렇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기도 하셔서 기도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돌을 옮겨 놓으니”(41ff)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심에도 순서를 분명히 하신다. 주님께서 먼저 “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시고 그 명령이 지켜졌을 때 그 다음의 역사를 진행하심이 역시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같다.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빛이 있으라”(창1:2~3)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41m) 이 놀라운 역사가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역사임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들 속에 나타내시는 것이다.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를 공경하심을 둘러선 청중들에게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b) 그 주변의 유대인들도 그랬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즉, 함께 계심을 불신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기도하려는 자세에 벌써 하나님은 기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믿음과 기도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하나님을 가까이 의식하고 산다면 이미 우리의 마음의 속삭임까지도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면 크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아무 소리가 없어도 하나님은 듣고 계심을 주님처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b)

그런 이유에서 다시 확인하시기를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42f) 감사드리는 것이다. 두번씩이나 하나님 아버지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찬양하면서 그것도 “항상”으로 수식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이유를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42m) 라고 말씀드린다. 그러므로 이 기도 조차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고백 드리는 것을 본다. 역시 오늘 우리 자신들의 기도를 여기에 비교해 볼 수 있다.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b) 앞에서 계속 봐왔고 이 요한복음에서 계속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수없이 가르치셨지만(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20:21) 언제나 반응은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심은 자연스러운 내용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유일한 죄의 해격책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불신할 이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믿음의 고백도 복잡할 것이 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또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사모하는 영생의 비결임에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 주님의 안타까움 이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COVID-19를 통해서도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Ⅲ.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3~46)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나사로의 다시 삶을 인하여 주변에 불신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음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후에는 비로소 부활이요 생명이신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 이러한 행동이야 말로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고 그것도 작은 소리가 아닌 “큰 소리로” 부르니 말이다.

만약에 불가능했다면(믿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들릴 듯 말 듯할 수 있었겠지만, 확실하고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불러 내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명령이셨기 때문에 응답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눅3:8)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돌인 들 불가능할 이유가 없으시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f) 이 모습은 쉽게 표현하면 염(殮)해서 관에 눕혔던 모습 그대로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5:28에서 안식일에 38년된 중풍병자를 치료했다고 시비 거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이 역사(歷史)의 마지막에 있을 일을 말씀하신 바 있다. (우스개 소리 같으면서 흔한 얘기 - 만약 나사로를 지명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 했다면 그날 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주변의 사람들은 다 입을 벌렸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죽어 있던 사람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표현되는 모습이라서 놀랐을 것이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신 후에 거기에 죽어 썩어가는 사람이 응답을 하니 그 권능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상황에 입을 벌리고 놀라고 있을 사람들에게 다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b)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 명령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은 나흘이나 무덤에 누워있던 시신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제는 죽었던 자의 염(殮)을 풀어내는 감격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론 누가 이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평생에 이 사건을 되돌아보며 두고두고 감격했을 것이다.

다른 표적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기록들이 요한 사도의 인용한 일곱 표적 말미(末尾)마다 기록되고 있지만 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생각되지만 여전히 이 사건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눠 짐을 볼 수 있다.

이 두가지 반응에 대하여 요한은 평소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보다는 불신과 거절로 일관했던 사람들의 변화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 본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조문하여 위로하기 위해서 와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놀라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생명의 역사에 믿지 못하는 강심장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 “마리아에게 와”있던 사람들은 상황적으로 추측해보기로는 평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만약에 믿는 사람들이었다면 요한은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한 것이 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대표적으로 첫번째 표적인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말미에서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한 것처럼 “그를 믿으니라.”했었다.

“그를 믿었으나”한 것은 뒤에 이어질 어떤 근거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바로 뒤이어지는 표현이 이 문장을 완성해 주고 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6) 이 엄청난 경험을 하고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고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역시 의를 행하기에 익숙함 보다 죄를 범하는데 더 빠름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6) 이 표현도 조금은 의아한 것이 주로 성전에서 예수님과 부딪혔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계통인 제사장들에게 가서 알린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시간에 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야 되심을 거절하던 이 바리새인들도 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으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 지기 때문에 고민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를 행하심에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참여시키는 것을 감사하게 되고 이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신의 완악한 마음은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경험한다고 해도 여전히 믿지 못함을 보는 데서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