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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1:47~57 2020-09-13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의 절정이었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접한 이스라엘의 기존의 종교지도자들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정도 되었으면 받아들이고 주님을 받들고 내려 앉으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질 못하고 오히려 죽이지 못할 생명의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비극을 벌인다.

오늘 제목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구원을 말하는 것이지만 신기한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의(오히려 반대자) 입술에서 이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불변하는 기록된 말씀이 있어서 확실하지만, OT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전혀 믿음의 백성들이 예상할 수 없는 대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게 하시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너무 자주 인용된 사례이고 이스라엘의 신앙회복을 분명히 이끈 왕들 중에서 히스기야 왕과 버금가는 요시야 같은 경우가 그런 예가 된다. 역대하35:20~24을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것을 요시야가 유다를 치러 온 줄 알고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자 느고가 사신을 보내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21)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다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죽는다(22~2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썼던 요시야 왕조차도 ‘하나님이 설마 이방 임금을 통해서 말씀하실 리가 있겠는가!’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면에서 충성된 성군(聖君)이었던 요시야 왕은 이로 인해 자신의 삶을 다 살지 못하고 비운에 죽고 만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감이 있어 미안하지만 우리가 감사해야 할 또 한가지는 이제는 이런 혼란이 전혀 없는 기록된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역사의 흐름을 바로 판단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 놓고 주님을 섬기면 자신도 살고 모두가 살 것임에도 권력이라는 매력 있는 도구는 한번 맛보고 나면 죽어도 놓지 못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반이고 그래서 망하고 죽는 것도 흔한 역사속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안타까운 이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표적은 병들어 죽은 이야기로 시작하여 살리는 귀중한 일로 진행되었지만 사악한 인간의 간교함 때문에 다시 죽이려는 비극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Ⅰ. 옳지 못한 우려(47~50)

사람은 걱정을 하며 사는 존재들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걱정 중에 사실적으로 일어날 기능성이 있는 일은 5%도 안된다고 하는 통계를 본다. 그럼에도 다윗성군의 후예를 자부하면서 백성을 이끈다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여 앉아 나누는 걱정은 사실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 지난 주 마지막에 다루었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6)는 상황의 파급효과이면서 반응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오셔서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를 다시 살렸다. 이정도면 우리가 여태껏 누려왔던 종교적 사회적 권세를 그분께 돌려 드리고 그분을 높여 받들어 섬기자!’ 라는 정도의 반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보다 능력 있고 인기있는 대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걱정하고 머리를 맞대고 사악한 궁리를 짜내기에 바쁘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자신들의 특권을 이어 가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를 도구로 종교적 특권을 누려왔다.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로 성전을 중심으로 명예와 부를 축적해 왔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로 명예를 지켜왔다.

이런 양보할 수 없는 존귀에 아직까지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갑자기 나사렛에서 왔다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성전을 통한 이권을 챙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삶이 따로따로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맹렬한 비판을 쏟아 내시는 것(마23장)을 못마땅하게 여겨 왔던 것이다.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 결국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표적들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저들이 걱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재미있는 대조는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와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은 그분이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저들의 반응은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고민은 그 사실을 어떻게 감추거나 거짓이라고 뒤집을 수 있는가 하는 복음에 순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악한 모습이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결국 자신들이 이리저리 로마의 통치를 받아드려 제사장제도 같은 중요한 종교적역할까지 타협하면서 지금까지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으로 민중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며 대모라도 일어난다면 로마가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걱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 이 말씀 조차가 모순적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율법과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것도 로마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율법에서 대제사장직은 그의 죽기까지 인 것은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민35:25, 28, 32)임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 해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말씀을 나눈 바 있지만 로마정부는 이스라엘이 왕이나 종교에 어떤 한 사람이 절대권력을 가짐으로써 막강한 힘으로 하나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평생직인 제사장직을 한해씩 교대로 수행하도록 율법 자체를 바꿔 버렸다. 이런 정치적 이유에서 “그 해 대제사장”이란 말이 나왔다.[비대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 이 말씀은 오늘 제목으로 잡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유일한 계획으로 최초의 범죄 이후부터 줄기차게 흘러온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계획이며 결론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스라엘 즉, 자신의 민족만을 두고 말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한 사람이 인류를 위하여 죽어서 온 인류가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를 떠나서 사람이 되시고(빌2:6~8)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시고 이 역사의 마지막에 그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게” 된 사람들을 위하여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히9:28b)



Ⅱ. 하나님의 예언의 도구(51~54)

우리는 서론에서 애굽 왕 느고의 입을 통하여 요시야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한 사실을 말한 바 있지만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나라의 점술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가 하면(민22~24장) 때로는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게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벧후2:16).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하고 백성들을 속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는 대제사장을 통하여 인류구원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 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51)

비록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시장바닥을 만들어 잇속을 챙기고 있던 헤롯이 지은 성전에 들어 가셔서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거나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 하심으로서 본래적인 의미가 잃어진 것은 아님을 말씀하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믿지 못해서 교회나 신앙이 비난 받기는 하지만 성경이나 하나님이 불완전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럼에도 요한은 이 가야바의 말한 것을 되돌아보면서 구원사적(救援史的)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51f) 이 요한복음은 이미 이 모든 사건이 완료된 일 세기 말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v51b은 다음 절과 함께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b~52)

앞의 “그 민족”은 분명히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라고 한 것은 10:16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는 10:16의 “한 무리가 되어” 라는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2b)고 완벽한 구원의 역사를 예언한 것이다.

이 기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기 위한 것이라 했는데, 어두움의 역사는 함께 된 백성들을 흩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다. 모으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흩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쉽다. 이런 입장에서 이 시대의 신앙을 염려하는 것은 잘 타는 장작불을 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것과 같다. 잘 불타고 있는 장작불도 각자 하나씩 흩어 두면 이내 꺼지고 만다. 어두움의 세력은 오늘날 이런 원리로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히브리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는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깨달았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 그 대속의 죽음을 자신들이 시행하려 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저들의 간교함을 이미 아시는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하신 때까지는 저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54)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이 역사(歷史)에 흐르는 구원의 물줄기를 흐리지 않기 위하여 나설 때와 물러설 때까지도 철저히 지키셨다. 주님께서 이러셨다면 우리 역시 이런 부분에 까지도 본받아야만 할 것이다.



Ⅲ. 체포공고(55~57)

다시 얼마간의 시간은 흐르고 이러한 표적의 절정을 듣고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의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오실 것인가, 오시지 않을 것인가를 서로 묻는 것이 흔한 광경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서 공포된 명령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55)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이 종교력으로 첫째 달인 니산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되는데 처음 출애굽기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후대에 오면서 유월절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성결케 하는 일들이 기록되고 있다(민9:6, 10; 대하30장)

그러나 그 성결예식이 자신의 거하는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보다 온전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는 반드시 이 의식을 거쳐야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 다시 “유월절[פֶּסַח(pehsakh ←(פָּסַח, 뛰다, 춤추다, 멈추다, 껑충뛰다, 넘어가다) passover, (πάσχα) 건너뛰다, 넘어가다, 지나치다, 모르는 체하다]”을 이야기를 하게 되지만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고 복음 속에서도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고전5:7)을 인하여 죄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죄의 형벌을 간과한다(지나친다)는 입장에서 역시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이런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중심이 되시고 이러한 사실을 비록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라고 예언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56)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으로 여기고 없애려고 별 궁리를 다했지만 그래도 군중들은 지금까지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들으며 눈으로 보고자 했음을 읽을 수 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1:22)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56f)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서로서로 그런 주님에 대한 과심을 나눴음을 볼 수 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56b) 이러한 표현도 한사람 한사람의 관계에서 얘기한 것이 아님을 보는데 개개인이었다면 ‘너의(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하지 않고 pl.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는 표현으로 몇몇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보는 데서 그렇다.

어찌 보면 유월절 절기보다 더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같을 정도로 보인다. 이 사람들은 주님의 표적이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로만 전해 듣고 실제로 만나 뵙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고 주님께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요한은 표현하고 있고 바로 이 유월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57) 예루살렘에서 어느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기록되고 있었다.

산헤드린 공회의 공식 법령인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은 마치 아합 왕 때의 큰 가뭄후에 아합과 이세벨이 전 이스라엘에게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서 누구든지 엘리야를 만나면 신고하도록 내린 명령과 다르지 않다(왕상18:1~19:2).

의롭게 사는 것이 이 땅위에서 결코 편한 것이 아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왜, 의인이 고난이 많을까 생각하면 이 세상이 죄악 된 곳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셔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고 오늘도 진실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고난당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종적인 약속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b)라는 마지막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많은 자신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라는 허황된 우려를 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뿐인 종교인들 때문에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우려하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우리의 처지나 형편을 통해서도 교훈 하시기도 하신다. 지금은 비록 직접적으로 계시를 주시거나 꿈을 통해서 말씀하지는 않으시지만 때로는 불신의 사람들이나 되어지는 상황을 통해서도 우리를 일깨우신다.

의롭게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언제나 유리하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건져 주심을 믿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진실히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인하여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고 건지심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