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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2:1~11 2020-09-20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행보는 이제 마지막에 다다랐다. 이제 이 잔치 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대속을 예언하신 후(12~36f) 유대인들의 불신과 마지막 심판에 대해 선언하시는(36b~50) 과정으로 진행되고 다음 13~17장까지는 땅에 두고가실 제자들을 교훈하시고 아버지께 기도로 맡기신다.

공교롭게도 최초의 표적은 혼인잔치에 잃어버린 흥을 찾아 주기 위한 이적의 역사였고 그후 수많은 잔치에 참여하신 바 있었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잔치는 없었고 주님의 생애 마지막에 이 베다니에서 베풀어진 이 잔치가 그런 이유에서도 의미가 있다.

실제로 이 잔치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하심으로서 마지막 구속의 역사를 바로 앞 둔 것임을 볼 때 더욱 의미가 크다.

이 사건과 비슷한 내용이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의 기록(마26:6~13; 막14:3~9)은 같은 사건인 것으로 보이지만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눅7:37~50)은 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여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물론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심한 간격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는 마리아라는 이름도 가룟 유다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지 않은 것은 모두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는 상태이거나 또 다른 이유에서 실명을 침묵하고 있는 반면에 이 요한복음은 모든 사건이 종료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고 보여 진다.

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에 음식과 더불어 마리아의 헌신과 그녀의 주님을 위한 사랑이 극진했음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다름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정을 맡겨 주신 가룟 유다의 찬물을 끼얹는 듯한 자세 때문에 이 아름다운 헌신이 조금 가려지고 주께서 이 상황을 다시 회복해 주시고 칭찬과 함께 자신의 구속의 역사까지도 언급하심을 볼 수 있다.

선한 복음의 역사의 주변에는 언제나 어둠은 틈타고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의 역사를 왜곡하고 방해하려는 역사도 같이 나타나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서운하게 만드는 일들이 어느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음도 각오해야만 함을 배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칭찬이 아니라 핍박과 어려움은 물론 미움 받을 각오까지도 하지 않으면 진정한 헌신은 쉽지 않음을 각오하면서 충성해야만 할 것이다.



Ⅰ. 마리아의 헌신(1~3)

구속(救贖)의 십자가를 지셔야 할 시기가 가까워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에 다시 오셨고 이곳에서 주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장례를 위한 잔치라고 하셨다(7). 오늘 메시지는 주로 여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잔치에서도 마르다의 헌신적인 섬김과 죽었다가 살아난 생명의 증인인 나사로가 주님과 함께 앉아있고 주님의 발 앞에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리아의 섬김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기쁨을 끼치고 있음을 본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 물론 이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드나드실 때마다 이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자주 들르셨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들이 있다(마21:17; 막11:11)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이 첨가된 것은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 결국 그냥 들락거리셨던 곳이기 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로 알게 할 수 있는 더 유명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 놀라운 표적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로 더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예루살렘 바로 문턱에서 이루어 진 것은 주님을 제거하려고 벼르던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곳이 되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2) 이 잔치를 하고 있는 집은 여기에는 언급은 없지만 병행구절인 공관복음에 보는 대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마26:6)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막14:3)

여기에 대한 무성한 추측이 많지만 같은 베다니에 과거 나병을 앓다가 주님께 고침을 받고 그 역시 감사해서 이 잔치를 함께 벌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이 현재로 그가 나병환자라면 일반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서 이런 이해가 가능하다.

누가복음10:38~42에도 나타나 있지만 마르다는 언제나 주님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헌신하고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에게 싫은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몸으로 헌신하는 모습은 이미 주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다. 물론 이 내용이 공관복음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범위를 넓게 펼쳐보면 문제될 것은 없다. 이 내용을 편의상 3부분으로 나눠서 상고하고자 한다.

①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이 가치가 뒤에 가룟 유다의 표현을 빌리면 “삼백 데나리온”(5)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일용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하면 오늘 우리의 화폐단위로 51,000,000원(180,000x300)이 넘는 가치가 된다. 그랬기에 계산에 밝은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고 불평을 했을 것이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 우리는 흔하게 듣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는 이 향유를 세밀하게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부(富)와 영광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아가서에서 이 향유를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아1:12)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아4:13~14)

이런 입장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예수 그리스도께 경제적으로 계산하면 한 순간에 허비하는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순전한 나드였기 때문에 비싼 향유인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어떤 재물을 드리는 헌신이든지 다른 생각을 섞지 않은 순수한 믿음으로 드려야 함을 마리아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같은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막14:3) 했는데 “그 옥합을 깨뜨려” 그 귀중한 가치의 기름을 주님을 위해 드리려는 생각에서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길 생각을 갖지 않기 위해서 담았던 그릇을 깨뜨려 버렸을 것으로 이해된다.

마가는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 여기 표현대로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을 다하여 드린 것이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죽음의 염을 미리 한 것이라는 신령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 인류 구속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데서 그럴 가치가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는 그것을 생각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이렇게 사용하신 것이다.

②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마태26:7나 마가 14:3에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잔치에서 귀한 이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흔한 풍습이었다.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 누가복음7:46에 주님께서 자신을 청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에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그대로 표현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그러므로 많은 주경학자들이 함께 이해하는 견해는 마태나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머리에 바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한 나드 향유는 가룟 유다가 가격으로 말하는 것으로 짐작해서 상당히 많은 양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이유에서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른 후에 최고의 존경의 표시로 발에까지 발랐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게 된다.

또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리는 자세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여자의 머리는 여성에 있어서 대단히 귀하게 관리하고 머리를 꾸미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자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데서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라는 모습은 자신의 모든 존귀를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비록 오빠인 나사로가 죽을 병이 들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라고 청했지만 오시지 않고 마침내 죽고 말자, 예수께서 다시 오셨음에도 나가 맞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까지 나는 오빠를 되살려 주심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마음에 담아 이런 헌신을 드렸을 것이다.

그럼으로 이런 마리아의 헌신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드리는 실제적인 모습으로 영생의 은혜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헌신의 모범이다. 재산과 몸과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우리는 영생의 선물을 받고도 오히려 더 달라고 주님께 떼를 쓰는 모습이 아닌지 오늘 이 마리아의 헌신에서 도전이 되기 바란다.

③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즘도 집안의 악취를 면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향제를 사용해 보지만 온 집안이 그런 향기로 채워지려면 공간마다 방향제를 뿌리거나 휘발시켜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큰 희생이겠지만 이 헌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온 집안이 값비싼 나드 향기로 충만하게 되었다. 오늘 날도 우리 개개인의 헌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향기로 가득 찰 수 있을 것인데 향기가 아니라 비방으로 넘치는 것은 우리가 마리아처럼 희생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면에서 마리아의 헌신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도전이 크다.



Ⅱ. 헌신의 곡해와 의미(4~8)

이 아름다운 사건조차도 어둠의 세력은 틈을 타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방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4) 공관복음의 저자들도 한결같이 가룟 유다를 표현하기를 “예수를 판 자”(마10:4, 막3:19, 눅6:16)로 기록하고 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5) 구제를 빙자하여 그럴싸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미 이 사실을 겪고 온 요한은 그의 감춘 마음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6f) 마리아처럼 참으로 몸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말이 필요 없고 사실 바른 신앙은 그래야 한다.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6b) 도둑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가까운 곳에도 있었고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기신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때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재정을 가끔은 자신의 것으로 유용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던 것을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사랑과 선한 의도로 이 일을 행하였고 반대로 가룟 유다는 악한 의도와 자신의 권리를 넘어서는 분수에 지나친 책망이었다.

이 사실 앞에서도 주님께서 당장에 가룟 유다를 책망하기보다는 마리아의 헌신을 칭찬하심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이 말은 몇가지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지만 이 마리아의 헌신의 행동 자체를 앞으로 있게 될 자신의 장례에 적용하시는 것으로 이 귀한 일을 위하여 마리아는 그 향유를 간직해 왔다는 이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8) 이 말씀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는 가룟 유다의 악한 의도로 지나치게 마리아의 선한 행동을 책망하는 것에 대한 주님의 교훈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8f) 그냥 지나가는 듯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 역시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다. 이 역사 속에 도움이 필요 없는 모두가 부유한 때는 한 시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세상 속담에도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이 있다.

OT 율법에서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8f) 라는 말씀은 진실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필요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8b) 이 말씀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하신 말씀과 같이 이해해야 할 성격의 말씀은 아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구제를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가능하지만 지금 마리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을 위한 헌신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주님께서 육신으로는 잠시 제자들을 떠나 가실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역사하는 곳에는 항상 어두움의 세력도 함께 그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역사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마리아처럼 선한 의도의 헌신도 잠시 비방 받을 수 있으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도울 수 있다는 귀중한 도전이다.



Ⅲ. 생명의 증인 나사로(9~11)

이 귀한 잔치자리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도 보고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 중의 표적이요 이적 중에 이적인 나사로의 회생의 이야기는 보다 멀리 퍼져 나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사람에게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그 생명의 산 증인인 나사로도 보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실체인 나사로를 죽이려 모의하는 것인데 참으로 제사장 중에 대제사장 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이러한 간교한 역사는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을 보게 되는데 물론 군중들에게서 가 아니라 그들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 간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9) 여기에 표현되고 있는 “큰 무리[ὄχλος πολὺς]”는 6:2, 5에 나타나는 표현과 같은 단어들이 사용된 것으로 봐서 사실적으로 엄청난 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무리들이 다음 마당에서 다루게 되는 예루살렘 입성 때 “호산나!”를 소리 높여 외쳤던 군중들(12)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단 이 많은 군중들이 모여든 이유는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9b)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보고자 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는 것으로 봐서 주님의 생명의 증인을 보고자 했음이 이유였다.

사실 어떤 유명한 의사가 죽을 사람을 살렸다고 할 때도 그 의사뿐만 아니라 그 의사가 살려낸 사람도 보고싶어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당연한 것인 것처럼 역사속에 없었던 표적을 행하신 분과 그 표적의 증거인 나사로를 함께 보고싶어 한 것은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의 언저리에는 또 옛 뱀 곧 사탄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을 요한은 전하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 이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고 나사로까지도 같이 죽이려는 흉계를 폭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 여기 표현으로 볼 때 그래도 지금까지는 종교지도자들 편에 있었던 사람들조차 나사로의 부활 때문에 저들에게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기 때문임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의 증인들은 그때는 물론이고 오늘도 필요하고 오늘 우리 각자가 영원한 흑암과 죽음의 권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면 여러 사탄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