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12:12~19 2020-09-27
호산나!  
다윗 왕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모든 외부의 포학한 적들로부터 구원하리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로마의 총독아래 수탈을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치욕스러운 것이었고 역시 이러한 안타까움을 해결해줄 능력도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로마의 학정이나 그 로마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매국노 같은 세무 공무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나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숨을 쉬게 하는 이유들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약속한 메시야 만이 이 모든 불평등과 고통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의의통치를 이룰 능력자로 믿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이 약속의 권능의 통치자의 오심을 기다리며 고통을 참고 견디는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은 참으로 가뭄의 생수 같은 것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이나 능력은 그런 이유에서도 백성들에게 지금까지의 저들의 지도자들과 너무 많이 다른 모습이었고 특히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린 것은 이들에게 “바로 이 분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했고 물론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고백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나사로의 회생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고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주님을 향해 모이는 사람들은 많아 진 것이 확실하여 이번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리라 기대하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시편의 내용을 빌려서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과 같은 넉두리를 하고 있다. 오늘도 모두가 환영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변화무쌍한 세상과 상관없이 우리의 오직 하나의 변함없는 소망이며 기쁨임을 찬양하는 모두 이기를 …



Ⅰ. 이제 구원 하소서! (12~13)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의 시기를 “유월절 엿새 전에…”(1f) 라고 기록한 바 있게 때문에 연 이은 기록임을 볼 수 있는데 그 시기가 역시 “그 이튿날에 명절에 온 큰 무리가…” 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여기 “명절에 온 큰 무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에 찾아왔던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9f)라고 했던 무리와 함께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12b)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이심에 반응이 좀더 적극적이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으로 군중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소문만 들어도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소식만으로도 행복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복된 소식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이제 이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얼마나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을 향하여 컸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13f) 이미 우리는 종려나무에 관해 말한 바 있지만 한 마디로 종려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며 승리의 깃발과 다르지 않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속에 국기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어쩌면 저들은 이스라엘 국기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가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종려나무가 많은 곳은 오아시스가 있어 장막을 칠 장소였고 시원히 쉴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대표적으로 모세오경에 기록을 보면 “마라를 떠나 엘림에 이르니 엘림에는 샘물 열둘과 종려 칠십 그루가 있으므로 거기에 진을 치고”(민33:9) 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종려나무는 생명력과 풍성한 소출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내용도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아7:7) 라고 솔로몬이 자신의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을 비유하는 내용인데 하늘을 향하여 곧게 크는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정절을 상징하고 풍성하고 단 열매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종려나무의 생명력은 잘라낸 그루터기에 불을 질러도 거기서 다시 움이 나올 정도이지만 하늘을 향한 가장 위의 가운데 순을 잘라버리면 그 강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임에도 이내 죽어버리는 신기한 식물로 역시 하나님을 바라는 곧은 믿음이 생명임을 상징한다.

성경에는 일반 해수면보다 약 200M 낮은 여리고를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부르고 있다.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34:3; 삿1:16, 3:13)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OT성경에 19회나 언급하고 있는데 젖은 목축을 하기에 좋은 유목의 환경을 의미하고 “꿀이 흐르는” 의미는 물론 자연산 꿀이 많이 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바로 종려나무 열매로 만든 달콤한 꿀과 같은 쨈을 이스라엘은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고 하여 무화과나 석류와 함께 과목을 키우기에 좋은 환경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는 저들의 반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는 저들의 기대를 그대로 표현한 모습이었다.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b)고 이어지고 있는데 이 또한 시편118:25을 그대로 사용하는 내용이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다.

“호산나[נָּא הוֹשִׁיעָה] (יָשַׁע, 해방시키다, 구원하다 + נָּא, 제발, 바라건데, 지금)”

그럼으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라는 찬송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무에게나 부르짖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는 로마라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다스림에서 끌어내 달라는 호소이기 때문에 절대권력 이신 하나님의 권능만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 하나님의 보내신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이기 때문에 바로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외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외침에 누구보다도 지금까지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챙겨왔던 대제사장 그룹의 사두개인들이나 율법 교사로 존경을 받아왔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섬짓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는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조롱당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기도요 찬송이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죄인 된 우리를 위해 희생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신부 된 순결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섞여 살면서 COVID-19라는 로마와 같은 강적을 만나 예배에까지 정부의 정치적인 간섭(control)을 당하는 시점에 왔다.

이런 시점에서 COVID-19 바이러스를 탓하기보다 정부를 탓하기보다 신앙의 힘을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다시 하늘의 권능을 회복해야만 할 시기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호산나”를 외쳐야만 한다.

우리는 종려나무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을 향한 곧은 절개를 꺾어버리면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우리 자신이 순결을 회복하지 않으면 아무리 “호산나”를 부르짖을지라도 하나님은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께 우리 각자의 믿음의 절개를 회복하고 “호산나”를 부르짖는다면 반드시 이 위기가 신앙의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줄 믿는다.



Ⅱ.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14~16)

예전에 마태복음을 강론하면서 이 내용을 다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의 내용이 좀 다르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 세상적으로는 “호산나”를 부르짖는 저들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여기서 본다.

강적 로마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전쟁의 말발굽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늠름한 말을 타고 아니 세상의 군왕들처럼 흰 말을 타고 나타나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 보는 대로는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11:2; 눅19:30)고 명령하심을 볼 수 있다. 무슨 아직 훈련시키지 않은 말을 타는 로데오경기도 아니고 사람이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께서 과연 이스라엘을 모든 얽매인 것 들에서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의심이 생길 정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강한 권력을 가진 나라의 칼이나 전쟁을 통해서 이김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예언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

이 말씀은 스가랴9:9b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나귀는 우직하고 작은 덩치보다 힘은 좋지만 절대로 전쟁에 쓰일 만큼 말처럼 용감하거나 민첩하지 못하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처럼 공의로우며 겸손을 함께 가지려면 폭력적이거나 피를 흘려서 이기는 싸움일 수 없다. 인류를 통일하고 제패하는 것은 칼이나 총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의 힘이기 때문에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린 나귀를 타실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역사 속에 무력으로 덩치를 키웠던 큰 나라들은 사실 오래 가지 못했고 또 계속 넓은 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나 바벨론 페르시아가 다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제자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고 요한은 고백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을 요한은 자신이 쓴 이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고 성령으로 알게 되는 영적인 진리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 이해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이러한 성령의 깨달음의 역할을 나중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교훈 하실 때 이를 더욱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한 것이다.

여기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라는 것도 역시 이미 앞에서도 다룬 바 있지만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여 죽음을 정복하시고 승천하신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2:22에서도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두고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는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모든 하늘의 신령한 영적인 이치는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성령의 역사와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감추어진 진리는 비로소 보게 되고 이해되고 알게 되는 귀중한 이치를 당시에는 주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Ⅲ. 생명의 증언과 거짓의 낙담(17~19)

오늘의 마지막 이 부분도 앞의 사건들에 나타난 반응들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건들에 반응은 각각 다른 것을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앞의 11장에서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언했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1:50)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또 다른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17) 어쩌면 들떠 있는 이 군중가운데서 나사로의 부활을 함께 목격했던 사람들이 이 고양되어 있는 군중들에게 자신들의 봤던 사실을 증거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증인으로서 의 자세이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율법에서나 복음에서나 다르지 않다. 나중 오순절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에 복음을 전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서 심문을 당하고 위협을 받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활 후 예수께서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15:6)라고 바울은 증거하지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를 불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17)는 증거를 볼 때 이를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의 또 다른 일부는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8) 즉,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표적 행하신 것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신빙성이 있는 사건을 전해 듣는 것 역시 듣는 사람이 신뢰를 갖고 듣는다면 보는 것 지지 않은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거짓이 없으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지막 부분은 그러한 군중들의 외침을 듣는 바리새인들 서로 간의 증언이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 이 말은 앞에서도 증거한 바 있지만 예언적이고 미래적인 사실의 증거이다.

여기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했는데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그 때까지 [하던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바로 앞장의 마지막 57절에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하였다.

연이어 오늘 말씀 바로 앞 10절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라는 것으로 봐서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방법으로 든 제거하려고 궁리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들이 결국 헛된 일이라는 고백이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b) 했는데 결국 자신들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추앙하고 따를 것이라는 예언적인 넉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연이어 다음 주에 상고하게 되겠지만 v20~21에 이 예언은 이루어짐을 보게 되는데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라는 내용이 그것이고, 그들이 그렇게 비상처럼 싫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제 세계를 뒤덮어서 오늘 우리 대한민국 부산에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하였지만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의 경영이나 의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쇠폐하고 하나님의 뜻이 굳게 서는 것이 검증된 샘이다. 이럴 때마다 솔로몬의 교훈이 생각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1, 9) 아무리 권력과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위해서 획책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한 기초 노릇만 할 뿐이라는 증거이다. 이제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하는 가는 더욱 분명해졌다.

평안치 못하고 안타까움에 있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들어오심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과 같이 외쳐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도록 먼저 우리들 자신이 성결을 회복해야 함을 생각했다. 이 COVID-19로 인하여 피폐해진 우리의 신앙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과 다르다. 세상의 무력과 권력에서 구원하시는 방법도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분명히 무력이나 칼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세상권력의 폭정으로 이스라엘을 수탈하는 것에서 그보다 큰 힘과 능력으로 자유케 하여 주시기를 바랐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사랑의 힘으로 남을 죽이기 보다는 자신이 죽으심으로 모든 얽매인 죄에서 우리 모두를 자유케 하셨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보이는 권력이나 힘이 더 강하고 오늘 권력이 신앙까지도 좌지우지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음이 없고 사람들의 권모술수가 권력을 영원히 세워 갈 것 같지만 어리석은 것 같고 힘없이 당하는 것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뜻만이 견고히 설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듣고 본 바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