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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2:20~28f 2020-10-04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지난 주 바리새인들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19) 라는 예언이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 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이방인을 접하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진행 내용으로 볼 때는 이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났는지, 또 주님께서 그들과 나누신 대화도 기록되고 있지 않아서 나중의 진행되는 과정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헬라인들이 예수께 직접 가지 않고 빌립을 통하고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이유는 있었겠지만 분명한 것은 역시 침묵하고 있다.

또, 복음의 완성이 되기까지는 예수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음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전해 들으시면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b) 즉, 십자가에 구속의 역사를 이루셔야 함을 말씀하셨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주님께서 이 요한복음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인 생명의 씨앗으로서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을 말씀하시고 주님께서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

또 이러한 희생의 원리는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것을 증거하신다. 생명의 이치는 희생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자연의 이치를 들어 그를 따르는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는데 그것은 이 생명을 위한 자신에게 주어진 희생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주님의 기도였고 그것이 역시 스스로 감당하시기에는 벅찬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즉시 응답하신 내용이 나타나지만 이것 역시 당시에 옆에 있었던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독특하지만 다음 시간으로 나누어 상고하고자 한다.

이제 복음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완성되었고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한 알의 죽는 밀알들이 되어서 우리의 주변에 생명을 움 티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각자가 생명을 가진 상태로만 가능하고 생명은 생명의 희생이 없이는 절대로 생겨 지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교훈을 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Ⅰ. 최초의 주님을 찾은 외국인(20~22)

이번 유월절에는 사도행전8:26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이 있는 것처럼 유대교에 입교한 그리스인 몇 사람이 있었던 것 같고 그들의 움직임을 요한은 단순한 서술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20)

그럼에도 독특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으로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21)라고 기록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2 제자들을 선택하여 보내시면서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 명령하심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대상하는 제한적 은혜를 선포하신 바 있다.

또 조금 뒤에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가나안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고통하고 있으니 낫게 해 달라는 요청을 드렸을 때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약속은 마태복음을 끝내는 즉,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f)는 명령으로 확대되었음을 본다.

이것은 누가복음 말미에서도 확인해 주는 말씀이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7)

그럼에도 모든 공관복음서들과 대부분의 복음적 서신들이 완성된 후에 기록된 이 요한복음에서 이미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았다는 기록이 요한을 통해서 기록되고 있는 것도 특이한 부분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가나안 여인이 딸의 치료를 위해서 찾은 것과는 다르게 이 기록은 분명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독특한 사건이 공관복음에는 기록조차 되지 않았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당시에 중심 부류가 아니었다는 이유에서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이나 결과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헬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찾아 간 것이 아니라 뱃새다 출신인 빌립을 통하여 보고싶다는 요청을 했고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22)라는 수순을 밟고 있다. 왜 이런 수순을 밟았는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어서 알 수는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한 것의 내용은 분명하다.

왜, 또 ‘12제자들 중에 빌립일까?’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빌립의 출신인 뱃새다에 헬라인들이 더러 살고 있었다는 것과 [빌립]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인 데서 빌립이 그리스어에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해이지만 이런 것이 그다지 중요하거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인들이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들의 물리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뵈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고 우리 또한 주님을 가까이 모시려는 이유가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감사와 경외감이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배운다.



Ⅱ. 죽어야 열매 맺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23~25)

이 12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장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마리아의 예수님께 향유를 붇는 처음의 사건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군중들이 “호산나!”를 부르짖은 것을 거쳐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아 영광을 돌리는 사건과 오늘 본문의 주님의 기도에도 다음 주에 보겠지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b)는 응답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인들이 주님을 뵙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라고 하신 것은 결코 보이는 영광이라기 보다는 온 일류를 위한 복음의 완성을 결심하시는 주님의 자의적인 고백이다. 즉,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속죄해야 할 것을 확인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야 비로소 보다 깊은 진리를 선포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4f)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듣고 순종해야만 할 진리임을 전제하시는 표현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24m) 그야말로 당시의 일차산업이 주류였던 농경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교훈이다.

바울 사도도 죽은 몸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주님과 같은 가르침을 증거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15:36)

밀을 땅에 뿌리는 것은 그 밀이 죽어 삯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밀 알갱이가 흙덩이 속에 깔려서 죽지 못하면 절대로 새로운 움이 돋는 일은 기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f) 즉, 입술로는 골백번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자신이 죽지 못하기 때문에 내 안에서 생명의 싻은 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고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죽는 것의 이해를 못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들 중에 거의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죽지 못하기 때문에 신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주님의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한다. 나 자신이 죽지 못하면 언제나 나 혼자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4b)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생명의 역사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얻어질 생명을 예언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사53:10m)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하다는 스승도 교주도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죽지 않았고 또 죽어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가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시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족하지만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드릴 수 있다.

왜, 우리는 죽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연이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25ff)여서 그렇다. 우리는 모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의 생명이 죽을까 봐 걱정하기 때문에 죽지 못하는 모습이고 이러한 결과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25f) 답변을 주고 계신다.

물론 이 말씀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웃사랑의 근거는 줄기차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마22:39; 막12:31, 33; 눅10:27; 롬13:9) 다만 육신적인 자기연민이나 애정보다는 영적인 생명, 영생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경계하시기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25f)라고 경계를 주신다. 나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시도록 나를 부정하고 그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나를 영원히 얻게 될 것임을 가르치신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b) 앞에서도 말한대로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이치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나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하나님과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신에 대하여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바울의 고백속에서도 보는 바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이런 탄식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f)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나와는 너무나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드디어 이 갈등을 해소하게 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된다는 고백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극복이 될 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b)는 주님의 약속이 실제적이 되는 것이다. 주님을 너무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신의 의지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부정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에 영원히 보존되는 이치는 어렵지 않은 이해가 된다.

오늘도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나 자신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임을 확인하고 자신의 악한 의지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희생을 본받을 때 영생에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Ⅲ. 주님을 섬기는 자세와 하나님께 기도(16~28)

여기v26의 3번이나 나타난 섬김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귀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함께 거할 것임을 증거하시고 이제 오늘 나누는 마지막 두절(27~28)은 인류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함을 본다.

v26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는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말씀이다.

이미 앞의 5:23에서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신 바 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

“나를 섬기려면(διακονέω) - 나를 따르라; 나를 섬기는 자(διάκονος) - 나 있는 곳에 있으리니; 나를 섬기면(διακονέω) - 귀히 여기시리라”는 연결이 재미있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교는 섬기는 삶이 전체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시는 생명이다(갈2:20)

①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면서 먼저는 영광 받을 것부터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요, 동시에 그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②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라야 거처를 함께 할 것이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앞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말씀하신 바 있다.

③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귀히 여기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세상의 보이는 가치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제 분위기는 또 다시 바뀌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상태와 위탁과 사명을 그대로 고백하시는 기도이다.

①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힘겹게 기도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f; 막14:36f; 눅22:42f)

②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앞에서 보는 대로 인류를 위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각할 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고난이었음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그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 자신이 감당하기 위해 오신 것도 아셨다. 그럼으로 이것은 절대로 회피가 아니라 의탁이셨다. 그러므로 “감당하게 하옵소서!”였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③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b; 막14:36b; 눅22:42b) 라는 사명의 확인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28) 그렇게 장황하고 긴 기도의 내용이 아니다. 함에도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고 여기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8)라는 표현도 “창세로부터 계획된 이 엄청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잘 감당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옵소서!” 라는 의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육신적인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희생이기 때문에 이 귀한 주님께 당시 헬라인들처럼 공경하고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요 우리의 반응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먼저 생명의 희생으로 밑거름이 되어야 만 하는 이치는 자연에서나 영적인 이치에서 다르지 않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희생을 기꺼이 드릴 때 우리 주변에 또 새로운 생명이 움트게 될 것이다. 언제나 나 자신이 살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한 생명의 역사는 그러한 사람 주변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역할이 크게 보이는 것이든 적게 보이는 것이든 그것은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의지하며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또한 그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믿으시기를…